(안덕면 덕수리 효자비에 관한 글을 쓰다 생각난 정씨 열녀비를 재정리합니다)
한남리 정씨열녀비
의귀리 사무소 부근 다리건너 귤밭 돌담에 삐뚜름히 서있어서 통상 의귀리열녀비라 하던 비석입니다.
길에서 보이는 부분에는 牧使韓公 到處見聞 重修古跡 莫非其惠 且矜無后 特下後援 改造石碑 道光十四年 三月 日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834년에 목사 한응호가 제주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고적을 중수하다가 이곳에는 옛 흔적이 없어져 특별한 후원으로 비석을 다시 세웠다라는 내용입니다.
또 한면을 보면
烈女鄭氏之碑 高麗石谷里甫介之妻哈赤之亂其夫死鄭年少無子有姿色安撫使軍官强欲娶之鄭以死自誓引刀欲自刎竟不得娶 至老不嫁事라고 쓰여 있습니다.
정씨는 고려땅 석곡리에 보개의 부인인데 합적지란때 남편이 죽었다.
정씨는 아직 나이가 적고 자식도 없고 자색이 있어 안무사군관이 취하고자 욕심을 내었으나
정씨는 스스로 죽기로 하고 칼을 끌어 목을 베려하니 취하지 못하였다.
늙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네요.
이 비석은 순조 24년 (1834년) 정월에 쓰여진 책에 의해서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목사 한응호는 부임과 동시 김영락에게 효자, 효부, 열녀, 의사등에 대한 효열록을 기술할 것을 지시합니다.
(효열록 도지정 유형문화재 28호)
여기에 제주인 孝子 26인, 孝婦 5인, 烈女 27인, 義士 3인이 기록되었는데
그 중 열녀 정씨에 대한 비가 망실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목사가 다시 비를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주의 거의 모든 비석이 그렇듯이 이 비석도 뱅뱅 돕니다.
이 비석 이전 것은 그 언젠가 없어졌고 이 비석은 한목사의 후원으로 180여 년 전에 세워졌는데
석곡리 사람이라 했으니 남원읍의 전신인 서종면 서의리, 지금의 남원 1리 지경에 있었어야 할 텐데
어쩌다 의귀리 사무소 인근 귤밭 돌담에 기대어 있다가
길 확장에 거치적거렸는지 2006년도 말경 철거되어 한남리 사무소 서쪽 창고옆 공터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그 때 한남리사무소가서 물어 봤더니 그곳 지번이 한남리 4번지인가 그래서 한남리에서 철거해 왔다면서
일단은 창고 안에 보관하다가 적당한 장소에 다시 세운다고 하던데
얼마 전에 갔을 때 보니 리사무소 창고는 보수중인데 비석은 주변 어디에도 세워져 있지 않더군요.
마을이장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다시 세우려는데 경비가 좀 문제가 되어서 지체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나마 문화적 마인드가 있는 이장 덕에 비석은 어딘가 보관되어 있지만 재설치 하는데 어떤 이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 문화적 의의가 있는 것이라면 도 문화예술단체주관하에 다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비전문가의 단견일지 모릅니다만
도내 곳곳에 산재한 충효, 효열, 열녀비들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이 정씨열녀비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 아닐까요?
(1996년 제주 교육박물관 효열록)
제주가 몽고의 지배를 받는 동안 목동으로 와있던 몽고인 보개가 목호의 난을 진압을 하러 온 정부군(고려)에 대항하다 죽습니다.
역도의 무리들이지요.
그런 남편을 두었던 정씨 여인이 당시 서슬 퍼런 안무사가 첩으로 들이겠다는 것을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정절을 지키고 홀로 늙어 갑니다.
목호의 난이 끝난 지 54년 후인 세종 10년(1428년)에 그 여인이 죽자 그 여인이 살던 마을로 정려가 내려옵니다.
이것은 당시 제주에서 뿐이 아니고 그 후 조선에서도 몽고인이 침략자, 수탈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 아닐까요?
차라리 고려조정을 수탈자로 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고려조정의 대리자인 안무사에게 대항한 것을 의롭다하지 않았을까요?
조선조정의 공식입장은 모르겠지만 제주민에게 몽고는 일방적인 수탈자는 아니었다라는 생각의 단초를 제공해 주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비석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통상 이비를 이야기 할 때 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에 있는
조선 태종 13년(1413)에 제주都按撫使 尹臨이 효자·절부로서 보고한 나이 20에 남편이 죽었으나 절개를 지켰다하는 鄭氏의 비석과 혼동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안이라고 합니다(제주발전연구원 문순덕)
그런데 이 태종 때의 비석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한남리 몽고인의 처 정씨의 비석도 이렇게 차일피일하다 사라지면 역사책 한구탱이에 야사로만 남을 겁니다.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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