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800미터지점에 있고
바다를 전혀끼고 있지 않은 동네이름이 왜 海安洞일까요?
제주시 중심지에서 서남쪽지점에 있는 자연마을입니다.
행정동으로는 노형동에 속합니다.
마을서쪽으로는 근심걱정이 없다는 무수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초지가 꽤 크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초지가 넓어서 그런지
조선시대에는 4소장이 있던 곳이지요.
1780년경의 제주읍지에
해안에 위치한 4소장의 넓이는 45리이고 물이 열한곳이 있다.
둔마는 573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지역은 약 500년전 주루레라는곳에 설촌(묵은가름)했고
그러다가 300년전에 또다른 씨족이 이승물주변에 마을을 형성(새가름)하였답니다.
그래서 마을의 형태가 게의 양쪽 눈이 툭튀어나온 형상
蟹眼마을이라 했으나 마을이 편하질 않아
바다가 잘보이는 마을이니만큼 바다처럼 마을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海安마을로 고쳤다합니다.
마을이 살아있나를 알려주는 지표. 초등학교. 해안분교장.
학생수를 유지하려고 각종 교육여건을 향상시키고 타지학생까지 버스로 통학을 시키는 등 굉장히 노력을 많이한 학교입니다.
그 노력의 결과로 1983년 3월에 분교로 다운된지 28년만인 내년 3월에 본교로 다시 승격된다합니다.
근심없는 마을체험관이랍니다.
이승물이 이부근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메워져 없습니다.
해안동 포제단
이승물동산에 있다가 감귤창고를 지으면서 독숭물옆으로 갔다가 다시 이곳 감귤창고옆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안분교앞 해안동을 가로지르는 내를 건넙니다.
특별한 이름이 없어 앞내라 부른답니다.
올리소
앞내에 있는 소를 일컫습니다.
올리 그러니까 오리들이 많이 찾아와 놀던 소라는거지요.
동카름앞 비석거리
해방전후에서 70년대까지 길넓혀주어 고맙습니다. 전기놔주어 고맙습니다. 다리놔주어 고맙습니다.
이것저것 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비석 세운사람과 그 후손들은 거의 마을을 떠났고
제주시에서 가깝다고 요새는 새로운 식구들이 많이 유입됩니다.
마을 서쪽끝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본향당을 찾아갑니다.
독숭물에 인접해 있고 일뤳날 제를 지낸다하여 독숭물일뤳당이라고 하고,
송씨할마님을 모신다하여 송씨할망당.
절물동산 하르방당을 웃당이라 한다해서 알당.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마을의 생산,물고,호적,장적을 관장하시는 제석천왕또 송씨할마님을 모시는당입니다.
입구에 돌담으로 올레를 조성했고 주변에 팽나무 7~8그루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신목인 팽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큰가지 몇개는 고사중입니다.
나무의 나이는 약 500살, 높이는 16m이고, 가슴높이 둘레는6.6m.
바닥에서 약 4m 위 지점에서 줄기가 4-5개로 갈라져 하늘로 뻗어 있습니다만
나뭇가지가 남쪽으로만 치우쳐 있습니다.
1970년대 초 국가차원의 미신타파 정책으로 관에서 굵은 가지 일부를 잘랐다합니다.
이때 잘린 부위 기둥줄기가 썩어가기 시작하면서 근래 인공 수피 수술이 이뤄졌지만 몰골만 흉측해졌을 뿐,
과거 무성했던 흔적은 사라지고 나무는 병색이 완연한 사람마냥 힘이 없습니다.
점차 기울어 가는 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200년대 초에 세운 가지 받침대와 함께 보면 나무는 마치 시골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형상입니다.
여느 마을의 신목과 달리 이 팽나무에는 친근함이 배어있습니다.
어느 마을 신목은 그 앞에서 떠들거나 말을타고 지나가면 동티가 나게 했다지만
이마을 신목은 할망 나왔수다한마디하고 고개 한번 숙이면
나무에 올라 또래들과 하루종일 놀곤 해도 아이들을 씩씩하게 잘자라게 해주었다 합니다.
독숭물로 갑니다.
독숭물가기전에 족은내로 내려가 고망물을 찾습니다.
거꾸로 올라와 독숭물을 찾습니다.
한때는 해안마을 서동의 생명수
하지만 이제는 찾늠이도 없고 접근하기도 쉽지않습니다.
독은 돌의 뜻이고 숭은 숭글숭글의 숭이랍니다.
돌에 있는 구멍에서 솟아나는 물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이일대를 독숭굴이라고 했답니다.
주변을 잠시 탐색하는 사이 금방어두워 졌습니다.
들어온 길을 못찾아서 주변을 헤메이 예전에 이곳까지 연결되었던 시멘트길을 발견했습니다만
끊어진 도로가 고생한보따리를 안겨 주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Frederic Chop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