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4.3학살 광풍을 막아선 의인을 아십니까? 문형순서장

하늘타리. 2010. 9. 13. 16:32

 

지난 6월 26일과 7월 24일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알뜨르, 역사의 올레란 주제하에

알뜨르비행장에서 역사의 길을 묻다라는 답사프로그램을 다녀왔습니다.
이러한 기행들은 꽤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보다 냉철한 접근이 이루어 지겠지 하는 기대에 참가했습니다만
누가 안내하던 똑같이 안내자의 비분강개속에 하루가 갑니다.

 

꽤 많은 사진들을 찍었습니다만

포스팅을 할 생각이 없어서 사진들이 어느한구석에 있는데...

 

스치고 지나온 자취중 상모리짐개동산사진이 있습니다.


조남수목사와 김남원민보단장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이어지고 모슬포교회쪽으로 안내하는 군요.
중요한 설명이 빠집니다.

 

스스로에게 보충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1949년초 토벌이 한창 진행중인 때 군과 경찰,

그리고 서청은 소위 말하는 산사람들과 연루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 학살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군과 경찰은 제주 전역에서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주민들의 자수를 강요했으나

자수한 주민의 대다수가 산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라고 규정되어 결국 죽임을 당하였지요..


하지만 모슬포에서 자수한 사람들 100여명은 그대로 살아났습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이 문형순이었는데

조목사와 민보단장이 문 서장에게  '자수시킬 테니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죠.
문 서장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다른 마을에서 산사람과의 연루를 이유로 자수한 모든 사람을 죽음에 처할때

상부의 압박을 감내하며 그들을 보호하고

민보단사무실에서 자술서를 써오게 한 후

그것을 기초로 경찰조서를 작성하여 무혐의라고 상부에 보고하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살아난 사람들이 문형순 서장덕분이라고 하지 않으니

살아난 사람은 그냥 하늘이 도운 것이고

 그 사실은 그냥 묻히고 말았습니다.

 

문형순 서장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다른 사안의 문서한장을 보여드릴게요.


1999년 1월 대정출신의 4.3 연구가 이도영 박사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자행된

소위 ‘예비검속 학살’을 입증해 주는 경찰자료를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지요.
예비검속으로 마을마다 수백명씩,  전도적으로 수천명이 다시 희생됐습니다.
모슬포 ‘백조일손’ 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던 거지요.


그런데 희안하게도 성산포에서는 좌익행적이 확연한 6명만이 희생을 당합니다.
그것은 위 사진으로 보시는 문서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계엄사령관의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을 ‘거부’한  문형순의 서명이 있습니다.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부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성산포경찰서장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공문을 보냅니다.
김두찬은 이 문서에서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이 문서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서명을 하며

전쟁상황에서 계엄사령부의 총살명령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당시 일개 경찰서장이 계엄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과도 매 한가지입니다.
문형순 서장은 그 어떤 명령보다도 민족을 아끼는 진정한 애국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문형순은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가 데이터베이스 관리번호 70229번에서도 확인되지만
1930년대 18만~40만명에 이르는 남만(南滿) 일대 한인을 바탕으로 준자치를 실시한 '국민부'의 중앙호위대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로는 참으로 불쌍합니다.


독립운동에 젊음을 보내다 보니 가정을 꾸리질 못했고

미군정에서 독립운동이나 광복군경력을 인정해주질 않으니

김구선생등의 거물이나 누구나 할 것없이 개인자격으로 뿔뿔히 귀국합니다.

 

어떻게 경찰을 들어가서 활동하지만
친일파가 득세한 속에서 독립군계열이다 보니 무시는 못하지만 더 이상 진출은 되질 않았지요.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는 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보통의 문장실력이 아님에도

상사들에게는 글도 모르는  문도깨비라고 불리우곤 했습니다.
그만큼 꽉막혔다고 비아냥거리는거지요.


경찰을 그만둔후 제주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할 게 없지요.
쌀배급소 직원, 극장 매표원등으로 어렵게 살다가 돌보아 주는이 없이 1966년 숨을 거둡니다.


경찰에서 전직경찰서장의 죽음이라고 위에다 보고합니다.
아 그런데 그 경력을 보니 경찰서장이전에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는 점때문에 정부에 보고하게 되고
당시 독립투사들이 서거하면 대통령명의로 주던 하사금이 내려옵니다.


그 돈으로 평안도민회에서 건입동공동묘지에 장사를 치뤄줍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비석을 깨뜨립니다.

죽어서도 편하질 못하네요.
그래서 평안도민회에서는 평안도민회 공동묘지가 있는 아라동지역으로 옮겼다가

(아라동에 있을때의 공동묘지표지석)

 

그 지역이 제주대학에 편입되게 되면서 공동묘지를 옮기게 되어

지금의 자리인 오등동 평안도민공동묘지로  옮겨와 계십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성산포와 모슬포주민들이 그를 챙길것 같으나.
아무도 그를 챙기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차라리 모슬포지역에서는 그를 폄하하는 사람조차 있는 형편입니다.

 

1996년의 모슬포 짐개동산 위령비의 모습입니다. 


4.3당시 마을 주민들을 살리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는 조남수 목사와

나중에 대정면장을 지낸 김남원 당시 민보단장의 공덕비는 세웠으나

막상 그들을 보호하고 무혐의로 풀어준

문서장의 공덕비는 없습니다.

 

2005년 늦여름의 짐개동산입니다.
어떤경위를 통해서인지 문형순서장의 공덕비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하모리 문형순 공덕비 철거 비상대책위가 구성되고
제주4.3유족회 대정지회에서 문서장공덕비의 철거를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문서장이 4.3시기 대정지역 학살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건데...


그들은
▲영락리 '양은하 피살' ▲동일2리 '세미피살'

▲서림피살 ▲상모리 이교동 '48인 피살 및 대살' ▲대정고 옆 '특공대 피살사건' 등

4.3당시 대정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 일체를 문 서장과 관련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그만 생각해 보시면 알겠지만 이들 사건 모두

문 서장이 모슬포경찰서장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발생했던 사건이고

게다가 특공대피살사건은 육군 허욱 대위가 이끄는 부대에서 자행한 것으로 규명되었습니다.


모슬포경찰서가 만들어진 것은 1949년 1월 18일로

문 서장은 이때부터 11월까지 초대 서장을 지내다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을 다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재직중 자수자 100여명을 보호하고 풀어준 것은 인정하지 않고

그가 부임하기전 모슬포지서시절의 일을 모두 그와 관련짓고 있습니다.


공덕비를 부시지는 않았지만 참 차갑게 대하더군요.

 

철천지 원수같은 서청사람들과 같은 평안도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그를 인정하기 싫은 것일까요?


사실 그가 독립군출신이라는 것도 작용했겠지만

그가 평안도 사람이라는 것도 작용하여

그의 관할지역에 있던 서청단원들은 못된짓을 삼가지 않았을까요?


결국 아무런 보탬도 주지 않았던 고향사람들이 그의 사후를 돌보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문 서장 등의 독립유공자 유족을 찾아 정부 포상을 하려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행정조치를 요청할 권한이 있는 유족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립유공자 대열에 오르지 못하고 국립묘지로 가지도 못하고

이곳 평안도민 공동묘지 한구텅이에서 작년이나 금년이나 잡초 가득 뒤짚어 쓰고 누워계십니다.

 

묘비 좌측 西紀 1897년 1월4일 平南 安州 出生. 1966년 6월20일 死.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大韓民國 樹立 後 摹瑟浦 城山浦 警察署長 歷任 이란

단출한 약력이 그가 살아온 69년의 세월을 웅변하고 있으며....   

 

비석 뒷면은 죽어서도 한군데 정착하지 못하는 구슬픈 사연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