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환리지경으로 들어왔습니다.
두머니물
한문으로 頭面怡물이랍니다.
머리 두, 얼굴 면, 화합 이,
강정과 법환의 잠수책임자 그러니까 상군잠수들이 만나
인사를 나누고 화합을 다짐하는 장소라서 두머니물이라고 불리우지 않나 생각한다네요...
법환바다밭은 강정사람들의 양해하에 아끈내까지 였는데
왜 여기서 만나나요?
고개를 돌려 한라산을 바라보니
고근산과 그품에 안긴 월드컵경기장이 보입니다.
범섬이 꽤나 가까이 다가왔네요.
범섬의 새끼섬도 이름이 있는데...추도??
흰돌밑코지
오른쪽 부터 문섬 섭섬 그리고 제지기 오름
제지기오름앞이 새섬
새섬 왼쪽이 새연교..
섬만 당겨서
문섬, 섭섬
모두 한자리에..
제주 남서쪽에 가면 산방산이 있지요
사냥꾼이 어떤 짐승을 잡는다고 화살을 날렸는데
실수로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춥니다.
엉덩이가 따끔..
깜짝놀란 옥황상제가 주변 손에 잡히는 한라산 꼭대기를 잡아 냅다 던집니다.
그때 뽑혀나와 던져진 것이
저쪽 마을에서는 산방산이라고 하고
이부근 마을에서는
범섬. 문섬. 섭섬이라하지요.
떨어질때 깨져가지고 셋으로 나뉘었다는 거지요....
아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설화인데 그래도 과학적 근거는 있어요.
제주도 일대가 대부분 현무암이지요.
이쪽 바닷가도 그렇고
그런데 범섬, 문섬, 섭섬은 주로 조면암으로 형성되어 있거든요.
한라산 정상과 백록담 기저부도 조면암이고 산방산도 조면암입니다.
떨어져 쪼개져 세개의 섬으로 나눌 때 그 부스러기가
범섬의 새끼섬, 문섬의 새끼섬이 되었네요...
오다리
지명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표지판
칸나가 만개한 둔덕
상대성 원리
칸나만 보면 그것도 꽤 키가 큰 편인데
더높은 곳에 야자수가 서있으니 왜소한 들꽃처럼 보이네요..
배염줄이.
바다로 길게 뻗어있는 여.
고려말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위해
이곳에서 부터 범섬까지 배를 이었다고
배연줄이라 하였는데 배염줄이로 변음되었다 합니다.
이곳에서의 목호와 고려군의 전투에서 목호군 수뇌부가 궤멸되었다.
이로써 고려는 100여년동안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제주도 지역을 되찾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써있는데
글쎄요?
그럴까요?
과연 통상 목호의 난이라고 하는 것이 원나라로 부터 제주도를 되찾아오기위한 전투였을 까요?
범섬에서의 전투를 저 문섬과 섭섬은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쓸데없이 잔인한 놈들이라고 혀를 차며
불쌍한 제주민들이라고 눈물흘리지 않았을까요?
해녀탈의실옆 복원된 불턱
물질을 마치고 나온 잠녀들이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하던 곳
해녀탈의실 옆 벽면에 걸려있는
잠녀들의 생명선 태왁.
태왁에 달려 있는 망사리
여기를 채워야 밥줄이 이어집니다..
그냥 마음이 짠합니다.
법환동 도로술 앞본향당입니다.
용왕황제국 따님애기와 일뤠중저를 모십니다.
들어가서 바로 왼쪽
일렛당
본향당
용왕국 따님애기 모시던 곳에
관청 송씨할망을 모셨습니다.
이건 아닌데..
관청할망은 공물깍에 모셔져 있어야 하는데..
공물깍 잡목수림안 작은 바위굴이 관청할망당입니다.
서귀포 관청할망을 가지갈라 모시는 곳인데 지난번에 갔을때 지전 물색은 없고 아주 오래된 양초자국만 있어서 폐당되었다 생각했습니다만
이곳으로 모셔왔네요.
그럼 이자리에 계셔서 마을의 생산,물고,호적,장적을 관장하시던 용왕황제국따님애기는 어디로 모셨나요?
마을의 90세 전후되신 강씨할머니와 조씨할머니가 이걸 다 알고 계신데 누구한테 물어서 여기다
관청할망비를 모셨나요?
자연스런 변천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건 왜곡입니다.
여긴 산육치병을 담당하시는 요드렛또를 모신곳.
여긴 타지에서 시집온 사람들이 모시는 조상신 중
양씨일월을 모신 곳
죄송합니다. 구덕놓는곳 옆에 있는 현씨일월 모신 곳 사진이 없네요.....
법환쪽으로 가다보니 풀장이 하나 있습니다.
풀장이 아니고 해녀체험장입니다.
서홍리, 호근리, 서호리, 법환리의 잠녀들이 법환동 어촌계를 구성하고 있어서 잠녀수도 많고
물질작업도 도내에서 가장 활발히 이루어 지는 곳입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물질 작업을 ‘바르칠’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을 특성을 살려 2007년부터 정부의 어촌관광진흥 종합대책의 하나로 추진되어 2009년 완공된
관광객들이 잠수복을 입고 해녀의 물질작업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만...
체험장 조성 당시 부실공사로 인해 체험장 내부에 고인 바닷물이 썩으면서 악취를 풍겨 관광객과 올레꾼들에게 안좋은 인상을 주기도 하고
또한 경치가 좋은 해안가에 체험장을 만들면서 미관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받기도 합니다.
게다가 최근 태풍 뎬무의 영향으로 체험장 내에 수문이 파손되어 어촌계 잠녀들이 고여 있는 물을 빼내느라 고생한다고 합니다.
체험센터안에 있는 잠녀복장입니다.
이런 복장과 장비등을 제공하고 한번 체험에 5000원이라는데
잘 운영되어 어촌계에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체험장에서 본 바다...
법환 잠녀광장
누구신가요?
바닷고기를 텅빈그물형상으로 만들고
그 앞에 빈손으로 망연자실 서있는 잠녀의 모습을 만드신 분은
누구신가요?
어찌 그리 미래를 꽤뚤어 보십니까?
법환
강정마을덕에 큰 바다밭을 가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강정마을때문에 바다밭을 버려야 하는 마을.
막상 강정마을 사람들은 해군기지를 찬성한다 반대한다 갈라지고, 보상 받은 사람도 많고
아직 보상않받은 사람들도
어촌계에서 소득증명자료제출등의 절차를 완료해서
해군으로 부터 해녀보상금과 정치망어선보상금 등의 어업피해보상금이 강정어촌계 계좌로 입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법환마을은 일관되게 해군기지설치를 반대하고
소득증명 자료제출 등의 보상절차를 밟지 않고 있습니다만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이 바다밭은 더이상 이마을사람들의 것이 아닐겁니다.
말그대로 텅빈 그물과
잡을게 아무것도 없는 잠녀의 모습만 남는거지요.
이아래의 모습 그대로 박제된 역사만 남는겁니다.
막숙포
노천목욕탕
서가름물
동가름물
포구 동쪽 또다른 노천목욕탕
동가름물/서가름물 안내판에 써있는 글
동가름물은 동쪽 동네물이라는 뜻
서가름물 동쪽에 있다.
서가름물은 서쪽 동네물이라는 뜻, 서쪽동네사람들이 사용했다.
뭥미?
막숙 설명문.
조금전에 보았던 막숙포입구 노천탕옆에 서귀포문화원에서 세운 어떤 박사님이 기술한 표지석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옛날 군사들이 숙영하던 곳이라 막숙이라한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원나라 사람들은 천성이 난폭하고 호전적이어
제주를 점거하고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명나라가 제주에서 기르는 말을 보내줄것을 요구하자
관리들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그래서 임금이 최영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케한다.
공민왕23년인 1374년에 최영은 군사 25605명을 병선 314척에 태우고
명월포에 상륙하여 그들을 격퇴하는데
목호의 잔당들이 법환마을앞 범섬으로 도망갔다.
이에 최영은 법환포구에 막을 치고
군사를 독려하여 목호의 잔당을 토벌했다.
(표지석글)
여기는 고려가 100년간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제주도 지역을 되찾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곳으로 의의가 깊다 ..고려사전공 문학박사000...
글쎄요?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특히 제주도 사람도 아니고 단지 여기 몇년 살고있는 사람일 뿐이지만..
이건 아닌것 같아요.
몽고는 1368년에 망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북경을 버리고 그들의 고향 몽골로 돌아가 버립니다.
주원장은 무주공산에서 큰소리를 치죠.
오늘부로 원나라는 멸망했다.
그런데 아니지요.
대륙경영에 관심을 잃은 원나라는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고
명나라는 거대했던 몽골제국영토중 일부분 중화지역을 되찾은 것이고,
몽골제국의 다른 영토들은 서로 나뉘어져 계속 유지하다가 하나씩 둘씩 사라져 간 겁니다.
제주도 그렇습니다.
1273년에 삼별초를 진압한 후 원에서는 군민총관부를 두고 다루가치가 다스리게 하였고
1277년도부터 종마를 보내고 그 말들을 관리할 목호를 보내어 목마장을 운영했습니다.
한 20년쯤 직접 통치했을까요?
1295년에 탐라를 고려에 귀속시켜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이름도 제주라고 바꾸고 목사와 판관을 보내 통치하고 있었던 거지요.
단지 말 기르는 일만은 목호가 직접 경영하였습니다.
사실 말을 기르면서 제주 경제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일단 말기르는 일에 인원이 많이 필요했고
훗날 조선시대와는 달리 말기르는 노력만큼의 품삯도 받았고
목마장을 위하여 개간한 지역 한구텅이에 초옥을 지어 가족과 함께 살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주로 이주해온 몽고인들과 통혼으로 친척관계도 형성되기도 하였고
그리고 말이 어느만큼 자라면 목호들이 그 말을 원나라로 가져가서 필요한 물품으로 바꾸어오곤 해서 그런데로 살만했다 합니다.
그러다가 1368년 원나라와의 교역이 끊깁니다.
1370년 고려와 명나라가 국교를 맺습니다.
명나라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어여삐 여겨 줄테니 원에 바치던 말을 우리에게 바쳐라.
1372년 고려는 예부상서를 명에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했고 그러자 의심많은 명에서는
나쁜말만 보낼까봐 말을 골라낼 간선어마사 유경원을 보냅니다.
유경원이 제주에 도착해서 목사의 비호하에 말을 고릅니다만
위압적인 행태와 더블어 그들의 유일한 재산인 말을 무상으로, 좋은 놈으로만 가져가겠다하자
목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석질리, 필사초고, 독불화, 관음보 등이 명에서 온 유경원과 탐라목사 겸 만호 이용장을 죽여버립니다.
그 후 제주인들이 판관 문서봉을 목사로 추대하고, 다음에는 말을 바치겠다고 해 더 이상 사태의 악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조정은 언젠가 제주를 손보아야 겠다고 마음을 먹게되지요.
1374년 명나라가 또다시 명마 2천필을 요구합니다.
이에 고려조정에서 문하평리 한방언을 제주에 보내어 지난번 약속대로 말을 바칠겄을 요구합니다.
그때 목호들은 도내 양마의 전부라 하며 3백필을 내놓겠다 합니다.
명나라 사신 임밀과 채빈 등은 2천필에 차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고려조정에서는 목호를 토벌하고 말을 노획코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최영에게 전함 314척, 병사 2만5605명을 주어 제주를 치게 합니다.
그들이 상대할 목호의 군사는 몇명일까요?
목호포함 말을 기르고 목초를 치는등 목장일을 거들던 1700명입니다.
1700명을 치러고 2만 5000을 동원했을까요?
이때 제주인구가 몇명인지 아십니까?
탐라가 원나라로 부터 고려에 다시 귀속된 후 조사된 호구조사에서 제주인구는 3만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1300년경부터 1374년까지 아무리 인구가 급속도로 늘었다해도 5만은 넘지 않았을 것이고
이중 남녀비율을 단순히 반반으로 본다 해도 2만 5천
이중 14세 미만과 60세 이상을 제외 한다면 성인남자는 맥시멈 15000명입니다.
이 1만5000을 칠려고 2만 5000을 동원한겁니다.
왜냐?
고려조정입장에서는 제주민 전부가 적도와 같습니다.
삼별초가 아직 진도에 있을 때
고려조정에서는 고여림과 김수가 지휘하는 군대를 제주에 파견합니다.
이들이 제주에 오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생업에 바쁘던 제주인을 전부 군인들의 노역에 동원하고
삼별초의 제주상륙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전부 바닷가에 성 쌓는데 동원합니다.
제주인 입장에서는 황당해도 이렇게 황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별초가 명월포에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질 때
차라리 삼별초를 응원했을 겁니다.
결국 고려관군 1000명은 지금의 화북지경 동제원에서 몰살을 당합니다.
고려군의 장수였던 김수는
이렇게 적습니다.
제주 토착민이 관군을 돕지않고 적군을 도와서 이렇게 참패했노라고...
이렇게 삼별초시대에도 적도의 땅이었기 때문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제주를 수복한 후에도
아무련 거리낌없이 제주를 원의 직할령으로 넘겨줍니다.
참 여몽연합군이 몇명인지 아세요?
만명입니다.
고려군 6천에 몽고군사 2000 몽고인지배하 한족병사등 2000..
이 10000명의 인원이 2~3000으로 추정하되는 삼별초군사를 섬멸했는데
1700명 정도의 목호군사를 섬멸하러 25605명의 정예군사를 보냈을까요?
약 이십몇년뒤 위화도회군으로 유명한 요동정벌때 동원한 군사가 몇명인지 아세요?
고려사절요에 좌우군이 모두 3만8830명에 심부름꾼이 1만1600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잡역부포함 5만이라는 거지요.
그 큰 요동땅에서 명나라 군사를 상대로 싸움을 치르려고 병사를 3만8천 동원했는데
제주목호와 그 군사 1700을 치는데 병사만 2만5천이라면 그 답은 나와있는 겁니다.
최영은 고려관군을 전멸시킨 삼별초의 이문경이 배를 내린
명월포에서 배를 내립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고려관군이 여기에 내린 이문경과 그를 도운 제주토착민들에게 몰살당했으니
내 고려의 장수로서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겠다고요....
한달이 넘는기간 동안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역사기록에 나오는 말 그대로
피가 내를 이루고 뇌와 간이 들을 덮습니다.
누구의 피고 누구의 뇌와 간일까요?
어름비벌판, 붉은 오름, 영실, 법화사를 거쳐 마지막으로 범섬까지 밀려간 묵호와 그 세력은
법환앞바다에서 도륙당합니다.
난은 끝났습니다.
난이 끝났으니 최초목적인 명에 진상할 말을 가져가야 겠지요.
제주도 전역에서 양호한 말을 모읍니다.
제주 전지역 목마장에서 아주늙고 어린말만 제외하고
몽땅 긁어대니 1700마리가 나옵니다.
930필과 770필을 나누어 육지로 보냅니다.
어쩐일인지 명나라 사신에게는 300필만 주고... 명나라 사신은 말 300필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게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들을 호송하던 고려의 金義가 개주참(봉황성)에서 명나라 사신 채빈과 그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붙잡아 갑사 3백 명과 호송 중 죽은 말 백마리를 제외한 공마 2백 필을 끌고 北元으로 달아나버립니다.
그뒤 명나라는 채빈의 피살사건을 구실로 1388년(우왕 14) 2월에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명의 영토에 편입시키겠다고 통고합니다.
철령 이북 지역이 원래 원나라에 속했다는 주장을 내세워,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도사의 관할 아래 놓는다고 고려에 통고한 것이지요.
철령위 이북인 요동지역은 공민왕 때 겨우 수복한 지역으로 명나라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되고
결국 최영의 죽음과 고려의 멸망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제주에서의 잔혹한 살륙..
그들에 의해 죽은 제주인들의 원한이 최영개인과 고려왕조를 멸망시키는 겁니다.
요동의 영웅 이성계가 요동을 버리고 회군하여 최영을 죽임으로 왕권을 취합니다.
최영이 왔다간후 제주의 남자가 3분의 1로 줄었습니다.
제주인의 삶은 더욱 피폐해집니다.
살기어려워진 제주인들은 도적이 되어 난을 일으킵니다.
제주인 차현우 등이 주동이 되어
고려조정에서 파견한 안무사와 당시 목사등을 살해합니다.
그뒤에도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일어나니까
전의부정 이행과 대호군 진여의에게 군사를 주어
탐라성주 고신걸과 그 아들 고봉례를 거의 압송하듯이 데리고 옵니다.
죽을래 살래.
까불면 죽인다.
완전한 복종의 의사를 보입니다.
고려사에 써있습니다.
"탐라의 귀순이 이로부터 비롯됐다"
본격적으로 육지에 예속되어
끊임없는 착취와 수탈을 받습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목호의 난의 진실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치유의 올 레길에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스스로 어지롭게 하고 있네요.
어지러운 정신을 추스리고 나니 저 건물의 벽은 어지러운 것도 아닙니다.
망다리
이 동산에서 달을 보는 정취가 일품이라 망달(望月)이라 했답니다
공물.
평소에는 솟지 않다가 천둥과 벼락이 치면 솟아났다고
물이 나고 나지 않음이 하늘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공물이라 한답니다.
쉽게 말하면 비가 오면 물이 흘러와 고이고
비가 않오면 흘러올 물이 없으니 고이질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잡초밭을 헤치고 들어가면 공물깍이 나오는데
그 곳에 관청할망당이 있었숩니다.
가볼까하다가
없어졌으니까 예전 길도 다 잡초에 덮혀 있고
관청할망을 도로술앞본향당으로 모셨겠지 하고 생각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잡초를 뚫고 가보기도 싫고
막상 진짜 없어졌으면 섭섭할 듯해서 입니다.
그 대신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어느 개인이 조성했을 듯한 소공원으로 들어갑니다.
문이 활짝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출입을 궂이 막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돌하르방, 물허벅상과 잠녀들 그리고 물방애
이런 제주적인 것들과 포대화상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과
그 언덕에서의 전망이 좋습니다.
한번 더 둘러보고..
계요등
꽃은 예쁘죠
하지만 그 냄새는 닭오줌냄새입니다.
이거는 사위질빵
그 덩쿨이 보기는 튼튼해 보이지만 무척 약해서 사위질빵입니다.
일렛당이 있어서 일냉이
이풀숲을 따라 내려가면 조그마한 궤가 있습니다.
그곳이 지금은 다니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일레당입니다.
수봉로를 거슬러 오릅니다.
그 옆으로 흐르는 물
일냉이와 그너머 범섬을 돌아보고
앞쪽에 보이는 문섬 등
뒤와 앞으로 계속 고개를 돌리며 풍경에만 취해 걷겠습니다.
속골천 맑은 물
대륜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 어딘가 살펴보고
옛 대정현과 정의현 경계를 넘겠습니다.
Josh Groban Alejat(떠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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