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올레 13코스
해안가를 이어오던 제주올레의 길이 드디어 바닷가와 잠시 작별을 하는 곳이랍니다.
여기 용수포구의 옛이름이 지삿개라 하지요.
지붕에 올릴 기와를 구웠던 바닷가 마을이라는건데
기와를 구웠으니 제주목 성안으로 들어가서 지붕에 기와얹고 살만한 사람한테 팔고와야지요.
그래서 올래도 내륙으로 향하나 봅니다.
엉덕으로 올라갑니다.
엉덕 깊숙한 곳에 절부암이라고 음각된 바위가 있습니다.
저지리 명이동에서 출생하여 조실부모하여 가난하지만 착하고 성실했던 고씨처녀가 있습니다.
신데렐라가 아니다 보니 같은 저지출신으로 역시 조실부모하여 가난하기 짝이 없는 강사철에게 시집을 가지요.
그곳 저지에서 생계를 꾸리지 못하자 이곳 용수에 와서 고기잡이를 합니다.
그래도 그날 그날 먹을거리와 조금씩의 세간을 장만하며 나름 행복하게 살다가
무엇에 쓰려는지 차귀도로 대나무를 베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질 못합니다.
남편의 시체라도 찾아보겠다고 두이레넘어 바닷가를 헤메고 다니던 고씨여인은
어느날 용수리 엉덕동산 큰나무에 목을 메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마을사람들이 측은한 마음에 얼마씩 추렴해서 장사를 지내기로 한 날
남편 강사철의 사체가 그 때까지는 바다와 접해 있던 엉덕앞 기슭으로 떠오릅니다.
갯껏들 일이라고 냉담하던 마을문장들이 흥분합니다.
이것은 흉노오사가 한나라를 계속 침입하던 시기인 한안2년(143년)에
조간의 딸이 오사의 침공을 피해 피난을 가다 강물에 빠져죽은 아비의 시체를 찾는다고 많은 날을 울면서 강을 헤메다
빠져죽은지 5일만에 아비의 시체와 같이 떠올랐다는 조아의 고사와 같다고 하여
두시신을 거두어 당산봉 기슭 양지바른 곳에 성대히 장사를 지냅니다.
후에 판관 신재우가 고씨가 목을 맨 나무옆 바위를 절부암이라 명명하고
마애명을 세우도록 하여 김응하를 감동으로 정합니다.
감동 김응하의 글씨를 당시 용수리 이장격인(그당시 이장의 호칭은 洞首 또는 尊位라 불리었습니다) 이팔근이 새깁니다(누군가를 시켰겠지요)
슬픈이야기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엉덕을 내려오는 길에 만난 거미줄
보석처럼 영롱하니 보기야 좋지만 날벌레들에게도 눈에 띌테니 거미는 굶어야 겠습니다.
엉덕기슭
이 바위틈에서 있는 박달목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고 합니다.
빙돌아서 엉덕위로 왔습니다.
아까 절부암사진뒤 따라 붙은 사진이 이곳으로 바로 올라오는 계단입니다.
어떤 일인지 펜스로 길을 막았습니다만
정자나무 였을 팽나무와 절암정이라 쓰여 있는 정자의 밑부분 판석이었거나 그 자체가 정자였을 시멘트구조물과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비석은 그냥 남아 있군요.
길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아니다. 마당이 깨끗한 것을 보아 누군가가 사는 것 같아요. 하지만 건물의 외양을 봐선 아닌 것 같고...
지나갑니다
마을을 벋어나서 마주친 곳.
콜라비가 밭에서 그냥 썩어갑니다.
호우와 태풍에 약한 당근, 감자 대채작목이라고 한 3년전부터 꽤 많이 재배하더니
글쎄요? 판로가 막혔나요?
여기도 그냥 지나갑니다.
잡목과 넝쿨... 그 위 거미줄....
안개가 아닙니다.
어제내린비에 모든 것이 젖어 있다가
뜨거운 햇살에 수증기를 내뿜습니다.
날씨는 덮고 습도가 너무 높아서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정려
효열탐라고씨지려
뒤를 보면 둘중 하나의 내용이 적혀 있을 겁니다.
남편이 아팠다. 그래서 병간호를 열심히 했으나 먼저 떠났다.
첫번째, 따라갔다.
두번째, 수절하며 시부모를 지극정성 봉양했다.
둘 중 하나
오로지 남성위주의 사회, 나죽으면 내 마누라 딴사람에게 시집갈까봐
그러면 당연히 내부모 모실사람이 없어지니까 열녀니 뭐니해서 그쪽으로 유도합니다.
효열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수절하며 시부모봉양을 잘 했다는 내용일 겁니다.
그 인고의 세월에 마음속으로나마 술한잔 따라드립니다.
어제 내린 비. 그 빗물이 고여있는 물웅덩이
장통밧이 아닌게 다행입니다.
다른 지역 조수나 저지에서는 이정도 물도 엄청 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 용수,용당,낙천등은 그래도 물을 구하기 쉬웠던 동네에 속합니다.
복원된 밭길을 따라 용수저수지로 갑니다.
밭가운데 제법 큰 물웅덩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용수저수지 뚝. 몸에 좋은 산야초를 취급하는 집의 간판입니다.
어울리게 간판 밑에 삼백초가 자랍니다.
용수저수지
주변 경작지에 물을 공급하는 중차대한 임무에서는 이제는 조금 벋어 났지요.
지금은 주변 습지들이 습지식물들의 군락으로 집중 조명된답니다.
저어새와 노랑부리 백로도 온다고는 하던데..
용수저수지를 만들기로 결정하신분
그 결정이 중요한거지요
당시의 도지사 길성운과 도의회 민의원들에 대한 송덕비입니다.
습지를 빙둘러 가면서 같은 곳을 꾹꾹꾹
안개낀 호수가 분위기 좋으신 가요?
안개가 물을 덮히면 올라오는 김처럼 퍼집니다.
호수주변이 아주 후끈 거립니다.
특전사숲길입니다.
제주지역에서 순환주둔하며 훈련하는 병사들이 복원한 옛길이랍니다.
숲길을 이어서 걷습니다.
모기들의 지나친 환영에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모기에도 착한 모기가 있고 나쁜 모기가 있을까?
그럼 숫모기는 착한 모기고 암모기는 나쁜 모기네요.
그런데 사실 암모기도 임신하지 않았을때는 피를 빨지 않아요.
그런데 뱃속에 알이들어서면 그것들을 성장시키는데 동물의 피가 필요하답니다.
그렇게 만들어 졌으니 그리 하는데 착하다 나쁘다 구분하는게 참 부질없지요.
앱스토어에 올라와 있는 애플리케이션 중 몇개가
모기가 싫어하는 주파수를 발생시켜 스마트폰 주변으로 모기들이 몰려드는 것을 방지해 준다니까 그방법을 이용하세요.
근데 나는 스마트폰이 없으니 계속 물릴 뿐이고..
빙글 빙글 각각 달리 이름 붙여진 몇개의 숲길을 걸었습니다
특전사숲길, 고목숲길, 고사리숲길 등 등
올래 안내판에 3키로 7개구간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일을 한다는 것.
그 결정이 중요하다는 생각.
낙천리로 연결되는 길에 포장도로 만이 있지 마땅한 숲길이 없어서
장병들의 힘을 빌어 숲길을 만들었습니다.
고마운 말이지만
500미터에서 700미터 도로가 이어진 지점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3킬로 돌리는 것이 효과적이었을까?
숲속에 있는 예전 잣성을 연해서 어떤 목적지를 정해 길을 죽 이은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까?
모기가 별 생각을 다하게 하네요.
의자가 보이는 것을 보니 낙천리 지경입니다.
천개의 의자를 만들었다는 마을
서둘지말라고
앉아서 쉬었다 가라고
말없이 강조합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하나
아홉굿마을과 의자의 상관관계는?
편하다는거?
지금도 어르신들중 일부는 조수낙천이라 하십니다만
조수와 저지의 설촌지인 용선달리를 기준으로 해서 서쪽 西泉味村이었다지요.
그러다 불미업이 잘되어 먹고살만해지고
불미에 사용할 흙을 파내면 자연스러이 못이 형성되니 살기가 좋아지지요.
그러니 사람이 모여들고
구덩이가 아홉 개가 있어 각기 용도가 틀리게 사용되는 연못까지 있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갑오경장무렵 분향하면서 샘이 있어 즐거운 마을 낙천리가 되었습니다.
좋은 시절이 4.3광풍에 쓸려가버리고
지금은 한경면 15개 마을 중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작습니다.
그래서 홍보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의자로 홍보는 많이 되었으니
지명, 또는 그 유래와 연관된 사업으로
지나가는 올래꾼이 아닌
이마을에서 돈을 쓰려고 오는 사람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의자를 둘러보고
수덕으로 올라갑니다.
푹쉬었습니다. 그런데..
발걸음이 저지쪽이 아닌
저거흘물쪽으로 향합니다
저거흘못에서 돌아가려합니다.
Felix Mendels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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