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4.
대정사람이 어디사람일까요?
당연히 행정구역상 대정읍 지역에 사시는 분들이지요.
그럼 대정 몽생이는요?
모슬포지역 출신을 대정몽생이라고 한다하데요.
몽생이는 작은 제주 조랑말을 의미하지요.
억척같아서, 요망져서, 근면해서, 드세서, 협동심이 강해서 등 등 불리워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각각이더군요.
대정 몽생이 앉았던 자리에는 풀도 않난다더라는 제주 어른들의 말이 있는 것을 보아서는
처음에는 좋은 의미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것을 모슬포지역 출신들의 각고면려로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럼 대정고을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모슬포지역출신을 대정 몽생이라고 부르니 대정고을은 모슬포지역이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제주분들도 많지만...
그건 아닙니다.
대정고을이라함은 지금의 인성, 안성, 보성과 일부의 구억 지경입니다.
그 이전은 생략하고 1416년, 조선태종 16년에 제주도 남쪽에 정의현과 대정현이 설치됩니다.
대정현은 지금의 법환에서 고산일대까지를 관할구역으로 합니다.
그 2년후 대정현감 유신이 지금의 보성초교에 현청을 설치하고
그 둘레 적당한 넓이로 대정현성을 축조하니 그 성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다 성안에 살았는데 점점 사람이 많아지다보니 성밖까지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1518년에 성의 남문과 북문을 잇는 선을 경계로 동성리와 서성리로 구분하다가
1879년 동성리를 안성리로 개칭하였고 1887년에 서성리는 보성리로 개칭하게 됩니다.
그 후 1891년에 인성리가, 1915년에 구억리가 안성리에서 분리되어 나옵니다.
마을이 이렇게 변천하는 동안 대정현이 대정군으로 바뀌었고 1899년 대정군에 우면 중면 좌면이 설치되고
1914년에 대정군우면만이 대정면으로 바뀌면서 면치소를 인성에 두었다가
1933년에 면치소가 인성리에서 상모리로 이전해 가면서 안성,인성,보성지역은 대정고을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게 됩니다.
면치소가 인성리에서 상모리로 이전한데서 아시겠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모슬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주로 슬픈 무대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다보니 대정 몽생이가 되어버렸던 거지요.
오늘의 주제는 대정고을이니까 안성,인성,보성지역을 돌아보겠습니다.
이지역에서는
추사적거지와 대정성지가 유명하지요.
추사적거지는 추사기념관에 대해 별도 블로깅할 때 언급하기로 하고....
대정성지를 한번 둘러 볼까요.
대정성지를 한번 둘러보기전에
이곳 대정고을이 유배의 땅이라고 하니까
대표적 유배인인 동계정온의 유허비를 먼저 둘러보시지요.
광해군시절 영창대군의 처형이 잘못된 것이니
그를 시행한 강화부사를 참수하라고 주장하였고
인목대비를 폐모한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상소하다가
이곳으로 유배를 옵니다.
막상 유배와서는 望北斗時, 望白雲歌등을 지어
愛君의 충정을 드러냈지만
10년 동안의 긴 유배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인조반정직후 석방되어
이조판서까지 되지만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 화의를 반대하다 밀려나 덕유산으로 은거 그 5년 후에 죽습니다.
제주 대정 3의사비입니다.
1901년에 일어난 제주도 민중항쟁의 세주역
오대현, 강우백 그리고 오대현의 뒤를 이어 서래군의 장두를 맡은 이재수를 기리는 비가 있습니다
또 다시 찾아온 신축년인 1961년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아래 사진과 같은 비를 세웠었는데
도로확장 등 사정으로 옮겨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1997년에 이곳에 다시 세웠답니다.
뒷면을 한번 읽어 보시죠.
천주교측과는 다소 내용이 다르지만 관점의 차이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않보이실테니 한번 보러 오시지요.
옛 대정현성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돌하르방을 보러 갑니다.
제주목에 있는 하르방이 위압적이라면 이곳 대정고을 하르방들은
광장히 정겹습니다.
제주시 하르방들은 이곳저곳 옮겨다녀서 뿔이 났지만
이 곳 하르방들은 주변은 지저분해도 있던 곳에 계속있으니 편안하신 것 같습니다.
위치도를 한번 보고..
자 뵈러 갑니다.
대정현성내 보성초등학교입구
대정현성 동문 옹성
추사관 전면
남문주변
보성리 마을길옆
보성리사무소입구
신평가는 길 변
성안에서 생활하려면 식수가 있어야 지요.
그당시 가장 중요한 식수인 드레물 .
성내 유일한 식수로 덕이 있는이가 목민관으로 오면 물이 용출하고 그렇지 못한이가 오면 물이 말랐었답니다.
엄청 깊어서 두레박으로 퍼올려야 했기때문에 드레물이라하고 한자로 거수정이라 했답니다.
아마도 지금은 말라있겠지요
성벽을 끼고 성내를 한바퀴 돌아봅니다.
요부근에 당이 있는데
오늘은 생략합니다.
성내 곳곳에 하늘타리 꽃이 지천입니다.
성내를 한바퀴 돌고서
보성리 복지회관 쪽으로 갑니다.
1977년에 새마을 회관을 새로 지었는데
그 때 출연하신 분들
사실 새마을 회관을 보러온게 아니고
이부근이 향사가 있던 자리라서 그 흔적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거지요.
향사를 무언가로 바꾸어 지을때 찬조하신분들에 대한 기념비입니다.
그리고 그뒤에 새마을 회관을 지었겠지요.
앞면
뒷면
가장 오래된 비석에 경오년이니까 1930년이겠네요
보암선생 조규진 기념비
소화 15년(1940년)에 마을의 문장이자 선행을 많이 하신분을 기념해 세운 건데
뒷면 첫줄이 흥미롭습니다.
靜之城西隅有一隱德之士..
붕우리못입니다.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데 여기 안내판에는 붕우룻물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일제시대 언젠가 조성된 못이라하고
조성당시에는 식수용, 목욕 빨래용, 우마급수용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1989년도에 확장보수하면서 물이 합쳐졌다합니다
2006년에 소공원으로 정비하여 주민휴식공간과 풍부한 농업용수를 제공하고 있답니다.
보성농협부근 전형적인 올레길
농협앞 보성리표식
보성리를 나와 안성리로 갑니다.
안성리는 요기 설촌유래에도 쓰여있듯이
대정현의 설치와 함께하는 유서깊은 마을이지요.
대정향교, 송죽사, 대정서당등이 있었던 곳이고
동계 정온, 추사 김정희가 유배와서
그들의 학문의 자취를 남긴 곳이기도 합니다.
이일대가 연무정, 사장못, 비석거리가 있었다는데..
그럼 거사비니 송덕비니 하는 것들이 꽤 많았을텐데
다 어디가고
복지회관 뒷 밭에 굴러다니던 두개만 남아있습니다.
현감 박상률 선정비
재직기간 1827.2.~1829.8.
군수 김몽구 연무건정비
재직기간 1870.9.~1873.1.
복지회관 잎에 있는
회관신축 및 전기 가설 때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기념비
인성리
문앞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남문앞 물이지요.
현감 유신이 대정현 관내백성을 총동원하여 대정현성을 축조할 때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질 않아 고심하던 차에
지나던 노승이 어떤 방도가 있다하여 모셔 물으니
서남쪽 산(모슬봉)이 화기가 있어 그 거센 기운이 성곽까지 미치니
남문앞에 물을 파서 물로 화기를 눌러주어야 만 백성들의 희생이 감해질 것이라 합니다.
이에 성곽축조에 앞서 커다란 연못을 판후 작업을 재개하니
과연 인명의 손상이 적었다 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흔적만 남아있던 곳인데..
최근에 정자도 지어놓고 말끔하게 단장을 했습니다.
단산쪽으로 갑니다.
인성리에서 단산으로 가다보면
그 왼쪽에 허물어져 가던 방사탑이 있었는데
말끔히 정비되어 있습니다.
대정성 축조후 이쪽 지역을 보면
단산에서 모슬봉까지 이어지는 광할한 들판이지요 .
그래서 마을에 않좋은 일이 생기면 남방이 허하여 마을에 액운이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1900년도 이문사라는 분이 尊位로 계실때
(존위:높은 지위, 당시 리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단산에서 모슬봉방향으로 인성리지경에 4기의 둥근돌탑위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이 올려진 방사탑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다 모슬포에 육군제1훈련소가 들어서면서 막사를 지을때
일대의 밭담 산담등 모든 석물을 걷어가
밭가운데 있던 두기의 방사탑이 분해 소실되었고
지금 보신 방사탑과 저멀리 또 한기의 방사탑은 길옆에 있는 것이라고 훼손을 면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져 가고 있었는데...
마을분들의 관심으로
보수와 복원이 되었다 합니다.
고개를 돌리니 복원된 방사탑이 보입니다.
그런데 길은 없어서 밭담옆을 조심스러이 가야 합니다.
도 지정 민속자료로 1995년도에 지정됐다고 합니다.
그럼 꽤 오래전에 보수되어 이자리에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또 다른 방사탑이 저기 보입니다.
밭담옆으로 다가가서
정면을 봅니다.
또 한곳의 방사탑으로 갑니다.
일직선상으로 설치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것저것 들어서면서 빙둘러서 가야합니다.
방사탑앞 올레길
단산으로 갑니다.
제주도를 동서로 구분해서 동쪽은 동거믄이
서쪽은 단산
이 두곳을 제가 가장 아꼬워하는 곳입니다.
아꼽다는 제주어 참 미묘한 말입니다.
자랑하고 싶지만 남이 관심갖는 것은 싫은 복잡한 감정 등등
방사탑사이를 오가면서 찍은 단산사진 몰아서 올립니다.
수도없던 시절 인성리 생명수
지금은 농업용수
대정향교입니다.
이 향교는 1408년에 대정현성안에 세워졌다가
여러곳으로 옮겨지다가 1653년에 이자리에 지어 졌습니다.
지금은 행정구역도 대정읍이 아니고 안덕면 사계리이지요
몸을 낮추어야 지날 수 있는 쪽문
대성전
추사 김정희의 글씨 의문당
명륜당에서 보는 대성전
대성전앞 삼문
향교에서 쓰던 샘이물
지금은 못 먹는답니다.
샘이물 앞에서 보는 단산..
산방산
단산을 올라가면서 대정고을 답사를 마칩니다.
Beethoven
2. Adagio ma non troppo
3. Scherzo (Allegro)
4. La Malinconia (Adagio - Allegretto quasi allegro - Adagio - Allegretto - Poco adagio - Prestissimo)
Vermeer Quartett
'제주이야기 > 제주의 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양도 2 (0) | 2010.08.23 |
---|---|
비양도 1 (0) | 2010.08.20 |
제주의 마을(개척마을과 없어진 마을 중 몇 곳. 3) (0) | 2010.07.19 |
제주의 마을(개척마을과 없어진 마을 중 몇 곳. 2) (0) | 2010.07.19 |
제주의 마을(개척마을과 없어진 마을 중 몇 곳. 1) (0) | 2010.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