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에.....
제주의 촌락이라는 주제로 답사를 다녀 왔습니다.
개척마을과
개척되었으나 없어진 마을
잃어버린 마을과
다시 찾았으나 다시 없어진 마을
이러한 마을 중
몇몇곳을 다녀 왔습니다.
인생이나 사물의 융성함과 쇠락함이 서로 바뀌는 것이야
항다반사로 있는 일이고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조우로 지금도 어디선가는 계속 진행되어 가고 있겠지만...
막상 현장에서 쇠락해버린 마을을 살펴보고 있노 라면
조금 애잔함이 느껴지지요.
게다가 답사당일날은 안개가 자욱한 속에
비까지 주룩주룩 내려주데요....
고성2리입니다.
마을지에 의하면 100여가구 36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는데
원래는 항파두성인근에 있는 고성리본동에서 산새미오름인근에 있는 마을 공동목장까지 가는 어귀에 있던 중산간 지역에
1967년에 시범양잠단지로 건설된 마을입니다.
시범이라는 단어에서 느끼셨겠지만
제주도에서는 최초로 조성된 양잠마을입니다.
윗사진 비 뒷면에 쓰여진 것 처럼
1967년 12월에 20세대가 입주하였고
그 다음해 20세대가 입주하여 120ha면적으로 조성된 단지내에서
세대당 25만 5천원씩 융자받은 돈으로 3ha씩을 불하 받아서 뽕과 일반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양잠업은 조선시대이전부터 국가에서 굉장히 중요시 한 산업입니다.
일례로 얼마전 동이라는 드라마에서 왕비의 친잠례 장면이 방영되었다고 하는데
친잠례날에는 임금이하 백관이 나와서 선잠을 제사하고 왕비는 손수 친잠례를 베풉니다.
이날은 팔도의 죄인을 특사할 만큼 아주 대단했습니다.
정부 수립후에도 1962년부터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을 수립, 집행해 왔고 매년 대통령주재하에 양잠진흥행사를 실시했습니다.
양잠업을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으로 책정하던 1968년 부터 한 10년간 육지부에서 양잠을 하던 농가들은 큰 호황을 누리며
주민소득은 물론 외화 획득에 크게 기여하여 1970년대 초반에 전국 양잠농가가 57만호에 달했고
관련제품 수출액만 해도 5억달러를 넘었습니다.
(1981. 농촌경제 14권 3호)
그런데...........
제주도 양잠단지들은 타임이 맞지 않았지요.
양잠이란 누에를 키워 고치를 생산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보통 누에는 알→애벌레→번데기→나방의 단계를 거쳐 완전 탈바꿈하는 곤충으로서, 알로서 겨울을 납니다.
그리고 봄이 되어 뽕잎이 피는 시기가 되면, 누에알에서 애벌레가 부화해 뽕잎을 먹이로 하여 성장해 고치를 짓는 것이지요.
그럼 그 고치를 내다파는 것입니다.(당시 농협에서 수매했다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에와 뽕이지요.
누에알이야 농협에서 공급하면 된다지만 그 먹이가 되는 뽕잎은 뽕이 자라야 구해지는 것이지요.
뽕나무는 심은지 3년이 되어야 육잠이 가능해 집니다.
뽕나무도 그냥 심는 것이 아니고 황무지의 잡초를 다 걷어내야 심을 수 있지요.
그래서 한 4~5년은 아무 소득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융자해준 돈 25만 5천원을 10년 거치 20년 상환으로 연 8%의 이율로 96년까지 분할 상환했다지만 이자는 바로 그 다음달 부터 물었어야 했습니다.
글로야 쉽게 쓰지만 그 때 그 고생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뽕나무가 자라서 잠업이 가능해 질만 하니 양잠업이 불황에 빠져 그 수익성이 크게 악화됩니다.
막차를 탄거지요...
그러니 먹고 살려고 뽕나무를 다시 뽑아 버리고 다른 작물을 심었는데
뽕이 토양을 산성으로 만들었는지 수확이 인근의 재배지의 70%수확도 내지 못합니다.
결국 꿈을 찾아 이주해 왔던 많은 사람들은 또 다시 절망속에서 불하받은 땅을 팔고 다시 떠납니다.
(46년생 강인종씨 : 다 떠나고 4가구가 남았는데 생활이 다 어렵다고 합니다.
본인도 생활고로 3ha중 2ha는 팔고 이제 3000평정도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 합니다)
그렇게 마을이 쇠퇴해져 가다가
제주시가 서쪽으로 확장되어 가고 서부산업도로등을 이용하는 교통이 편해지자
전원주택과 종교재단의 요양원과 훈련원이 들어오고 하면서 마을주민이 늘어서
1998년에 고성리에서 분리되어 고성2리라는 행정마을로 신설되었답니다.
2008년 말에 고성2리 새마을회는 저지그린빌영농조합법인과 함께 제주시로 부터 새로운 농가소득원을 창출하기 위해
무, 쑥 가공 사업대상자로 선정되어 지방비 1억4000만원, 자기부담 3800만원 등 모두 1억7800만원 중 어느 정도를 지원받아
무청, 우거지, 참쑥을 가공․생산해 호텔 납품 및 대도시를 출하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후일담은 듣지를 못했습니다.
건물만 세운 것은 아니겠지요.......
양잠에 관한 것은
어느집 담벼락에 기대어 자라는 뽕나무 한그루,
누에를 관리하던 관리사 몇채,
1970년대 후반경 지어졌다는 누에공판장 건물이 마을부녀회에서 사용되고 있고
당시 양잠단지분교(광령국민학교 상전분교)자리에는 제주외국어고등학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유수암리 개척단지입니다.
이상하게도 이마을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습니다.
유수암리가 본동인 유수암마을, 거믄덕마을 그리고 개척단지 이렇게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된 곳인데
유수암리에 오래사셨다는 원로들에게 여쭤보아도
유수암마을과 거믄덕이마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시고...
개척단지는 처음부터 외지사람들이 들어와 살다가 나갔고
지금도 계속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 당시나 지금이나 자기들 끼리만 어울린다는 말씀정도...
이렇게 저렇게 찾아보다가 1960년도 중반에 당시 정부에서 대학의 축산계 츌신과 농업계고교의 축산과 출신 중
제주도 중산간지대에 협업농장을 운영하겠다고 하면 개척단지를 조성해주고 세금을 감면하여 주었다.
단지 중앙에 공동시설을 두고 방사형으로 농장을 형성하였다는 글을 얼마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조성된 마을이 아닐까 합니다.
단결. 미래개척의 기수. 척우청년회라고 되어 있는 이 비석은
그 당시 세운것이 아니고 어느정도 자리가 잡힌후에 누군가가 후원하여 "축 발전"을 핵심 키워드로 세운 것 같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알길없이 당시 들어오신분들은 마을을 떠났고
지금은 광장 한켠에 빈건물하나와 버스를 기다리던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이 공터에서 1995년에 장승을 몇개 세워놓고 장승축제를 했다하는데 그 흔적이 입구에 있습니다만
몇가지 체육시설들이 최근에 단지내 입주하여 거주하는 분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원동마을이 있던 곳입니다.
4.3표지판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 ...
"원동은 조선시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길을 가던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4.3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주민 40여명과 행인 20여명을 학살하였고 그 이후 원동은 주민이 살지 않는 폐동이 되었다.
현재 마을입구에는 이 마을 출신 재일교포가 세운 원지라는 표석이 있고
하천 건너편에는 당시 주민들이 살았던 집터 들이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곳에 있던 마을이 원동이었는지는 모르나
말그대로 숙식과 편의를 제공해주는 원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지라는 표석도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고
해가 바뀔수록 마을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운 재일교포가 1990년도에 여기가 원동자리다하고 개인적으로 세운 것이고
무엇보다도 1721년도에 그려져 3읍, 9진을 포함 목마장, 촌락, 포구, 도로, 원(院) 등이 상세히 다뤄져있는 영주산대총도에
이 지점은 도로도 원도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넘어가지요.
하여간 하천으로 내려가면 계곡이 나옵니다.
지금은 비가 오고 있어 바위구덩이에 물이 고여 있습니다만 평소에는 물을 어디서 길어 먹었을까요?
계곡을 넘어 빽빽한 대숲을 가로지르다 뒤돌아 보면 PSP판을 세운 대문이 보입니다.
대문에 연결된 담은 조선시대에 쌓여져 있던 잣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계속 뚫고 가면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서너배는 더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아마도 여기가 통상 이야기되는 관사터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은 관사라는 말은 일제시대 부터 쓰인 용어입니다.
이것도 넘어가지요...
원마을 옛터에 모텔이 하나 있네요. 무인모텔이라는데...
필요한분은 쑥스럽지 않아 좋겠습니다.
원지라니까 숙박을 담당할 원이 하나는 있어야 되겠지요.
너와 나의 마음을 잇는 마음속의 다리를 포함해서 아홉개의 다리가 있다는 넓은 페어웨이가 마음에 드는
나인브릿지
그 앞 화전마을 옛터로 갑니다.
배운의 옛터 표시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옛터에는 토종닭집이 자리잡고 있고요.
19년동안 15명이 졸업했다 하는군요.
어느분 말씀이 여기가 화전마을 중 고도가 제일 높은 곳이었다는데
능화오름도 화전마을이었다는 것을 깜빡하신 것 같아요.
이시돌 목장입니다.
착하고 부지런하여 천주교에서 성인으로 명명 받았던 스페인 농부의 이름 '이시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 이시돌
구한말 제주도에 전래된 천주교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으나,
이재수 난의 영향과 일제 말기의 기독교에 대한 심한 탄압으로 1940년대까지 침체를 면치 못했지요.
그러다 1960년대 이후는 의료, 교육, 축산업 발달에 기여하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신자 수와 교회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제주지역 천주교의 왕성한 교세확장의 뒤에는 이시돌목장의 큰 역할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네요.
한라산 중산간 지대에 16만 5000평방미터의 크기로 자리잡고 있는 이시돌목장은 아일랜드 태생의 맥그린치 신부의 노력이 있읍니다.
1954년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한림 교회의 주임신부로 부임한 맥그린치 신부는
전쟁 이후 어려운 농촌의 현실을 보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미 농무성을 비롯한 우방 나라들을 돌면서 기금을 모집하였고
이후 그는 제주에 다시 돌아와 57년에 4H클럽을 조직하고 가축 은행을 창설했으며,
주민들에게 돼지, 닭, 토끼, 칠면조 등을 기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면양을 키우면서 농촌 부녀자들에게는 수직물 강습회를 열어서 양털로 가정에서 스웨터나 장갑 등을 짜게 하여,
직매장을 열어서 팔기도 하여
서울에서는 이시돌에서 만든 양털스웨터가
신앙촌에서 만든 간장과 함께 종교시설에서 만든 믿을수 있고 품질좋고 저렴한 제품으로 소문나기도 했습니다.
1961년과 금악과 선흘에 목장을 개설하면서 1962년에 이시돌농촌 산업개발협회를 창립하지요.
지금도 이 산업개발협회장을 맥그린치신부가 현재 82(또는 83)세의 나이로 맡고 있으면서 이시돌목장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 생략하고 1978년에 돼지값이 폭락하여 양돈사업은 큰 탸격을 입습니다.
쉽게 말하면 길러서 팔려고 나가면 그동안 들인 사료값이 안나오는 거지요.
그래서 양돈사업부에서 일하던 육지부에서 온 분들(이시돌에 근로봉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오신 분들)한테 그냥 인계하였던 거지요.
그러면서 선흘리 사업은 그냥 접어버리고 이곳 금악지경에서만 오로지 소 위주의 축산을 하게 된겁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마음이 않좋은 것은
1969년 제주도와 손을 잡고 개척 단지 조성 사업에 기술과 자금을 지원하여
축산 단지 40세대와 양잠 단지 90세대의 정착을 돕겠다고
1970년 10월 한림읍 금악리에 도에서 지원된 자본으로 이시돌 농업기술 연수원을 설립하기도 하였지만
막상 축산단지와 양잠단지에 대한 지원 실적은 없어요.
아니다. 축산농가 지원실적은 있지요.
1973년 6월에 호주에서 종축으로 황소 30마리, 젖소 1064마리, 돼지 100마리를 수입하여 일부를 제주도가 추천한 목축 농가에 분양하였고,
1986년 농공병진 사업으로 치즈공장을 세웠고,
88년에 이르러 공장을 확장하여 치즈와 우유를 가공하였는데, 1991년부터 제주 낙농조합에 이관한 바는 있네요.
지금은 목장이라기 보다는 성소와 신앙지원시설 등을 계속 확장하고 있어요.
남아있는 당시의 개척농가주택입니다.
대나무로 울거미(널을 고정시키기 위한 프레임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를 짜고
짚으로 된 가마니를 사이에 걸치고 시멘트를 발라서 만든 개척농민들을 위한 주택이지요.
한 건물에 두세대가 입주해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찾으려 들면 제주도 한라산 중산간 지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뿐이 없다고 표지를 세워 놨어요.
잘 되지 않은 다른 곳과는 인연의 고리를 끊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러라고 해야지요.
게다가 이 설명문의 표기와 내용... 좀 아닌것 같네요.
바그다드가 나오고 그 인근 테쉬폰이라는 지역에 이런 건물이 있어서 이런 양식의 건물을 테쉬폰이라고 한다고 쓰여 있는데
차라리 아랍어로 쓰던가 영어로 쓰려면 Ctesiphon이라고 써야 하고 발음도 크테시폰이라 해야 합니다.
Ctesiphon은 이라크 중동부의 티그리스 강 왼쪽(북동쪽)에 있던 고대 도시입니다.
지금의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32㎞ 떨어져 있고 파르티아 왕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겨울 수도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이곳에 이런식으로 지붕이 만들어진 궁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건축물은 크테시폰 궁전의 상부 반원형 복합아취처럼 베럴볼트기법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해야 될것 같습니다.
지붕구조의발달은 고대로마에서 돔을 넘어 반원형 아치나 베럴볼트기법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로마네스크양식의 시대에서는 베럴볼트(barrel vault)가 더욱 발전하여 교차볼트로 더욱 naive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즉 휘어지는 압력을 두개의 볼트상에 네개의 지점으로 분산하였고 이것이 더욱 발전된 것이 리브볼트방식입니다.
이중 베럴볼트기법으로 지어져 가장 유명한 것이 그 지붕이 반원통형이면서도 복합아취형인 페르시아에 있는 크테시폰 궁전이라 합니다.
크테시폰 궁전
그리고 천주교에서도 사도들의 제자이자 주교이자 순교자이신 성 크테시폰(Ctesiphon)이라는 분이 계신데
이 목장이 이름을 딴 이시돌 성인과 같이 5월 15일이 축일일텐데요....??
나라는 다르지만 성인의 이름과 같은 도시명인데 이렇게 틀리게 쓴것을 보니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드네요.
동광으로 갑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N. Paganini
'제주이야기 > 제주의 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의 마을(개척마을과 없어진 마을 중 몇 곳. 3) (0) | 2010.07.19 |
---|---|
제주의 마을(개척마을과 없어진 마을 중 몇 곳. 2) (0) | 2010.07.19 |
화북마을 (0) | 2010.04.28 |
제주의 마을 - 영평하동 (0) | 2010.04.22 |
낙천리 (0) | 2010.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