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원종 11년 경오(1270년) 11월에 삼별초군이 탐라를 정벌하려 할때 東濟院에서 관군과 一戰을 하였다.
역사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여기나온 동제원이라는 곳이 어딘가 하고 퀴즈를 내려는 겁니다.
상품도 없고 하니 그냥 정답을 발표합니다.
제주시 화북동 오현고등학교와 화북초등학교 사이를 東濟院이라고 합니다.
이 곳은 고려 영암부사 김수와 장군 고여림의 관군이 진을 쳤던 곳으로 몇년전까지만 해도 지표에는 기와·도자기편들이 산포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왜 진을 치고 있었느냐?
삼별초가 제주에 입도할 것에 대한 대비를 한다고 탐라에 들어와서 생업에 바쁜 민초들 동원하여 환해장성을 쌓는다 뭐 한다해서
사람만 녹초로 만들고
명월포로 상륙해 급습한 삼별초 선발대에 의해 유수암리 방어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자
여기 동제원이라는 곳에서 결전을 하겠다고 진을 쳤답니다.
삼별초 선발대가 명월포에 상륙한게 당년 10월경이라 했고 고여림이 전사한게 11월 초라 했으니
교전이 시작한지 한달도 않되어 전멸한 거지요.
이렇게 이곳 화북지역은 전쟁과 함께 역사책에 등장합니다.
화북마을을 걷습니다.
마을 안내판 앞에서..
삼사석지로 갑니다.
설문대 할망이 제주도를 만드신후 무대에서 퇴장하신다음
고,량,부 삼신인이 모흥혈(삼성혈)에서 등장하십니다.
온평바다 연혼포에서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하여 혼인지에서 목욕제계후 혼례를 올리고
그 옆 신방굴에서 첫날밤을 보내셨답니다.
결혼도 했으니 이제 따로 살아야 할테니
살쏜장오리에 올라 자기가 살 곳을 골라 화살을 쏩니다.
그 화살이 떨어진 곳이 지금의 일도, 이도, 삼도동입니다.
화살이 박혀서 깨어진 바위를 모아 놓은 곳이 이곳 삼사석지입니다.
안내판 내용에 의하면...
삼사석(三射石)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호
소재지 : 제주시 화북1동
耽羅의 高, 良, 夫 三神人이
碧浪國 3공주를 배필로 정한 후
터전을 定都하기 위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꽃혔던 돌맹이를 삼사석이라 한다.
삼신인의 활솜씨를 경탄하여 金政 목사가
1735년(英祖 11)에 삼사석 비 높이 113cm,
너비 43cm, 두께 18cm를 세웠고, 비 앞면 좌우에는
"毛興穴古 失射石遺 神人異迹 交映千秋"라하여 추모 했다.
후에 제주인 梁宗昌이 1813년에
석실 높이 149cm, 앞너비 101cm, 옆너비 67cm을 지어
삼사석을 보존하였으며 현재의 삼사석 비는
1930년 고한룡, 고대길, 고영천 등이
개수(改竪) 한 것이다.
삼사석비라고 써져 있는 둘레에 있는 시귀를 그럴듯하게 번역해 볼까요..
예전 모흥혈(毛興穴) 시절
활쏘아 박힌돌 남아있으니
신인의 이적은
세월이 바뀌어도 천추에 남으리..
몇장 꾹
별도연대로 내려 갑니다.
별도라는 지역에 있는 연대..
연대는 조선조 세종 때부터 만들어 진거지요.
연대는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 설치되어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곳입니다.
남천록(1679)과 남환박물(1702)에서 부터 연대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것을 보아
대략 1670년대에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방어체계가 정비되었다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연대는 그 언젠가 허물어져 기단만 남아 있던 것을
2001년에 다시 쌓은 것입니다.
올라가서 주변을 한번 둘러 봅니다.
환해장성이 둘러쌓여져 있습니다
통상 환해장성을 삼별초에 대비해서 쌓았다 하는데
사실 삼별초이전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소 요소에 쌓여져 있었습니다.
삼별초를 대비하면서 더 두껍게 더 높게 더 길게 쌓았던 것이지요.
이것도 당연히 무너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겁니다.
아래 사진 돌무더기 있는 곳이 원래의 연대터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포구로 내려가는 길에
용천수가 솟아 나오는 옛 물통들을 자주 만납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생명의 젖줄이었지요.
지금은...?
글쎄요.
여기가 엉물입니다.
엉물머릿개라는 포구이름을 만든 곳인데 이제는 엉물머릿개와 둑으로 갈리어 있습니다
여기저기의 물통들
스테레오타입으로 다시 쌓아져 있습니다
여기는 큰 가래가 부근에 있었다 하여 고래물
이건 동부락에 맨동쪽물인데 이름을 모르고...
큰이물에서 보는 엉물머릿개
큰이물과 고래물 기타등등 물통을 재정비할때 도움을 준신분들의 기념비가 해당 물통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몽땅 모아와서
비석도 다시 만들었습니다.
과공은 비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화북포 옛터표식
조선조 효종4년(1653년) 별도를 화북으로 개편하였으나 1843년 화북을 다시 중좌면 별도리로 개편하였고,
1879년부터 1907년까지 기간에는 拱北理,
1908년에는 다시 오늘의 화북이 되었다 고 합니다.
조선시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이 되었던 포구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사실 이 포구는 일제강점기에 산지항이 개발되기 전만해도 전라도 영암과 강진을 잇는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지요.
육지의 물산이 들어옴은 물론이고 유배객들이나 관리들이 보길도나 소안도를 거쳐 오고가던 통로였으므로 육지문화가 가장 먼저 들어왔습니다.
조선후기까지만해도 화북진이 자리잡아 수군수만 해도 꽤 많았던 마을
그래서
이런 노래가 지어졌던 포구.
'삼월이라 삼짇날 복사꽃 활짝 피어
돛단배로 두둥실 바다를 건너오니
곱게 단장하고 별도포(別刀浦)에 노닐다가
해 지는 언덕 위로 팔짱끼고 돌아오네'
白湖 林悌가 그의 글에 의하면 "제주는 여자가 많고 사내가 적어서 마을의 여자들은 제 짝이 드물었다.
그래서 매년 3월에 변방을 지키기 위해 오는 원병(援兵)이 들어오면 여자들은 곱게 단장하고, 술을 들고 나와 별도포別刀浦에서 기다린다.
배가 포구에 들어오면 술을 권하여 친해져 자기 집으로 맞이한다."라고 하면서 지은 迎郞曲이라는 노래입니다.
왔으니 어느 시기가 지나면 가겠지요.
영랑곳이 있으니 송랑곡도 있겠네요.
'朝天館 안에서 연분홍 눈물 적시는데
사공은 어서가자 돛을 바삐 올리네
각시의 안타까운 심사 東風이 아랑곳하랴
배를 얼른 날려 보내 벽공碧空으로 떠나누나'
그런데 이 곳은 항만이 불안정하여
풍랑이 일때는 항내에서 파손되는 일이 많았다 합니다.
그래서 조선조 영종 당시 목사 김정이
몸소 돌을 지어나르는 등 앞장서서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했답니다.
그러다 과로로 이 포구에서 돌아 가셨다네요.
그래서 세운 송덕비랍니다.
한 곳 비석의 글씨는 지워졌고 한 곳 비석은 없어졌습니다.
목사 김정이 올린 고유문입니다.
해신사가 보입니다.
원래는 화북포구 전체가 아니라 금돈지포구의 수호신역할을 하던 해신당입니다.
화북마을해안에 포구가 둘이 있습니다.
마을 서쪽에 위치한 것은 금돈지포구이고, 동쪽에 위치한 것은 엉물머리포구입니다.
이 두 포구에는 당이 각각 하나씩 정좌해 있었다 합니다.
금돈지에 있는 것은 海神堂, 엉물머리에 있는 것은 엉물머리당이라 했다고 합니다.
탐라지초본에 의하면 해신당은 순조 20년(1820) 목사 韓象默이 해상교통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화북포구에 사당을 짓고
매년 정월 보름에 海神祭를 지내도록 한 곳이라 합니다. 목민관들이 육지에서 오고갈 때 이 당에 와서 참배했었다고 합니다.
관의 도움으로 이 당은 자리는 옮겼지만 해신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동쪽 포구에 있으면서 어부와 잠녀를 위한 개로육사또를 모시던 엉물머릿당은 없어지고
몇년전까지 길가에 시멘트로 자그마한 제단형태나마 남아 있었는데
오늘은 찾아도 찾아도 없습니다.
화북진터로 갑니다.
설명서를 크게 찍었으니 소리높여 읽어 보시지요.
남쪽에는 없어지고 북쪽에는 남아 있는 옛 화북진성
김씨와가
설명을 한번 보시지요..
지정번호 제주민속자료 제4-1호
지정연도 1978년 11월 14일
소재지 제주 제주시 화북동 1933-9
크기 2동
분류 가옥
1978년 11월 14일 제주도민속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제주지방은 바람이 세기 때문에 기와가 특히 크고, 집의 구성은 '一' 자집인 안거리·밖거리·목거리 등 여러 채로 이루어지며
이문간과 먼문간을 두는 경우가 많다.
이 가옥은 부정형 대지의 중심에 마당을 두고, 마당 동쪽에 서향하여 안거리가 자리잡고 있으며, 안거리 맞은편에 밖거리가 있다.
마당 북쪽에는 안거리·밖거리와 'ㄷ' 자형이 되게 목거리가 배치되어 있으며, 목거리 북쪽에는 먼문간이 있다.
먼문간을 지나면 이문거리 앞의 바깥마당이 있고, 여기에서 주공간인 마당으로 진입하려면 이문거리의 이문간을 통한다.
마당에는 집앞을 돌아가며 사각형의 네모 공간을 이루도록 잇돌이 놓여 있다.
마당 남쪽에는 눌이 놓여 있던 눌굽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안거리 뒤의 안뒤 공간은 안거리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장독대와 정원수가 있다.
안거리는 가운데 상방을 두고 오른쪽으로 앞에 큰 구들과 굴묵, 뒤에 고팡이 있으며, 왼쪽으로 앞뒤에 챗방과 작은 구들, 그 옆에 정지가 배치되어 있다.
지붕은 와가이며 우진각 모양으로 2고주 7량집이다.
밖거리는 가운데 상방을 두고 오른쪽으로 작은 구들과 마루방, 그 왼쪽에 마루방과 작은 구들을 배치하였다.
상방 오른쪽 공간은 본토의 사랑방과 같은 기능으로 접객과 집주인의 거처로 사용되고,
상방 왼쪽에는 앞의 큰 구들과 뒤에 고팡을 배치한 자녀 세대의 생활공간이다.
목거리는 가운데가 이문간이고 왼쪽에 막과 오른쪽에 구들이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 모양이다.
그렇게 들어서니
공사중!!!
무언가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 될 겁니다.
걸 기대!!
아주 기괴한 현대와 과거가 적당히 뒤섞인 퓨전....
그래도 와가니 만큼 기와는 옛날 것을 쓰겠지요
충분할라나???
몇년전 모습입니다..
아니다. 작년 화북진성 즈려밟고 때인 것 같은데..
실망섞인 기대 기대섞인 실망을 하고
기와 사진뒤 큰 폭낭이 있는 청풍대에 오릅니다.
청풍대 표지비 옆면에 쓰여진 글..
淸風臺者禾北里之小園也
禾菴愼公紀蹟碑立于其上
因築石而臺自成 :
可以登眺吟嘯
淸風穆如故名之云 .
辛巳 菊秋 曉山 李光烈 記
화암신공기적비
위에 비가 더 오래 되어 보이는데..
윗 사진 비에 화북마을 작은 터에 화암신공 기적비가 먼저 있었고 그 것을 따라 축대를 두르니 대가 되었다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아 이 비가 더 먼저입니다.
화암 愼鴻錫님의 행적을 적은 비를 보고
좋은 일에 큰 돈 내신 분에게 감탄하고
두군데 와가를 더 가보려다가
다리도 아프고 비석에 쓰인 글을 읽다 눈도 아프고 해서 오늘은 이만 돌아가렵니다.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문효치 작시, 이안삼 작곡 / 테너 이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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