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북쪽에서는 차령산맥의 높은 산줄기가
성 가까이에서는 금강이 남쪽으로는 높은 산이 중첩되어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협소하기는 하지만 왕성의 소재지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는 곳입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당시의 이름은 웅진성이었고 본래는 토성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합니다. 성곽의 길이는 총 2660미터라 하고 남북으로는 400미터 성벽의 높이는 약 2.5미터랍니다.
공산성으로 들어갑니다.
공경을 받던지 천대를 받던지
있던 곳에 있는 것이 제일 적합한 지방수령들의 공덕비들이 여기 거의 모여 있습니다. 주변개발과 도로확장 등으로 설 곳을 잃은 거지요.
지금은 산성의 문지기로 전락해 있습니다.
한껏 고개를 들고 그 앞을 지나갑니다. 공산성의 정문의 역할을 인계받은 금서루 입니다.
성내에 도로가 개설될 때 또는 그 이전에 파괴되어 흔적도 없었으나 문헌의 기록과 다른 문의 유구 등을 검토하여 지형에 적합하게 1993년에 다시 세운 문입니다.
문안에 들어오니 장승으로 만든 병졸이나마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인사를 하는 건지 원...
내가 자리를 바꿔 봅니다.
금서루를 안에서 밖으로 한번 바라보고 산책로로 들어섭니다.
서어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등이 소나무와 함께 하늘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개지부분의 토사가 계속 비와 바람에 없어지는지 나무의 판근이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멋있어는 보이지만 나무로서는 굉장히 불안한 상태입니다.
들어난 판근이 안스러워 보여 성곽 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성곽 밖으로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인 황새바위의 순교탑이 보이는 군요.
천주교 교회사가 달레는 "공주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다 알 수 없었다." 고 말했다 합니다만 공주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냉담중이지만 저도 신자거든요...)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는 여아였다 하고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다고 하면서
이것을 신앙의 승리라고 강조하는데..... 저는 이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나이에 무엇을 알아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택했겠는가? 어른신자들이 자기가 선택한 신앙을 위해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누구도 따라하기 힘든 숭고한 행위라 할 수 있지만 아직 사고가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은 일단 살리는 방법을 강구했어야지 내가 죽으니 너도 같이 죽어 천당 가자고 하면 않되는 겁니다.
공주의 구도심에 연해 있는 성곽길로 갑니다.
쌍수정입니다.
인조반정 성공후 임금 자리의 달콤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인조는 부랴부랴, 헐레벌떡 도망치듯 이곳 공산성으로 피해 들어옵니다. 괄괄한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거든요. 어디 마땅한 전각도 없어서 적당한 나무사이에 군막을 치고
이괄이 성공을 하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생각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하루에 다섯끼씩 먹어대던 식성이지만 도망쳐 온 왕에게 먹을 것이 충분할 리 없으니 배도 고프던 참에 신하한명이 민가에서 구해왔는지 뺏어왔는지 떡을 바칩니다. 고프던 배라서 그런지 진짜 맛있는지 아주 절미로 느껴집니다. "이 떡 절미로다 어디서 가져왔는고?" 물어봐야 그 신하가 알리가 있나요. 우물우물 대답하기를 "성아래 백성이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인조가 절미라고 한 떡 인조의 절미,인절미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안내판에는 "성아래 임씨가 가져온 떡입니다"라고 대답했다하여 임씨가 만든 절미라 불렀는데 그게 인절미로 변했다라고 적혀 있네요. 난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옆에 있는 나무 두 그루에 벼슬을 주고 가며 이성을 쌍수성이라고 하라고 명했다는데 그 천하의 절미를 갖다 바친 임씨에게는 쥐뿔 고맙다는 소리조차 안하고 갔나 봅니다. 나쁜~
인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 곳 공산성으로 도망쳐온 그 이전 다른 한명의 왕은 새드앤딩으로 끝났습니다.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 계백이 황산벌싸움에 네 번을 이겼으나 세부족으로 인해 다섯번째 싸움에서 끝내 패해서 나ㆍ당 연합군에게 부여성이 포위되자 태자와 함께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소정방에게 붙잡혀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병사합니다. 의자왕. 낙화암과 삼천궁녀 그리고 황음탐락으로 대표되는 의자왕.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을 누가 했을까요? 의자왕으로 대표되는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 사람들이 쓴 기록입니다. 백제가 멸망되기전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는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었다. 또한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기록에서 보듯이 642년 지금의 경남합천지방인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643년, 644년, 645년, 647년 모두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싸워 모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그것도 판판히 지다가 남의 힘을 빌어서 백제를 거꾸러뜨린 신라에서 백제왕에 대해 좋게 쓸까요? 예를 들어 백제의 임금 의자는 해동군자라 불리울 만큼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그를 죽이고 백제를 차지했다고 쓴다면 말이 될까요? 삼천궁녀나 거느리고 있던 황음무도한 의자왕을 죽이고 그 밑에서 고생하던 백제인을 해방시켰다라고 해야 말이 되지요. 당시 사비성의 인구는 총 5만 명 정도였고 조선시대에도 최대로 궁녀수가 많았을 때 600명이었다는 점을 보면 삼천궁녀는 말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억울하면 출세를 해야 하고 후세에 영웅이 되려면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고 위너는 모든 것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것이 없다면 그냥 이렇게 답사나 다니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시면 됩니다. 쌍수정 사적비가 있는 비각입니다.
이괄의 반란을 인조의 입장에서 괘씸하다고 쓰고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을 쓰고 공산성에서의 6일간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답니다. 내용은 선조때 쓰고 글씨는 숙종 때 썼다네요. 추정왕궁터
그러니까 왕궁을 이루는 전각들이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곳이랍니다. 이유는 건물의 주춧돌 등과 수막새 등이 많이 발견되었답니다. 웅진으로 천도한 초기에 왕궁 등을 지을 때 같이 만든 연못터랍니다. 85년에서 86년까지 발굴조사한 결과로 재현하였다고 합니다.
고궁식으로 만든 새들의 아파트. 그런데 페인트를 칠하면 비둘기외에는 들어와 사는 놈이 없어요. 그 비둘기들도 요새는 닭둘기가 되어 다 쫏아냈나 보네요.
진남루로 가려하는데 우째 방향표시판에는 안보이노?
진남루입니다.
예전 주통로이지요. 이문을 나가서 쭉 내려가면 예전 공주의 번화가가 나옵니다.
오고가는 사람이 던져서 모아진 돌을 누군가가 정리하시면서 부처님이라고도 써놓고 소원성취함도 하나 만들었네요.
진남문 밖에서 올려다본 성벽
진남문 안으로 들어오니 굴다리가 보입니다.. 저 굴다리를 통과하면 만하루로, 영은사로, 공북루로 갈 수 있습니다. 배를 탈 사람은 공북루 지나 고마나루로 가야되겠네요. 자 배시간 늦으신분 서두르세요.
굴다리위 안내판과 돌다리건너 임류각 가는 길
그 길 좌우 전각터, 강당지, 장대지 등으로 추정되는 곳
쓰레기통도 오래되면 고풍스러워 지네요
숲속에 임류각
임류각은 동성왕때 왕궁의 동쪽에 왕과 신하가 어울리는 연회장소로 지어진 건물이랍니다.
물론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1993년에 기록 등을 참고하여 다시 지었는데 건물의 단청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 및 현실 벽돌의 무늬를 활용하였답니다.
무심한 건지 아니면 오묘한 뜻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죽은 동성왕이 이 건물을 보면 열이 뻗쳐 또 한 번 죽어버릴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기록상에는 동성왕은 위사좌평 직에 있다 좌천된 백가의 무리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만 그 뒤에는 무령왕이 있었다는 것이 대다수의 중론입니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배다른 형으로 백가의 무리와 손잡고 그 들에 의해 왕이 됩니다. 왕이 된후 아무래도 걸리적거리는 백가를 토사구팽하고 전권을 손에 쥐지요. 사실 백제가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다음에 반대파에 의해 왕이 제거되는 것은 다반사 아니 무령왕을 제외하고는 전부 였습니다. 웅진으로 도읍을 정한 문주왕도 재위 3년 만에 당시 국방장관격인 병관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고, 그 아들 삼근왕도 2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리고 동성왕은 수상격인 위사좌평이었던 백가의 자객에게 죽고.... 그래서인지 무령왕의 둘째아들인 성왕은 아예 도읍을 옮깁니다. 명국삼장비입니다.
전쟁중엔 그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의 장이 그 지역의 모든 행정 및 사법을 관장합니다. 한반도에서 각종 전쟁시 원군의 명목으로 온 중국군대는 지역을 다스림에 있어 그 패악이 말할 수 없었답니다 그런 추세속에서 점령국 장군이 패악을 부리지 않고 선정을 해줘서 고맙다고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비가 모셔져 있는 비각입니다.
정유재란때 충주에 주둔한 명나라의 세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사은 송덕비인데 선조때 세운 게 없어졌다고 숙종 때 다시세우고 그 뒤 일제강점기에 마을사람들이 이놈 저놈 점령국 놈들은 다 똑같이 밉다고 글자를 지우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은 걸 해방이 되자마자 일본인이 묻었다면서 다시 캐서 여기에 가져다 세운 겁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송시열이래로 뼛속까지 박혀서 없어지지를 않는군요. 사대부묘비에는 유명조선이 당연히 쓰였고 명이 망했어도 숭정후라는 연호가 통용되었으며 대명천지라는 말이 일상생활에 까지 쓰이는 나라에서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련 해야죠. 광복루로 가기전 동문부터 들릅니다.
공산성 4개의 성문중 동쪽에 있는 분입니다. 좌우에 원래의 문을 지탱하던 주춧돌이 남아 있어 그 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현판에는 영동루라고 쓰여 있군요.
영동루에서 보는 주변 산악 들 적이 접근하긴 진짜 힘들겠네요.
성곽의 흔적 따라 광복루로 가며 순찰하는 장군처럼 사방을 살핍니다.
광복루
조선시대때 이 성안에 주둔하는 군인들을 지휘하던 중군영의 문루였답니다. 공북루옆에 있었느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옮겨서 웅심각 또는 해상루라 하였답니다. 광복 후 이시영선생과 김구선생이 이곳에 오셨을 때 그 이야길 들으시고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을 기려 광복루로 하자셔서 이름이 광복루가 되었답니다. 만하루쪽으로 가면서 금강과 그 주변을 둘러봅니다.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는 연지와 만하루
기록에 의하면 공산성에는 우물이 세곳있다합니다만 쌍수정 옆에 있는 것과 이곳에 있는 것 총 두 군데가 발굴되어 있습니다. 이 연지도 만회루 건물터를 발견하던 당시 발견되어 기록을 확인 정비한 것이라 합니다.
공산성을 방비하는 기능과 경승을 감상하는 기능 모두로 쓰인 만하루입니다.
조선후기 영조때 만들어 졌는데 홍수로 매몰된 것을 1982년에 건물터를 발견하여 그 후 재건축했다합니다. 영은사입니다.
영규대사의 의병이 훈련한 곳이라 해서 많이 알려진 절이지요. 세조4년에 지어졌다는데 주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 몇구나 출토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이전부터 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 중창되지 않았겠느냐하는 의견이 많습니다. 현재는 강당인 관일루와 원통전이 남아 있습니다. 4대강 개발중단을 기원하는 야외법당
유구무언.. 지은이는 잊었지만 갑자기 떠오르는 시 한구절... 나 이제 소리없는 곳에서 옹알이고 싶은데 큰 강을 건너는 돛배한척 바람소리가 삐거덕거림을 대신하네... 예전 시구문 시체가 나가는 곳
공북루 쪽으로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뒤돌아 보고 또돌아보고.. 공주 잠종보호고랍니다.
잠사 그러니까 누에를 치고 기르는 일은 예전부터 의생활에 큰 역할을 했고 특히 농가 소득증대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보통 누에는 4월경에 부화하지요. 그런데 누에의 먹이인 뽕잎은 5월 달에야 충분히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부화한 누에가 굶어죽는 일이 많았지요. 그 당시 하우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우스가 있더라도 그 속에서 뽕나무를 기를 수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생각해낸게 누에의 부화를 늦추어 보자해서 이런 적당히 높은 곳에 누에씨를 보관하면서 금강의 얼음을 가져와 누에의 부화를 최대한 늦추었다가 뽕잎이 충분할 때 부화시키는 방법을 썼던 건데 나름 효과가 좋았다고 합니다. 성곽옆 고목들 언제적 일들 부터 지켜 보았을까요? 스스로 구멍을 뚫어 입을 만들었으니 무언가 할말이 있는가 봅니다.
당겨본 공산정 (공북루 아니고 공산정)
공북루
공산성의 북문 밑 그러니까 1층은 통로, 위 2층은 사면이 트인 전망대로 만들었다합니다. 이 통로를 통해 나가야만 강을 건너는 배를 탈 수가 있었답니다.
공북루 밖에 있는 옛다리 유적 표지
조선조까지야 사람만 건너다니면 되니까 배로 다녔지만 일제강점기 초기부터는 차가 다녀야 되지요 저기 나무가 삐죽삐죽 나온 것들이 옛다리 흔적이랍니다.
1910년도에는 그곳에 섭다리가 있었고 1920년대에는 공주갑부 김갑순이 자기 돈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그 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돈을 받았답니다. 지금의 민자 고속도로 같은 거지요. 고맙다는 소리는 못 듣고 악다구니만 듣다가 돈도 사람도 소리 소문 없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932년에 금강철교가 세워진 거지요. 다리 뒤편으로 연미산 줄기가 보입니다. 웅진이라고 불리우게된 된 설화의 발원지로서 웅진의 시작과 웅진백제의 끝을 바라본 산증인입니다. 의자왕과 태자 효가 이곳 공산성에서 결전을 준비하다 붙잡힌 후 부여사비성을 지키던 왕자융이 항복을 합니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孝,왕자 泰, 隆, 演 및 대신과 장군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로 압송해 갑니다. 그리고 王文度를 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통제하게 하였고 王文道가 죽자 劉仁軌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의자왕은 압송직후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5년만에 죽습니다. 그러자 사비성을 내어준 왕자 隆에게 司稼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다시 이곳 웅진으로 데리고 옵니다. 당의 장수 유인원의 강압 아래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이 웅진도독의 자격으로 신라 문무왕과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눠 마시며 동맹을 서약했다는 취리산 회맹지가 바로 저 연미산이랍니다. 장승 옆에 감옥을 만들어 놓고 감옥체험을 하랍니다.
장군장승과 졸병장승
장군장승은 어디서나 부부동반이고 졸병장승은 총각인가 홀애비인가? 그게 그리 못마땅해서 소리만 지르고 있네요. 공산정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관광객을 위한 전망대로 만든 것 같습니다.
공산정에서 당겨찍은 정지산 유적지와 연미산 정상
백제큰다리와 연미산
한바퀴 다 돌았습니다. 진서루로 가는 성벽길..
진서루를 나와
바라보는 공산성벽
통일신라 말기의 피 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도 웅천주도독 金憲昌의 반란에 의해 이곳 공산성에서부터 그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던 후삼국시대에도 공산성은 누구든 선점해야할 전략적 요충이었습니다. 고려 武臣정권기에 망이 망소가 이끄는 천민군도 제일 먼저 이곳을 공략했습니다. 이 모든 전투 어느 것이라도 공산성의 혈투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공산성 주차장 옆.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곳에 이괄의 난에 임금을 돕고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동리 이름을 助王洞이라 부르게 한 관류당 노숙.
1920년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였던 정의부에서 활동하여 남한의 현충원에도 위패가 모셔져 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도 모셔져 있는 오동진선생.(왼쪽)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접수가 거절당하자 公州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절명사를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講學樓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한 오강표선생의 비가 아무런 안내판도 없이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공산성 절개지 암석과 판근이 드러난 나무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공산성 답사를 마칩니다.
'如是我見 寫而不作 > 우리강 우리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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