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실현. 공주 귀산리 만경 노씨 삼의사 생가지

하늘타리. 2010. 6. 11. 12:30

 

공주시 북쪽 우성면 귀산리라는 곳에 있습니다

 

귀산리 만경 노씨 삼의사 생가지를 가기 위해서입니다.  

 

 

 

 

   

조선 선조25(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과 의승이 왜군의 조선침략을 막아서는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호서지방에는 옥천에서 거병한 의병장 조헌과 그를 따르는 의병들,

그리고 영규대사와 일천명의 승병들이 있습니다.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거병지역인 옥천인근 차령에서의 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여세를 몰아 청주성으로 출병하지요.

청주성에서는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들이 청주방어사 관군이 무너진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청주성으로 출병중이던 조헌의 의병군은 방어사 이옥의 잔류군사와 합세하게 되고 다시 영규대사의 승군과 결합하여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탈환하였습니다.

이후 영규대사의 승병과 조헌선생의 의병은 금산전투에서 왜군을 협공하였으나

결국 영규대사와 조헌선생을 포함한 의병과 승병 700 모두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비운의 스토리 속에 만경 노씨 삼형제가 있습니다. 

 

 

 

 

 

   

  

 

노응환(15551592) 호는 수암이며 중봉 조헌의 문인입니다.

임진란에 조헌선생과 더불어 창의하여 동생들과 함께 청주전투와 금산전투에서 적과 싸우다 38세로 순절하였습니다.

 

노응탁(15601592) 노응환 동생으로 호는 국재이며 형과 같이 중봉 조헌의 문인입니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장과 학술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더니 임진란을 당하여

응환과 아우 응호와 의병을 모아 청주전투에 참전하고 이어 금산전투에 선봉이 되어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칠백의사와 함께 33세의 나이로 순절하였습니다.

 

노응호(15741592) 노응환 동생으로 호는 체헌이며 삼형제 모두 중봉 조헌의 문인입니다.

임진란에 형과 함께 창의하여 청주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부친의 명으로 군량을 모아 금산에 갔으나

이미 형이 칠백의사와 함께 장렬히 순절한 뒤였습니다.

그는 형의 시신을 안치한 고향에 돌아와 해에 죽었습니다. 

  

노응환 노응탁(15601592) 1831년에 정려와 증직을 받았습니다.

응환, 응탁의 정려각 앞에는 노응환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노응호1892년에 정려와 증직을 받았습니다.

 

삼의사의 정면 우측(동쪽) 세워진 노응호 정려는 원래 후손이 살던 반촌리에 세워졌던 것을

1982 삼의사를 건립 단장하면서 위치로 옮긴 것이랍니다.

정려 앞에는 삼의사건립연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형제가 의병이 되어 왜군과 싸운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삼형제 모두 같은 뜻으로 움직이는 일은 흔치 않지요.

이렇듯 공주 만경노씨 삼의사는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현했다 할수 있습니다.

 

이들 3형제는 금산의 종용사(현재의 금산 칠백의총) 보은의 후율사에도 제향(1832,순조 32)되어 있고

 이들의 순의행적은《중봉집》과《항의신편》,《공주군지》,《보은군지》등에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으며,

금산 칠백 의총 경역내에 있는「일군순의」 비문 중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경노씨문중에서 이를 기려서 노씨 삼의사가 태어나 성장한 생가 터에 정려문과 함께 사당과 사우를 세워서 관리하고 있던 충남기념물로 지정되어 공주 귀산리 만경노씨 삼의사 생가지로 명명되었습니.

 

 

남의 나라 귀족들은 그들 또는 자제들이 모든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특히 이웃국가의 침입 등으로 계속되는 전투에서 국고가 부족해지면 전시국채를 발급하고 평민들은 제외하고 유산계급

사회지도층들에게만  구입하도록 하였습니다.

멀지 않은 사례로 1 세계대전당시 영국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을 다니던 청년들이 모두 전투에 참가했으며

그 중 3분의1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982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 왕실 앤드류 왕자도 조종사로 참전하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상류층은 오히려 '오블리제 없는 노블레스', '의무를 망각한 신분 집단' 가깝다 합니다.

이들에게 오블리제란 경제적 낭비이자 사회적 과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합니다.

 

하지만 우리역사에도 이렇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현한 가문이 있다는 것을 고맙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생때같은 아들 세명을 한꺼번에 잃은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나를 헤아리며

주변 노씨 문중 또다른 기념비 등을 둘러 봅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걷다 보니 멋진 정자목이 나타납니다.

무슨저수지 입구랍니다.

  

 

아이고!! 연미산을 가려면 월미동쪽으로, 그러니까 삼의사사당에서 서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북쪽으로 마냥 왔습니다.

 

그대로 객지라 동서남북 구분을 못합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정자목 시원한 그늘에서 쉬다 가렵니다.

 

 Alfonso X el Sabio
Cantigas De Castilla - La Mancha

Musica Antigua
Eduardo Paniagua, c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