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둠이 내려 앉아 있고.
강 건너 저쪽에서 공산성이 불을 환히 밝히며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 지금 갑니다.
금강다리를 넘어 공산성으로 갑니다.
공산성
475년부터 538년까지 63년간 다섯 명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 곳
그러고 보니 다섯 명의 임금인데 63년뿐이 않되네요.
.
한번 다리 위를 걸어가며 정리해 볼까요.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공격합니다.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하지요.
개로왕의 동생 문주가 신라의 구원병과 함께 위례성으로 가다가 도읍이 함락된 것을 듣고 천연적인 요새지형인 공주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를 이어받아 백제를 유지합니다만.
2년 후 신하(병관지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그 아들 삼근이 13세의 나이로 왕이 됩니다.
병관지평 해구를 징벌하는 등 정사를 되찾는데 성공했지만 그 또한 즉위 2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개로왕의 또 다른 동생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왕위를 이어 받습니다.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고 중국의 남제 및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위협을 감소시켰습니다만
신진세력을 견제하려다 신하(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그 역시 살해당합니다.
동성왕의 배다른 동생 무령왕이 왕위를 이어 받습니다.
백가를 처벌하고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켰고
제방을 쌓아 농민들이 잘 살게 하는 등 정치를 잘해 칭송을 받았다합니다.
성왕은 무령왕의 둘째 아들로 지방통치조직과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양나라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국가의 기반이 잡히자 AD 538년 협소한 웅진에서 광활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며 백제의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이곳 백제의 도읍 공주에서 제명에 죽은 왕은 무령왕 뿐이고 죽은 후 그 왕릉이 온전히 발굴된 곳도 무령왕릉 뿐 입니다.
꼭 짜 맞춘 것 같지요?
공산성입구입니다
을씨년스러이 서있는 공덕비
칭송을 해달라고 세웠지만 제자리에서 천대 받다가 여기 한곳으로 모여진 공덕비들, 그 위로
공산성 서문인 금서루가 보입니다.
사실 공산성안에는 백제시대 당시의 유물보다는 조선시대의 유물이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열흘 동안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쌍수정과
공산성의 북문으로 금강변에 세워져 있는 공북루,
그리고 세조때 창건했다고 하는 영은사 등 대부분 조선시대의 유적입니다.
백제시대의 유물은 문헌의 기록, 유구의 분석결과 그리고 지형 등을 참고하여 이럴 것이라 유추하여 복원한 것 들입니다.
이 금서루도 성안에 도로를 개설할 때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던 것을 1993년 복원한 것이지요.
쌍수정입니다.
인조반정 이 끝난 후 그 논공행사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킵니다.
겁이 난 인조는 이곳 공주까지 한달음에 도망 와서 공산성 나무숲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며칠을 보냅니다.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좌우에 있던 나무에 벼슬을 하사하고 이 성을 쌍수성이라 부르라 하고 한성으로 돌아갑니다.
자기한테 그 맛있는 떡을 갖다 준 임씨집안 사람들에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네요.
영조때 쯤 관찰사가 와서 보니 그 나무가 죽어 없어졌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쌍수정이라 부릅니다.
이괄의 난과 인조가 난을 피한 과정 그리고 이곳에서의 인조의 6일간의 기록이 적혀 있다는 비문이 있는 비각입니다.
이곳 넓은 터가 백제 왕궁이 있었을 곳이랍니다.
그 옆 한곳에 웅진으로 천도당시에 팟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연지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밤에 봐서 그런지 좀... 그러네요.
진남루로 가는 성벽에서 바라보는 공주 구도심(내가 보기에는..)과 성곽입니다.
진남루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바꿔.쌓으면서 건립한 건물이랍니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에 해체 수리하여 다시 쌓은 것이랍니다.
진남루 앞인데...
예전에는 이곳이 주통로 였다합니다.
이 길로 내려가면 아까 보았던 공주 구도심도 만나고..
그렇게 사람이 많이 다니다 보니 서낭당 식으로 던져진 돌이 하나씩 쌓여 기원하는 곳이 되었고
어느 스님이 공을 들여 정비를 좀 한 것 같습니다.
진남루 문을 나갔다 들어오니 영은사 쪽으로 바로 가는 굴다리가 보입니다.
굴다리 위쪽 길은 임류각으로 가는 길이고요.
성벽을 따라 임류각으로 갑니다.
동성왕시절에 왕과 신하를 위한 연회장소로 지어 졌을 건물을 1990년 복원하였습니다.
어두워서 않보이는 데 단청문양은 그때 당시를 재현했다기 보다는 무령왕릉 현실복도와 출토된 장신구에 있는 무늬를 사용했습니다.
참 한심한 건물입니다(제 생각엔...)
정유재란때 왜군이 침입해 오자 명나라에서도 군대를 파견합니다.
각 지역에 주둔한 명나라장수가 그 지역에 병권과 모든 행정을 장악합니다.
이 때 충주에 주둔했던 이공, 임제, 남방위라는 명나라의 세장수가 패악을 부리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줬다고
관에서 세운 송덕비가 있는 명국삼장비라는 비각입니다.
선조때 세웠는데 없어졌나 봅니다.
숙종 때 다시 세우고
그리고 또 없어졌는데 1945년에 발굴되어 다시 세웠답니다.
공산성 동문입니다.
현판에 영동루라 쓰여 있네요.
문터옆 양쪽을 지탱하던 돌이 1980년 발굴되어 그 뒤에 다시 세운 문입니다.
광복루
언제적 건물인지는 모르지만 성내 주둔하는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의 문루랍니다.
일제강점기에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지금 위치로 옮기면서 웅심각 또는 해상루라 이름을 지었다 합니다.
광복 후 김구선생과 이시영선생이 이곳을 찾았을 때 광복을 기리자해서 광복루라 이름을 바꾸었다하네요.
광복루에서 바라본 오른 쪽 공주대교와 왼쪽 금강교입니다.
성곽을 따라가다 내려가며 보는 만하루입니다.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 건물로 조선시대 때의 건물이라는데 홍수에 매몰되어 유실된 것을
1982년에 건물터를 발견 그 후 다시 지었답니다.
만하루옆 연지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공산성에는 우물이 세곳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쌍수정옆과 이곳에서만 우물터를 발굴하였다 합니다.
발굴전 흙으로 덮여 있던 것을 1984년에 정비하였답니다.
영은사입니다
세조4년에 지은 사찰이라는데
이 부근에서 신라시대 불상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도 절이 있었다 합니다.
수도를 통해 불도를 닦는 것 보다 승병을 키우고 관리하는데 더 치중해야 했던 슬픈 역사속 절입니다.
4대강 개발중단을 기원하는 임시 법당입니다.
참 답답한 노릇이 저는 4대강개발에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그런데 여기 금강변에서 만난 분들 중 여러분이 지역개발을 위해 좋은 것 아니냐?고 하시네요.
지역민이 반대하지 않는데 한치 두치 세치 건넌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유구무언 ...
공산정 쪽으로 가는 길에 무슨 저장시설이 있습니다.
충청남도내 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해 건립한 잠종보호고라 합니다.
사용은 안하는가 봅니다만 지금도 철망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어두워서 그런지 무섭네요..
이 밤. 연인과 같이 성내 산책로를 걷는 것은 모르겠지만
성곽따라 혼자 걷는 길은 영 아니올시다 입니다.
공북루입니다.
이 앞쪽 강변이 금강을 건너다니던 섭다리, 배다리가 있던 곳이고 지금도 나무기둥의 일부가 남아 있다합니다.
깜깜한 저쪽에 안내판하나 서있습니다.
공산성일주의 마지막 코스인 공산정을 지납니다.
공산정에서 보는 금서루
뭔가 미련이 남아서...
좌우에 서있는 장승들에게 말 붙였다가...
야 시간이 늦었다 빨리 가서 쉬거라! 한소리 듣습니다.
금서루를 지나 내려오다
다시 뒤돌아 보고......
도열하여 배웅하는 공덕비들을 사열하며 내려옵니다.
마흔 일곱갠가 마흔 여덟갠가?
어휴 기억력하고는 ...
또 다리를 넘어 숙소를 정한 신관동쪽으로 돌아 옵니다.
무령왕릉에서 뛰쳐 나와 넓은 뜰을 지키고 있는 석수에게 오늘일을 보고하고서 하루를 접습니다..
BRAHM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 I.Allegro non troppo (Cadence: Joac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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