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공주 금강변....백제의 옛 도읍을 걷다..

하늘타리. 2010. 6. 9. 15:42

 

공주 금강변을 걸으려 합니다.

여기는 신관동...  백제큰길 쪽으로 가면 전막사거리에 금강교가 있습니다.


금강교입니다.


1910년대 까지는 이 다리 동쪽 지점에 공북루 앞으로 연결된 섭다리가 있었고
(우편소인에 '立太子禮紀念公州'라 되어 있어

히로이토 일본 국왕이 태자에 즉위한 해인 1916년에 공주에서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엽서에 실려 있는 섭다리사진).


1920년대는 공주갑부 김갑순이 돈을 받았다는 배다리가 있었죠.
(30여척의 배위에 널판을 깔아 놓았으며 폭 3m정도에 길이는 무려 150m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33년에 이 자리에 금강교가 만들어 졌습니다.
1950년대 한국 전쟁 때 폭파시켰다가 그 후 다시 복구된 다리입니다.
(북괴가 한강이남으로 남하하자 북괴군 전차의 이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다리를 폭파시킬 때의 사진입니다)

 

다리를 건너려는데 우측에 시비가 보입니다.

읽어보고 가지요.

 

일동장유가의 한 구절이 서 있습니다.

 

이 일동장유가는 공주 무릉동에서 태어난 퇴석 김인겸이 홀로 글공부를 하다가 늦게서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는데,

57세에 뛰어난 실력의 문장가가 아니면 뽑히기 어려운 일본 사신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1763년에 일본 통신사 조엄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문물제도와 풍속 등에 관해 보고, 듣고, 경험한 바를 순 우리말로 기록한 장편 기행가사입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200년을 지나지 아니한 시기에 우리나라 통신사의 종사관 서기로 동행하면서

反日意識에 불타는 눈으로 일본을 보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한 문학비가 금강변에 세워져 있습니다.

 

일동장유가를 지은 지 225년이 되는 1989년 전국의 국문학자들이 발기하고 출연하였다 하며

비의 記文 가운데엔 '오늘 선생의 인품과 유운(遺韻)을 사모하는 후진들이 정성을 모아,

생시의 선생이 옷자락 펄럭이며 건너다니시던 이 오얏나루 언덕에 조그만 한 덩이 돌을 세워 기린다'고 적혀있습니다.

 

참고로 이때의 통신사로 가셨던 문익공 조엄 선생은 對馬島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영도에서 처음 재배를 시작하였고

그 保藏法과 栽培法을 아울러 보급함으로써 고구마가 조선민중의 救荒作物로 널리 이용되게 하였습니다.

 

또 한 곳의 시비.


송파 강선생 창암십영이라고 되어 있네요.


송파 강봉수. 통상 창암 강봉수라고 하지요.
온양의 충효당 별사에 가면 이순신,  윤현과 함께 향사되어 계신 분입니다.
온양출생으로 임진왜란중 진산군수로 재직하며 창의한 의병과 함께 내침한 왜적을 크게 섬멸하였다 하고

생전에 문장과 덕망이 현저하게 뛰어나 서거후 많은 벼슬을 추증 받은 분이랍니다.


시비에 의하면 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창암십영은 이고장과 인연이 있다 합니다.
시첩의 표제는 우암 송시열이 쓰고
시는 윤석호선생이 썻다하는데
그 13대 손이 그 원본을 그대로 각자하여 이곳에 세웠다 합니다.

 

금강교쪽으로 다시 갑니다.

 

 


금강교를 넘습니다.
금강 물줄기 넘어 공산성의 공산정이 보입니다.

 

금강철교에 대한 설명문이 있군요.


공주의 어르신들은 이 다리에 꽤나 많은 애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32년까지는 이곳 공주에 충청남도도청이 있었습니다.

1931년에 총독부에서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하겠다는 방침을 정합니다.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이 공주로 온 것은
신립장군의 탄금대전투에서의 비참한 패전이 그 원인이었지만
충남도청의 대전으로의 이전은 공주양반님들이 결정한 것과 다름없지요.
천안에서 공주로 계획되었던 기찻길을

지네인 기차가 닭인 계룡산 옆을 지나가면 큰일 난다며 결사반대하여 대전으로 바꾸게 되었고
그후 대전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자  총독부에서 대전으로 도청을 옮기겠다고 결정한거니까요.

1931년 3월의 어느 날 충청남도 평의회에서 도청이전을 인준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공주시민들이 3일간 시위와 투석을 하게 됩니다.
이때 시위 군중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경찰 300명을 동원 시위 가담자중 주동자 50여명을 구속하는 사건이 발생되었습니다.
주민들은 이들을 석방하라는 농성을 하였지만 도청이전은 계획대로 추진됩니다.

 

그 후 공주시민의 불만을 해소해 줄 목적으로 금강철교를 놓아주기로 하고

1932년 1월에 착공하여 1933년 완공을 보게 됩니다.
그 사이 1602년 충주에서 옮겨온 충청감영자리에 있던 충남도청은 대전으로 옮겨 갑니다.
(옛 충남도청사진) 


그래서 도청과 바꾼 다리라고 하지요.

 

그로 인해 지역의 발전이 더뎌 졌겠지만 새옹지마라...
지역발전이 더뎌진 반면 역사의 현장이 보존되어 역사와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획득했을 것이고
지금 새로이 조화된 도시를 형성하며 세종시와 고속철건설에 맞추어 웅비의 날개를 펼 수 있게 된 것 아닐까요?

 

웅진탑.


공주의 옛 이름 곰나루, 고마나루를 나타내는 이름이지요.
아득한 옛날 한 나무꾼이 강을 건너 燕尾山으로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때, 큰 암곰 한 마리가 나타나서 나무꾼을 업고 자기가 사는 굴속으로 들어갔고

곰은 좋은 음식을 나무꾼에게 많이 가져다주며 나무꾼을 보살폈습니다.
곰은 사냥을 나갈 때는 꼭 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놓아 나무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몇 해를 이렇게 살게 되자 곰과 나무꾼의 사이에는 자식 두 명이 생겼고 이제 됐다고 안심한 곰은

어느 하루 사냥을 나갈 때 굴 입구를 돌로 막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나무꾼은 굴을 나와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쳤지요. 사냥을 나갔던 곰이 돌아왔을 때

나무꾼은 벌써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답니다.
다급한 곰은 두 자식을 나무꾼에게 보여주며 돌아올 것을 애원했으나 나무꾼은 냉정하게 뒤돌아섰습니다.
이에 상심한 곰은 두 자식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배가 지날 때마다 풍랑이 일고 변고가 생겨 곰사당을 짓고 곰의 영혼을 위로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곰나루, 고마나루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공산성도 원래는 곰나루 지역에 축성된 산성이라 곰산성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소리 나는 대로 公山城이 되었고,
그 후 공주는 공산성이 있다는 이유로 公州가 되었다 합니다.

 

이처럼 공주시는 곰에 얽혀있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단군신화의 예처럼 대한민국에서 곰과 연관되는 대표적인 지역 입니다.

 

사실 우리와 같이 퉁구스족으로 분류되는 러시아의 소수민족 에벤키족과 중국 소수민족 오로키족 모두 곰 숭배신앙이 강하여

스스로를 곰의 후손이라 생각한답니다.


에벤키족은 남자와 암곰이 교혼하여 살다가 남자가 도망가 버리자 암곰은 자식을 두 쪽으로 찢었는데

하나는 곰이 되었고 하나는 에벤키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로촌 사람들은 암곰이 사냥꾼과 잠자리를 같이하여 낳은 아이가 오로촌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웅녀설화가 단군신화에 이르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암곰으로 나오고 결국 여인으로 변화하여

桓雄과의 사이에 檀君을 낳고 이로써 한민족이 시작되는 형태로 발전합니다.
웅녀설화의 주인공 웅녀는 단군신화에 이르러서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다 정치적인 의미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방에서 곰이 아들 둘과 함께 같이 죽는 것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백제라는 나라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이지역 토착세력이 북에서 내려온 온조와 비류세력에 의해서 제거되어 가는 과정을

두아들과 웅녀 모두 죽는 것으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고운 최치원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襟帶江山以畵成  금대의 강과 산은 아름답고
可憐今日靜消兵  지금은 병란도 사라져 고요하네.
陰風忽捲驚濤起  음산한 바람 홀연 불어 거친 물결 일으키니
猶想當時戰鼓聲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 싸움터 북소리.


고운 최치원 선생, 신라말기의 유학자이며 문장가로 여러 명문을 지으신 분이지요.

 

그런데 좀 황당하네요.
다른 뛰어난 분들이 지은 찬란한 백제시대 역사문화와  이곳 금강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노래한 시들이 많고 많은데

왜 하필 백제가 멸망한지 140년이나 지난 신라 헌덕왕 14년 (822년)

웅천주(지금의 공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난을 묘사한 것을 여기다 세워 놨을까요?

 

글을 택해 역한 사람도 최씨 후손이고 글을 쓴 사람도 최씨 후손이라서 그런가요?
최씨 집안 정원에 비석세우는 것으로 착각하여 궂이 고운 선생작품중에서 어느정도의 연이라도 닿는 것을 고르다 보니 그리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석에 본인들 성씨도 밝히지 않고 운손이라고만 했나봅니다.


망설입니다.
공산성으로 갈까 정지산으로 갈까?
손바닥에 침을 뱉어 결정합니다. 정지산 쪽으로...
금강변을 따라 북서쪽으로 걷다가 담배한대 빼어 물고 발길을 쉽니다.


저기 정지산 터널이 보입니다.

백제문화권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공주와 부여를 잇는 백제큰길 공사로 정지산 기슭 절개작업을 하던 중

장고형 그릇받침등 몇 가지 유물을 발견하였답니다.

이를 서울 청계천공사에서 처럼 한곳에다 치워버리지 않고 관계기관에 신고하였고

공주박물관 발굴조사결과 백제의 국가차원의 제의시설로 추정되었고

이에 따라 터널로 설계가 변경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던 거지요.


걷다보니 꽤 먼 길입니다.
게다가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높습니다.


황량합니다.

 

기념물 147호 공주정지산백제유적이라는 표지석과
그 옆에 사적 제474호 공주정지산유적 안내판만 서로를 벗하며 서 있습니다.
안내판 말미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 의하면 왕과 왕비는 27개월간 빈전에 모셔져 있다가 현재의 왕릉에 안장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방위로 볼 때 왕비의 빈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실 정지산 유적과 무령왕릉의 관계는 예사롭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위치 때문아랍니다. 무령왕과 왕비의 매지권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과

이 정지산의 위치는 정확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발굴당시의 대벽건물지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백제1999) 


특히 무령왕릉지석의 내용을 증명해준다고 합니다.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인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大墓)에 올려 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登冠大墓立志如左)"
여기에서 계묘년은 서기 523년이고, 을사년은 525년입니다.

무령왕의 왕비는 526년에 사망하고, 529년에 무령왕릉에 안치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럼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이의 간격 동안 시체가 어디에 있었을까 입니다.

그 측면에서 이 정지산 유적이 주목받는 것이고 그 몇 년의 간격을 메워주는  유적이라고 합니다.


(정지산유적 복원 계획도입니다. 이처럼 기와가 올라가 있는 격이 높은 건물로 복원하겠답니다 : 백제역사문화원)


더 오른쪽 송산리 고분군을 찍으려 했는데 정지산 정상에 가로 막혀서 공산성을 찍습니다.

 

백제거리를 걸으면 백제다리도 건너야 된다 싶어 정지산 터널과 연결된 백제대교를 건너오니

처음 출발지점입니다.


뱅 뱅 뱅


어설픈 답사꾼의 다리도 휴식이 필요하겠지요.  잠깐 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