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공주 무령왕릉 (공주 송산리 고분군)

하늘타리. 2010. 6. 9. 08:50

공주에 왔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무령왕릉을 둘러봐야겠지요.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입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입니다.

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송산리라는 지명은 은진송씨가 집성하여 살았을 때 만들어진 지명입니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封土를 접하고 있습니다.

관람은 모형관에서 합니다. 

 

송산리 고분의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입니다.

돌방무덤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입니다. 

 

 

 

 

 

 

 

 

벽면의 연대표를 찍었는데 잘 않나와서

연대표를 참고로 올립니다.

필요하시면 참고하세요.

 

5호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과

주변 공산성과 정지산 유적지에 관한 설명입니다.

 

 

 

 

 

백제고분군의 유형에 대한 설명입니다. 

 

 

 

 

 

방격규수신수문경 그냥 쉽게 말하면 청동거울

국보 161호

 

무령왕의 금제관식

국보 154호입니다. 

 

금동신발

 

송산리 6호분입니다.

무령왕릉인 7호분과 같은

굴식 벽돌무덤입니다.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랍니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벽면에는 小龕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갑니다. 

 

 

 

 6호분 벽화에 대한 설명과 무령왕릉과의 비교입니다.

 

 

 

무령왕

 

서기 501년에서 523년까지 재위한 백제의 제25대 왕입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융(隆)입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아요.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고,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무령왕릉의 지석에 따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여간 501년에 동성왕이 위사좌평인 백가의 계략으로 시해되자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고  

재위 20년, 나의 62세에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였습니다.

 

후손으로는

첫째 아들 사아는 일찍 죽었고,

둘째는 성왕으로 나라를 꽃피우고,

셋째 순타태자는 일본으로 갔고,

넷째 공주는 일본 천황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2001년 일본왕 아키히토가 2001년 방송에서

'나 자신은 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고를 느낀다.'고 말한 것으로도 증명된다 하겠습니다.

 

 

무령왕릉입니다. 

아치형으로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써

중국 남조에 속하는 남경을 수도로 한 양나라의 무덤의 양식과 유사하답니다.

 중국 양서 백제전에 백제가 기술자와 화공들을 백제로 들여갔다는 기록도 있어

무덤의 축조에 양나라의 기술자들이 동참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발견된 벽돌에는 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별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는 의미의

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하네요.

남경에 있는 제가산 남조묘들과 무령왕릉의 양식이 매우 흡사하답니다.

무덤의 양식은 보수성이 강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데

무령왕릉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봅니다.

이를 통해서 무령왕시대에는 백제가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왕릉에서는 모두 108종 2906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종 16점에 달합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국보 등 유물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존·전시되고 있습니다. 


사진으로 한번 보시죠. 

 

 

 

 

 

 

 

 

 

 

국보 1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석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지석이 발굴되어 백제 무령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석은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장방형 돌판입니다.

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 의 청회색 석록암에 해서체로 글을 새겼지요.

무령왕이 523년에 죽고 3년상을 치르기 위하여 2년 3개월간 가매장하였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후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529년에 안치할 때

매지권을 상하로 뒤집어 뒤편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고 하네요.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릉 중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던 것입니다.

 

 

매지권 : 무령왕릉 지석 뒷면에는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 1만닙를 주고

능을 만들 땅을 사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토지매매 문서를 작성한 것입니다.

또한 중국 돈인 오수전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오늘날과 유사한 화폐거래를 통한 토지 매매를 유추할 수 있다 하네요.

지석의 내용은 짧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할 수 있었고

매지권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인들의 사상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답니다.

 

이 지석 2장이 고분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무령왕릉의 출토 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영동대장군이란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 고조에게서 받은 작호이며,

사마왕은 무령왕의 이름인데

삼국사기에는 斯摩로, 일본서기에는 斯麻로 기록되어 있답니다.

왕의 죽음을 崩, 무덤을 대묘大墓로 표현하고 있고

지석에 새겨진 무령왕릉의 사망년월은 삼국사기기록과 동일하답니다.

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왕의 지석 해석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왕비의 지석 뒷면 해석

돈 1만닙, 다음의 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에 든 돈으로

토지신 토왕, 토백, 토부모, 연봉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료에게 나아가서

서쪽 땅을 사들여 묘을 만들었으니 문서를 만들어 남긴다.

현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

 

 

 

참 중요한 발굴이면서도 아직까지도 욕을 먹는 발굴입니다.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루어졌다합니다.

특히 공주에서 교편을 잡았던 백제유물의 약탈자

카루베 지은에 의해 도굴된 유물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고분에 유물이 없어 무령왕릉과 구조가 비슷한 6호분의 피장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도 아쉽습니다.

그나마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게 천만다행이지요.

 

발굴경위를 보면

1971년 7월 6일 송산리 5, 6호분의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지요. 

7월 7일 무덤의 아치형 입구를 발견합니다.

호우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자정까지 배수로를 팠고

7월 8일 날이 밝자 발굴을 다시 시작하여

오후 3시경 입구를 막는 벽돌의 바닥까지 발굴을 하였습니다.

위령제를 지낸 후 4시경에 입구를 막는 벽돌을 드러내자

널길의 중앙에서 돌짐승을 발견하였고

무덤의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南朝風 해서체로 새겨져 있어서

1442년 만에 무령왕과 왕비의 실존이 밝혀집니다.

이후 발굴팀은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왕릉의 발굴을 발표하였고.

이후 혼란 속에서 밤을 세워 유물을 수습하였다 합니다.

호우로 인하여 8일 밤새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만 ...

 

본래의 모습이 훼손되어 이후 성급한 발굴과 공개였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던 거지요.

 

왜 그리 졸속발굴과 성급한 공개가 자행되었을까? 

발굴 3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 합니다.

 

 

 

한숨돌리면서

무덤의 축조과정을 한번 보시지요.

 

 

 

 

 

출구를 따라 밖으로 나갑니다. 

 

모형관을 나왔습니다.

 송산리 고분군입니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는 모두 폐쇄되어 있습니다.

그냥 한번 둘러 보시지요.

 

 

 

 

 

 

 

 

 

 

 

 

 

 

 

 

 

 

 

 

무령왕릉 밖으로 나왔습니다.

무령왕릉 답벽을 연해서

공산성쪽으로 걷습니다.

 

무령왕릉 담쪽에 붙은 마을 가장 안쪽 으로 한옥이 보이는데

마애불이 조성된 사찰인듯 하여 당겨 봤으나

잘 안잡혔네요. 

 

그 반대쪽 야산에는

천년고도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울타리 성벽을 쌓고 있군요. 

 

 

 

어찌어찌 걷다보니

무령왕릉을 본딴 연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연문 너머로 공산성이 보이고..

 

연문은 차길이라 못지나고

옆으로 돌면서

방격규수신수문경을 한번보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며

오늘 답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