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산업도로 아 번영로구나!!
번영로를 타고 검은오름앞에서 꺽어서
검은오름 탐방객안내소를 지나고 선녀와 나뭇꾼도 지나고
선인동 마을 표지석까지 왔습니다.
선인동을 가려는게 아니고
선흘1리 마을을 찾아보려고 오던 중인데
문득
이부근에도 당이 하나있다는 생각이 나서 차를 세웠습니다.
동굴까페쪽으로 가다보면 오른 쪽으로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 길을 쭉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뱅뒤굴이 나오는데....
거기를 가겠다는 게 아니고 그길로 들어가서 조금만 가면 왼쪽 숲속으로 당이 하나 있습니다.
제주 전통문화연구소의 신당조사서에도 않나오고
주변주민들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갈때마다 지전 물색도 새것이고 잘 관리되어 있습니다.
들러보겠습니다.
길 초입에 물통이 있습니다.
선흘 1리에는 못이 많지만
이곳 선흘2리에는 물이 귀했으니 어느시기엔가는 이 부근에 사람과 짐승이 줄서서 기다렸겠습니다.
조금만 더 길을 따라 걸어가다
왼쪽 숲길로 들어섭니다.
한바퀴를 돌면서
당을 찾고요...
지전 물색이 걸려 있습니다.
몇몇 당궐이 생기맞춰 오는 일뤠당인가 봅니다.
제단과 궤도 잘 정비되어 있고
각종의 치성물들이 있습니다.
이 정성에 감응하여
영급 좋고 수덕 좋고 버네 좋고 자손들 그눌르시는
이곳 당신께서
만사은덕 주시리라 믿습니다.
당에서 나와 웃바메기 쪽으로 계속 올라갑니다.
방사탑이 가지런히 서있네요.
이름을 잊었습니다.
무슨암이던데..
마당에 나와 계시는 부처님전 인사드리고
계속 올라가
바위속 샘물을 찾습니다.
바윗속 샘에서 물이 아직 나오기는 하는데..
주변을 보아하니 찾는 사람이 없나 봅니다.
빠꾸해서 목선동으로 내려옵니다.
이 표지석 길건너 알밤오름 밑에
예전 시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림 이시돌 개척시
임신부(피제이맥 그란치)가 이땅을 사서
양돈을 목적으로 귀농정착을 시도하여 22동의 사택을 짓고 개간을 하였으나
현재는 소유권이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작년 이맘때까지는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바로 윗사진 : 2009년 3월에 찍은 사진
당시 마을 할아버지 왈 : 집을 꼭 드럼통 잘라서 눕혀놓은 것 같아서 살 맛이 않났다.고 했습니다
빙돌아서
최근에 설치한 마을 표지석 앞으로 왔습니다.
선흘1리의 진산인 알바매기가 보입니다.
돌아서서 꾹!
선흘리 본향 당동산 산신당입니다.
송당당신의 열다섯번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송당신의 아들이 몇명이냐고요?
모르죠...당 본풀이마다 조금 달라요.
김오생본 본풀이에 의하면 18명이랍니다.
그중 열다섯번째 아들이 여기에 좌정하신거지요.
잘다듬은 돌로 궤를 만들었고 위에 기와지붕형태의 돌을 덮었네요
궷문도 매끈하게 다듬은 돌로 만들어 달았습니다.
공손히 인사하고 조심조심 궷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토지본향명신지령이라고 새긴 위패가 있습니다.
알선흘 당동산 토주관 한집이시지요.
궤앞에 제단이 있고 청기와 덮은 담장으로 뒤와 옆을 둘렀습니다.
담옆 바위위에 곱게 접은 포목 한필이 돌에 눌려져 있습니다.
돌아나오는 길 밭담속에 나무뿌리..
그냥 한번 찍어 봤습니다.
낙선동 4.3성터
1948년 겨울 어느날 선흘리가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리고 주변에 은신했던 사람들 마져 많은 희생을 당하게 되고
미리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왔거나 은신했다 붙들려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들이
1949년 봄 이곳 뱅디왓에 성을 쌓고 집단거주하게 됩니다.
느끼는게 많게 하려고 일부러 허전하게 복원했는지 그냥 썰렁합니다.
복원당시 브로깅을 한게 있어서 오늘은 생략합니다.
물
엄청 귀한 물
궤앞에 공동우물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추었을 겁니다.
세원의 흐름이 흔적으로만 남겨놨네요.
그 앞에
너무 예쁜 아이가 서 있습니다.
선흘 리사무소앞입니다.
설촌유래가 쓰여 있습니다.
약 750년전 현씨에 의해 설촌되었으며
玄仡이 先仡이 되고 先仡을 善屹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리 사무소입니다.
큰 폭낭옆으로 비석이 몇개 있습니다
그 중 두개.
앞면
뒷면
아래사진 오른쪽비는 목사 구재룡 거사비입니다.
현종때 제주목사였답니다.
재직중 취렴이 적어서 도민들이 꽤나 고마워 했답니다.
가파도에 영국함선(?)이 정박한 것에 책임을 물어 파직당했다 하는데
이 분 떠나고 난뒤 거사비가 도내 여러곳에 세워졌습니다.
언뜻 생각나는 개수만 해도 여섯개(?)
그런데 이비가 4.3때 총에 맞아서 부러졌지요.
내팽겨진 상태로 있다가
구재룡목사의 방계후손이라 하는 구자춘이라는 분이 도지사로 오신후 다시 붙여 세웠답니다.
그 옆에 비는 윤구동목사 청덕 선정비인데..
거사비는 옛일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가신 다음에 세운것이고
선정비, 송덕비는 갈 날짜가 정해지면 떠나기전에 세우는 거니까
내용은 미화가 되어 있겠지만 환곡의 모조를 미리 준비하여 도민 구휼에 힘썻다 합니다.
거사 안창룡 연시비
출연을 해서 은혜를 배풀었다.
연출토지 이작정지..땅을 내어 우물을 팠네요.
엄청 고마운지
비각까지 세웠습니다.
여기는 리사무소 앞 삼거리 비석거리입니다.
전부 마을 전기가설기금을 내신 분 들 입니다.
건립 날자가 1975년 전후 입니다.
그때부터야 마을에 발전기를 들여 놓고 자가발전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마을에는 돈이 없어 전부 출연을 받아서 했다는 이야기지요.
다시 4.3입니다.
예전엔 사람의 이름이 너무 좋으면 귀신이 시기한다고 그래서 그랬는지..
이름은 선하고 빼어난 마을인데
마을 전체가 처참한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도틀굴과 목시물굴에서의 슬픈 죽음
낙선동에서의 숨막히는 세월
그러나 지금 다시 살아납니다.
이 신낭알거리 불칸낭처럼..
모두 타버려 생명을 잃었다 했지만 한쪽에선 제싹이 자라고
타버린 굽이에는 다른 수종의 새싹이 돋아나
화합과 상생의 상징으로 푸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동백동산 앞입니다.
누구네 산방..
동백동산을 가는 것도 아니고
산방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당을 찾아서 숲길로 연결되는 소로길로 들어갑니다
신당입구
대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온 웃선흘 탈남밭 일뤠당
큰할망인 일뤠할망, 에미도령, 그리고 산신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걸명하는 궷집이 네곳입니다.
이곳 힐망당 한집은 아기를 못낳는 사람들에게 효험이 있다 합니다.
그리고 에미도령..
웃선흘 조상인 김영감이 큰어멍모르게 첩에게서 난 자식을 병풍뒤에 감추고 키웠습니다.
영감이 벼슬자리때문에 서울을 가자 병풍뒤에 아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된 큰어멍이 아이를 때리자
아이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영감이 돌아와서 아이가 없는 것을 알고 한라산에 까지 찾으러 갔으나 찾지못하고 선흘곶으로 돌아오다
가시나무에 분홍치마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찾게 되었답니다.
아이를 찾고 한는 말 너는 이제 할 수 없으니 큰 할망옆에서 얻어 먹으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곳에 같이 있는 거지요.
나무에 연해서 담을 쌓았는데
담을 뚫고 뿌리가 번집니다.
당을 한번 더 뒤돌아 보고
오다가 지나친 또 다른 당으로 갑니다.
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사기그릇이 많이 깨져 있습니다.
아이가 아파 당에 가서 빌고 돌아올 때는 그릇을 깨어두고 가는 소위 말하는 귀신방쉬의 흔적인 것 같습니다.
제주 전통문화연구소의 제주 신당조사에는 빠져 있지만
마을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웃선흘 조상 김영감이 서울에서 벼슬자리 끝내고 내려올 때 데려온
한양애기씨가 좌정해서 치병신의 역할을 한다 합니다.
아주 오래된 물색에서 최근에 걸었을 고은 물색까지 걸려있습니다.
포제단 쪽으로 갑니다.
목공예를 하는 산방앞을 지납니다.
포제단 앞 물통
지금은 썩은 물만 고여 있습니다.
포제단입니다.
본향당은 웃선흘 알선흘 구분하여 다니고 있지만
포제는 두마을이 함께 지냅니다.
하늘의 신인 酺神과 땅의 신인 土神 두분의 신위를 모시지만 포신의 제단이 조금 높습니다.
포신의 포자에서 느끼셨겠지만
포신은 원래 재해를 내리는 신입니다.
그래서 재해를 내리지 말고 참아주십시요하는 뜻에서 포제를 지내 왔다고 합니다.
포제단 옆 계곡을 조금 더 가보니
자연동굴이 있습니다.
그 앞에 축성한 흔적이 꼭 초소 같습니다.
4.3때 누군가가 숨어 지내면서 초소를 쌓는 것 같습니다.
이곳은 4.3의 흔적이 하도 깊다보니 모든 게 그리 보이는 걸까요?
다시 빙둘러서 북오름 앞으로 와서 선흘1리의 진산 알바메기를 봅니다.
서북방향으로 두팔을 벌려 굼부리를 이루고 남쪽 방향으로 머리를 들어올린 상서러운 산
백호줄기에 알오름이 있어 굴곡이 있었겠지만
이제 다시 기운을 충전하여 발복하게 해주길.....
바라면서
오늘 답사를 마칩니다.
Anton Bruckner
Symphony No. 4 Es-dur “Romantische” 1. Bewegt, nicht zu schnell
(Fassung/Version: 1880; Ed.: Robert Haas)
Berliner Philharmoniker
Herbert Von Karajan, 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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