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저지리 마을 답사 2

하늘타리. 2010. 2. 8. 17:20

머중이에서 문도지오름쪽으로 가다 보면

갈림길가운데 큰 폭낭이 두그루 있습니다.

빌레위에  큰 나무가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면서 그 판근이 암반위에 나와 흙을 찾아 뻗은 모습이

안스럽기도 했는데..

밑둥옆을 잘 정비해 놨네요. 

 그런데 이 뒷새물은 너무 각지게 정비를 했군요.

몇년전 이 부근 곶자왈을 헤매던 기억에 의하면 동그마니

참 보기 좋았는데..

좌,우,뒷 부분은 경작지정리를 위해 어쩔 수 없다지만..

이 앞부분 빌레의 자연 스러웠던 경사면은 그냥 놔두어도 됬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전 어느 마을 어르신께서 하시던 이야기.

정비를 안해도 구시렁거리고

정비를 해놔도 구시렁거리니

마을에 필요없는 것은 다 없에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 저지오름은 성공한 케이스지요.

꼭 필요한 부분에만 절제된 정비를 하여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선정되어 있고

이 오름을 걷는 모든 사람들이 고마워하지요

 하지만 저기 바라다 보이는 느지리오름은

완전히 버려놓은 케이시지요.

그래 오름 올라가는 길을

모든 종류의 포장종류전시관처럼

콘크리트길, 세멘트길, 지압길, 폐타이어길, 목재데크길 등등

또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오름 정상부 봉수대있던 자리를 밀어가지고

전망대라고 만들어 놨으니...

수고했다는 말도 못하고..

뭐라 카지도 못하고...

그냥 안 갈 뿐입니다.

 

앞새물로 갑니다.

지금이야 교통이 사통팔달했으니 제주시에서 오다보면

머중이뒤라서 뒷새물이 되겠지만 이 물통을 팔 당시 저지마을 중심부에서 보면

여기가 앞에 있는 새물이지요.

그래서 앞새물...

 

저지리의 역사는 물과의 싸움입니다.

끊임없이 물통을 팝니다.

땅자체가 점토질이 아니다 보니

봄에서 여름넘어가는 철과 늦가울에는 기왕에 있는 물통은 바짝 말라버리고

사람과 기르는 소와 말 모두 물을 찾아

그나마 가까운 낙천에서 부터 제법 먼 산양, 명월, 금악 두모리까지 소와 말을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이고

가족모두 허벅을 지고, 소등에도 싣고

길어와야 했으니

그 고생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물이 나올만 한데는 전부 파보는 것이고

물이 나올 기미가 보이면

그 땅의 주인에게 제법 큰 돈을 내고 땅을 사야 했으니

(그 땅의 주인도 큰 부자가 아닌바에야 그 땅을 그냥 내놓으면 먹고 살 방도가 없잖아요)

재력이 있는 집안이 행세께나 하고 살려면

땅살돈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급제 양왈득 추지비입니다.

辭金捐田 提池及泉 以子顯父 後世相傳

돈과 밭을 내어 물을 끌어 샘을 만들었다. 아들이 아비를 현양하여 후세에 길이 전한다.

과거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현직에는 나가보지 못한 양왈득이라는 분의 아들이

땅과 돈을 내어 만들었나 봅니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명목의 과거시험도 많았고

그중 요새말로 정시문과만해도 581회 14621명정도(국조방목)되는 걸로 알고 있으니

합격하기도 어렵지만

합격한 다음에도 집안이 그럴듯 하지 못하면

벼슬을 받지 못합니다.

사실

조선시대때 몇명의 제주도민이 과거에 합격했는지는 모르지만

시험합격후 부임전 교육이라할 성균관에 들어간 분은 한분도 없습니다.

 이 겉으로 봐서는 가시넝쿨이 가득 엉겨져 있는 곳이 물통입니다.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각각 3개씩

6개의 물통을 만들어서(제지급천)

먹는 물, 씻는물, 빨래하는물.쉐먹이는 물 등등으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지금은요?

물은 있지만 썩어가고 있지요.

 

 

 

 

 

 

 

 요위에 무슨 제단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난번에 찾으러 왔다가 못찾었습니다.

아쉬움에 한장 꾹..

 저지오름쪽으로 돌아 나갑니다.

 나가는 길 왼쪽 귀퉁이에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孺人 金氏之 義

의구의 구자는 할미구입니다.

의로운 할머니가 아니고 

일찍 혼자되어 외롭게 살아온 아주 나이 많은 할머니를 뜻하는 말입니다.

 3년전인가요??

이 비석을 발견하고 덩그러니 비석만 있고 쓰여진 용어가 너무 낮선것이라서

비석뒷면을 보았는데.. 쓰여진 연호가 康熙00이었고

그 옆에 長之孫 000改碑라고 쓰여 있었다고 기억 됩니다.

에이 말도 않된다 강희년간이면 1700년 전후 60년간이고 이 비석의 질이 조면암인걸 보면

일제초기정도에 세워진 비석인데

200년전 외로운 할머니 이야기를

친자손도 아닌 오래비의 자손(그것도 한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한 7대후손)이

그것도 큰돈을 벌어 묘역을 정리하는 것도 아닌데

조그마한 비석만 덩그러니 세울이유가 있겠나...싶어

그냥 스쳐 갔었죠..

 

오늘도 그랬네요.

비석 앞부분만 습관적으로 셔터를 꾹꾹 누르고

뒷면은 다시 확인도 않하고 지나쳤네요.

죄송합니다.

 

명리동으로 다시 내려 왔습니다.

 

 

 

 

명리동 밧소랭이입니다.

명리동 바깥쪽에 있는 소름한 못입니다.

소름하다고 하지만 명리동 봉천수 중 가장 큰 물통이고

주변에 대장간을 설치하여 그 곳에서 정을 만들고 이민들이 총동원되어 빌레를  깨어만든

돌빌레못입니다. 

 

 

  

 

 

 

중굿물입니다.

명일동 가운데 있는 물통이라 해서 중굿물입니다.

 

 

 

 

 

 

도요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는 과수원입구에서 보이는 폭낭입니다.

예전에는 꽤 많은 인가가 이부근에 옹기종기 있었겠네요.

 

새물통이라는데

새로 판 물통이라는 뜻이지요

새로 판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70년정도는 지났을 겁니다.

물통으로의 접근로와 물팡이라든가 옹벽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도요지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입구라고 추정되는 부분 윗쪽은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옆부분에는 잡초가

 

뒷부분에도 소나무가... 

조금 멀리서 보니 길다란 경사형의 윤곽이 흙가마의 전형적인 형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조그마한 자왈을 하나만 넘으면

구억리 도요지터인걸 보면

여기도 도요지였을 가능성이 높을텐데

마을사람들이 아무리 건의를 해도 행정당국에서는 관심을 안 갖는다 하니

아마 없어진 다음에

도요지터라고 표석을 세울 모양입니다. 

 부근에서 잠시 긁어 모은 도편들입니다.

터덜 터덜 걸어나오는 길에

기분전환하라고

먼지버섯이 꽃보다 더 예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운데 동그란곳을 누르면 먼지가 확 퍼진다 하여 먼지버섯인데

그게 사실은 버섯포자이거든요.

찌그러져 있는 것을 보니

포자는 다 날라갔나 봅니다.

부디 적합한 환경을 만나서 번성하기를 빌어봅니다. 

 

마을의 당목이었을지 모를 폭낭에게 인사를 드리고 떠나겠습니다. 

 항상 푸르름속에서 건강하세요.

 

Paganini  Sonata dei Luc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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