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s Rouault Georges Rouault E. E. Aurélio Luiz da Costa Alunos do 3°1 Trabalho de artes Georges Rouault - Estado de Gracia. La Busqueda Introspectiva (I parte) [Rouault, Georges-Henri]▶(루오) 1871. 5.27 ~1958. 2.13 파리. 프랑스의 화가·판화가·도예가이자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자. 중세 프랑스의 거장들한테서 받은 영감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분열된 종교적 전통과 세속적 전통을 통합했다. 루오는 파리 코뮌에 반대하는 세력이 파리를 폭격할 때 파리의 어느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구 제조공이었고, 할아버지는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오노레 도미에의 석판화 작품을 여러 개 갖고 있었다. 나중에 루오는 자신이 "도미에한테서 최초의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1885년 그는 파리 장식 미술 학교 야간부에 들어갔다. 1885~90년에 그는 유리 제조공의 작업장에서 견습을 했다. 그가 나중에 화가로서 갖게 된 화풍은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롯한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을 복원한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1891년 그는 국립 미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젊은 앙리 마티스와 알베르 마르케를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898년 모로가 죽자 그의 그림을 소장하기 위해 작은 미술관이 파리에 창설되었는데, 루오는 이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다. 루오의 초기 화풍은 아카데미 양식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1898년경 심리적 갈등을 겪고 난 후 부분적으로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및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여, 1905년 가을 전람회가 열릴 때쯤에는 강렬한 색채를 제멋대로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야수파 화가들의 동조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그는 주로 종이에 수채화 및 유화 물감으로 그렸으며 푸른색을 많이 썼고 극적인 조명과 강렬한 형태 및 활달한 필치가 특징적 이었다. 루오의 미술은 종교적 관심과 함께 발전했다. 그는 1895년경에 열렬한 로마 가톨릭 교도가 되었으며 가톨릭 지식인인 조리스 카를 호이스만과 레옹 블루아를 사귀게 되었다. 그는 부검찰관인 또다른 친구를 통하여, 도미에가 그랬듯이 파리 법정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신의 은총을 잃은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는 매춘부와 비극적인 모습의 광대 및 무자비한 판사로 바뀌었다. 루오는 수채화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1914년부터는 차츰 유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물감을 풍부하고 두텁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사용했으며 단순하고 위풍당당한 형태를 추구했다. 한편 화려한 색채와 검은색의 굵은 윤곽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시켰다. 그의 주제는 좀더 뚜렷하게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구원의 가능성이 훨씬 더 강조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훌륭한 연작을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은 〈조롱당하는 그리스도 Christ Mocked by Soldiers〉·〈성스러운 얼굴 The Holy Face〉·〈그리스도와 대제사장 Christ and the High Priest〉 등이다. 이무렵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 다시 손을 대어 작업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늙은 왕 The Old King〉 의 경우 그 제작 연대는 1916~36년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루오는 파리의 미술상인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권유로 볼라르가 쓴 〈페르 위뷔의 환생 Les Réincarnations du Père Ubu〉과 루오 자신이 쓴 〈별똥별 소동 Le Cirque de l'étoile filante〉, 샤를 보들레르가 쓴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및 루오가 그림 설명을 단 찬송가 〈미제레레 Miserere〉에 삽화로 넣을 판화의 제작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이 작업의 일부는 얼마 동안 미완성인 채 남아 있다가, 나중에 출판되었다. 1929년에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방탕한 아들 The Prodigal Son〉을 위해 무대 배경과 의상을 디자인했다. 1937년에는 태피스트리 연작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그는 인상적인 어릿광대 연작을 그리기 시작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사실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꽃이 있는 정물화도 몇 점 그렸다. 그가 평생 동안 그린 작품의 3/4은 인물화이기 때문에, 정물화는 예외에 속한다. 1947년 그는 볼라르의 상속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939년에 미술상 볼라르가 죽은 뒤, 상속자들이 그대로 소유하고 있던 자신의 수많은 작품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소송에 이겨서 팔려고 내놓은 적이 없는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소유권을 확립했고, 그후 미완성이라고 여겨지는 작품 315점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자신이 쓰는 그림물감의 색조 범위를 넓혀 초록색 계통과 노란색 계통을 추가했고, 거의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갖는 몇 점의 풍경화를 그렸다. 〈밤의 성무일과 Christian Nocturne〉는 그 좋은 예이다. 20세기 파리 유파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루오는 적어도 2가지 점에서 특징있는 인물이었다. 하나는 프랑스에서는 거의 지지받은 적이 없는 표현주의를 실천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가 근세에 가장 설득력있는 종교화가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2가지 진술에는 유보 조건이 필요하다. 루오는 같은 시대에 스칸디나비아나 독일에서 활동했던 일부 미술가들만큼 격렬한 표현주의자는 아니었다. 몇 가지 점으로 볼 때, 그의 작품에서는 19세기의 사실주의와 낭만주의가 뒤늦게 꽃을 피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공식 화가가 아니었다. 죄악과 구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R. McMullen 글 | 金碩禧 옮김 (브리태니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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