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그림읽기

Camille Pissarro

하늘타리. 2009. 11. 19. 16:48

 

Camille Pissarro

 

 File:Camille Pissarro 038.jpg

 

                                                

                                                                                         Size of this preview: 483 × 600 pixels

                                                                                                             자화상,  1903,

 

 

 

 

 

 Self Portrait 3 

 

 

 

 

 

 

 Self Portrait 2

 

 


-피사로는 성공한 유대인 상인인 아브라함 가브리엘 피사로와 라셸 만자노 포미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일찍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5년 뒤 서인도제도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이 이국적인 섬과 그곳의 주민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1853년 카라카스로 도망쳐서 2년간 그곳에서 덴마크의 화가인 프리츠 멜비와 함께 머물렀다.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1855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그린 가장 초기의 작품들은 열대지방과 프랑스 시골의 풍경화 및 인물화인데, 그것들은 대담하게 그린 것이기는 했지만 그뒤 그의 전생애에 걸쳐 그의 미술의 특징이 된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입학한 국립미술학교에서는 평범한 전통미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흥미를 못 느낀 피사로는 화가인 카미유 코로를 추종했는데, 코로는 1864년의 살롱 전람회에서 피사로가 스스로를 코로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무렵 피사로는 바르비 종파의 미술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원적이고 감상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사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들에도 매력을 느꼈다. 1860년대에는 미술가들과 작가들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유명한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 토론회에 참가했으며, 젊은 화가들인 오귀스트 르누아르나 클로드 모네와 함께 활동했다. 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도피했으며, 그곳에서 역시 프랑스에서 망명한 모네와 함께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영국의 풍경화들을 감상했다. 그는 런던에서 예전에 그의 어머니의 하녀였으며 이미 그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2명을 낳은 줄리 벨리와 결혼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온 피사로는 루브시엔에 있는 그의 집이 약탈당하고 그의 그림들 중 상당수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는 곧 퐁투아즈에 또다른 집을 구했다(파리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동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근교 마을에서 살았음). 그의 주위 환경은 약 30년 동안 그의 미술의 주제가 되었으며, "나에게는 아름다운 장소가 필요하다!"라고 그가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언제나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1872년 폴 세잔이 퐁투아즈에 와서 합류했는데, 이들은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외광회화). 피사로의 그림들은 결코 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1870, 1880년대에 그는 주요한 모티프로서 단지 집과 공장, 나무, 건초더미, 들판, 일하는 농부들, 강의 풍경들을 사용했다. 형태들은 흐릿하지 않고 뚜렷하며 색채는 강렬했다. 1870년대 후반에는 쉼표 모양의 붓놀림을 이용해 반짝이는 섬광을 많이 묘사한 작품 〈과수원의 꽃 피는 과일나무들, 퐁투아즈의 봄 Orchard with Flowering Fruit Trees, Springtime, Pontoise〉(1877)을 제작했다.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리인으로 그들의 작품 판매를 대행하고 있던 미술 상인인 폴 뒤랑 뤼엘이 그의 그림들을 팔아주었지만, 피사로는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맏아들인 뤼시앙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쓰고는 했는데, 이 주목할 만한 편지 왕래는 1883년에 시작해 그뒤 20년간 계속되었다.

 

 -피사로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표시한 적이 몇 번 있다. 양식과 기법의 문제에 정신을 빼앗긴 그는 1885년 화가인 폴 시냐크의 소개로 만난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 이론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피사로는 작은 색점들을 나란히 병치시켜 꼼꼼하게 그리는 쇠라의 기법을 채택했으며 5년 동안 이 '분할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들은 미술 상인들과 수집가들 및 심지어는 그의 오랜 동료 미술가들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계속되는 가난한 생활에 크게 낙담한 나머지 피사로 부인은 가장 어린 두 자식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생각까지 했다. 마침내 피사로는 그 양식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부딪힌 반대 때문이 아니라 "나의 감각에 충실하게 대상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토록 찬란하면서도 그토록 제멋대로인 자연의 인상에 충실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무렵 그는 예전에 그와 같은 경향으로 활동하다가 새로운 상징주의 운동에 합류한 폴 고갱과도 멀어졌다.

  

-1892년 뒤랑 뤼엘은 피사로의 작품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를 계기로 피사로는 재정적인 안정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이무렵 고질적인 눈병에 시달려 야외에서 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1893, 1897년에 그는 파리에 호텔 방을 잡고 해가 비치거나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낀 이 도시의 거리들을 밤낮으로 그려 24점을 완성했다. 1890년대에 그는 또한 루앙의 강 풍경을 연작으로 그려 마찬가지로 자연의 다양한 효과를 묘사했다. 1900년부터 3년 뒤 그가 죽을 때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에라니·디에프·르아브르에서 참신한 시각과 더욱 자유로워진 기법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유화와 구아슈, 템페라, 파스텔화, 심지어는 부채와 자기에도 그린 1,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약 200점의 정교한 판화들과 함께 피사로가 반세기에 걸쳐 남긴 작품들의 뛰어난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최한 7번의 전시회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남을 잘 격려해주었기 때문에 당시 개성적인 표현의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고자 분투하고 있던 젊은 미술가들(모네·르누아르·세잔·고갱) 사이에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피사로는 60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렸지만 "성공하리라는 확신 없이는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을 확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 Mi. Vishny 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Camille Pissarro.   피사로의 노년의 모습  수염이 매우 이상적이다.

 

 

 


   자화상, 1873년, 캔버스에 유채, 56 x 46.5cm

Camille Pissarro (1830-1903)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섬[島]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지조르 근처의 에라니에 정착하면서 피사로의 예술은 체계화되고 보다 단순한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바로 그 해에 그는 자신도 참가했던 앙데팡당전에 출품된 쇠라의 <아니에르에서 목욕하는 여자>에 감탄하여, 1886년 마침내 신인상주의로 전향한다.


-그는 신인상주의를 인상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체계 위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서 피사로는 쇠라, 시냑과 나란히 분할묘법의 미학에 따라서 그려진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이 미학을 열렬히 선전하는 예술가로 나타난다. 이후 약 4년간 성실하게 신인상주의를 실행했으나 그의 방법은 쇠라나 시냑의 것에 비하면 유연한 것이었으며, 참신하고 자연스러운 시각을 결코 잃지 않았다.

 

 
 
 Picking Peas 3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들은 터치로 볼 때는 쇠라나 모네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킨다. 점묘법의 실험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온화한 색조의 조화와 밝은 햇살의 표현 등을 통해, 일상의 한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풀밭 위에 앉아 있는 왼쪽의 어린아이의 머리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완만한 대각선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길은 깨끗하게 빨아 널은 침대보처럼 포근함을 준다. 모든 날카로운 선이 제거된 동글동글한 오브제들은 화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일러주고 있다.

 

 

 

Sunset at St. Charles, Eragny

Oil on canvas, 1891
Sterling and Francine Clark Art Institute, Williamstown
 

 

  

-인상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인 피사로의 그림들은.. 결코 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주요한 모티프로서 단지 집과 공장, 나무, 건초더미, 들판,

일하는 농부들, 강의 풍경들을 사용했다.

형태들은 흐릿하지 않고 뚜렷하며 색채는 강렬했다.

그런대도 그의 그림은 묘한 끌림이 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최한 7번의 전시회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남을 잘 격려해주었기 때문에 당시 개성적인 표현의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고자 분투하고 있던

젊은 미술가들(모네·르누아르·세잔·고갱) 사이에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Red Roofs, 1877

 

피사로는 화가인 카미유 코로를 추종했는데, 코로는 1864년의 살롱 전람회에서 피사로가 스스로를 코로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무렵 피사로는 바르비 종파의 미술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원적이고 감상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사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들에도 매력을 느꼈다.

 

 

 

 

 The Artist's Garden at Eragny
Oil on canvas, 1898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Resting in the Woods at Pontoise

Oil on canvas, 1878
Kunsthalle, Hamburg

 

  

 

 Bather in the Woods
Oil on canvas, 1895
Metropolitan Museum of Art, Manhattan

 

 

 

La C?e des Boeufs, the Hermitage
Oil on canvas, 1877
National Gallery, London

 

피사로가 가장 아껴서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던 그림이라고 합니다. 모네나 르느와르에 비하여 색감이 떨어지는 듯 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은 어느 그림보다 풍부합니다. 왼쪽 아래 서있는 모녀와 빨간 지붕의 집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빨간 지붕이 많죠.) 이 병풍처럼 서있는 나무들과 결합하여 평면적인 구도에 신선한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박물관, 파리

이 작품은 틀림없이 피사로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며,'인상주의'의 본질적인 목표 가운데

몇가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이중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그 하나는 마치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장소로 옮겨진 듯이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특정 지역과 자연의 면면에 대한 사실성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효과를 창출하면서 그 자신 고유의 감동과 서정적인 감정의 고조를

야기하는 색채의 사실성이다. 피사로는 들쑥날쑥하는 화가로 묘사되어 왔으나,

비록 이것이 하나의 관점에서는 단점으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또한

그로 하여금 때로 독자적인 우수성을 부여하는 장점이기도 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Portrait of Jeanne.jpg
1898
oil on canvas 65x54cm
Fondation Rau pour le Tiers-Monde

 

 

 

 

The Hermitage at Pontoise
Oil on canvas, 1867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Louveciennes: The Road to Versailles
Oil on canvas, 1870
Foundation E. G. B?rle Collection, Z?ich

 

 

 
 Peasants Chatting in the Farmyard, Eragny
 

시골의 노동 습관을 찬미하던 피사로는 농촌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그렸다. 주로 풍경화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처럼 그렸지만 특별히 이 작품에선 한가롭고 평화로운 소녀를 캔버스 한복판에 두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한 여가풍조를 피사로는 좀더 소박한 시골풍으로 바꾸었다. 이 소박한 시골풍은 그를 표현하는 대표적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The Snack, Child and Young Peasant at Rest

 
 
 
 
 
 Pere Melon Cutting Wood
 
 

-피사로는 성공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일찍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그 역시 여타의 화가들처럼

가난의 고통을 처절히 맞본 화가중의 한명이다.

 

 
 
 
 A Servant Seated in the Garden at Eragny 
 
"내 생애는 바로 인상주의의 역사와 뒤얽힌 것이었다" 라고 말한 카미유 피사로는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화가이다. 그는 1870년대 내내 프랑스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완고하고 때로는 따분하며 심지어 권태로울 정도로 자연 관찰에 주력하였다. 1878년에 한 비평가는 그를 "그들 모두 중 최고의 자연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인상파 중에 최고의 자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피사로는 특히 눈 풍경을 좋아했다. 따뜻한 햇볕으로 인해 길가의 눈들이 많이 녹아 있는 오후의 한적한 길가로서, 파리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루브시엔느의 길을 그린 이 그림에서도 잔설이 남아 있는 길에 오후의 짧은 햇빛이 드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길 오른쪽의 양지와 왼쪽의 음지는 전통적인 원근법 구도 속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한적한 시골길의 안정감과 고요함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1870년 독일군이 침공하자 피사로는 프랑스를 떠나 런던으로 왔고, 클로드 모네를 만난다. 거기서 그들은 콘스터블의 예술에 매혹되었고, 특히 그들 자신의 회화적 탐구와 아주 유사한 터너의 "눈과 얼음의 효과"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이 놀라운 효과가 흰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원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수많은 서로 포개어진 다양한 터치들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Peasant Trimming the Lawn
 
 
 

 

 
 Harvest at Eragny
 
 
 
 
 
 Haymakers at Rest
 
 
  
 
 

 La Ronde 1

 

 

 

 

 
 Market at Pontoise

 

 

 

 

 
 Peasants Harvesting Potatoes
 
 
 
 
 
 Peasants Planting Pea Sticks
 
 
  
 
 
 
A Street in Pontoise
 
 
 
 
 
Laundresses at Eragny
 
   
 
 

 

 Young Peasant Girl with Stick

 
 
 
 Young Peasant Girl Wearing a Hat
 

 

 

 

 
 Bathers 2

 

 

 

 

 
 Bathers Seated on the Banks of a River
 
 
 
 
 
Bathers 1
 
 

 

 

 
 The Little Country Maid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Chestnut Tree at Osny, 1873, Camille Pissarro

 

피사로는 자신이 작업한 것을 코로에게 보여주곤 했다.

피사로가 말하길,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군요.

당신이 초록색으로 본 것을 나는 회색과 노란색으로 보고 있잖아요"

 

이는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운 것과 같이

이미지의 재현, 재해석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예술가는 어떤 사물을 보고 개인적으로 느낀 이미지를 작품속에 반영해내고,

또 우리는 예술가가 창조해낸 이미지의 재현을 또 재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가의 작품을 또 다시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미지라는 매력적인 개념이 없이는 예술도 예술다울 수 없는 것 같다.


 
 
 The Market
 
 
 
 
 
 The Market at Gisors 2
 
 
 
 
 
 The Pork Butcher
 
 

 

 

 
 The Poultry Market at Pontoise
 
 
 
    
 
 Washerwoman, Eragny
 
  
 
 
 
 Woman with a Wheelbarrow
 
 
 
 
 
 Women Gathering Grass
 
 
 
 
 
The Garden at Pontoise
 
 
 
 
 
 
Camille Pissarro

(1830-1903)

 

 

French Impressionist painter

 

 

 

 인상파의 최연장자

1888년~1890년 신인상주의기법 탈피
1884년 신인상주의로 전향 

대표작: 브뤼헤이 다리, 자화상, 테아트르 프랑세즈광장

 

 

Unknown photographer, Camille Pissaro and his wife, Julie Vellay, 1877, Pontoise 

Pontoise

Commune of Pontoise

File:Rue Thiers - Pontoise 03-03-06.jpg 

A 19th century street in the center of Pontois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x-text/html; charset=iso-8859-1" enablecontextmenu="0" autostart="true" loop="1" volume="0" showstatusbar="1"> 
Mahler
Das Lied von der Erde  大地의 노래
Symphony for alto(or baritone) tenor & orch

I. Das Trinklied von Jammer der Erde 

'모셔와 가꾼 아뜨리움 > 그림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Jules Bastien-Lepage  (0) 2009.11.24
Jacques Louis David  (0) 2009.11.24
Georges Rouault  (0) 2009.08.13
운림산방  (0) 2009.08.10
홍지윤  (0) 2009.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