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는 우리나라 역사로 따지면 논개와 같은 인물입니다. 유디트는 몸을 바쳐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합니다. 그러나 클림트는 유디트를 선정적으로 그려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위 그림은 1901년 작품이고, 아래 그림은 1910년 작품입니다. 이 시기를 클림트의 황금기라고 일컫습니다.
반가운 소식이 있습니다. 클림트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린답니다.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2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총 100점이 전시되는데,
유명한 작품 키스는 빠녔다는군요.
여기서 클림트의 키스를 만나보세요.
이 그림은 1900년 작품입니다. 클림트의 독특한 작품 세계가 형성된 시기로 보입니다.
강렬한 색채, 원시성, 도도함, 신비로움과 주술의 세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그림입니다.
상식과 편견을 파괴하는 그림이지요.
비과학적이고 비종교적이고 반문명적인 이 여인은 당당합니다. 그 당당함에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은
주눅이 들게 됩니다. 이게 그녀의 힘이고, 자연의 힘이고, 클림트의 힘입니다.
가치관의 뒤집어짐을 경험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병, 당신은 절대 모르는 그 병이 치유될지도 모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1895년 작품 사랑입니다.
이 그림은 클림트의 초기 작품에 속합니다.
클림트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고, 신고전주의풍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세계가 확고해지지 않은 이 때에도, 클림트 특유의 은유와 상징이 살아 있습니다. 그림부터 보시죠.
표구를 한 듯 그린 이 작품의 첫 인상은 팬시합니다. 어찌보면 그저 통속적인 사랑 타령쯤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몽환적인 느낌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 하고, 특유의 작품세계의 단서도 보입니다. 그림 제일 윗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얼굴들을 보세요. 만화로 따지면 말풍선에 해당하는, 흐릿한 이 부분에는 어린아이부터 노파, 그리고 유령까지 등장합니다. 그림 아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풍경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그저 두 사람의 반짝 만남이 아니라 오랜 인연과 과거, 그리고 미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이 부분으로 인하여 그림은 통속성을 벗어납니다.
사랑을 보는 다른 시각, 아주 독특하고 통찰력 있는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부인이 신문광고로 나왔습니다.
아니 두통약 모델로 등장했습니다.
아래 그림과 광고를 비교해 보세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 부인이 펜잘부인으로 불리겠군요.
이 그림 역시 클림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입니다. 1899년 작품이지요. 클림트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 잘 알겠지요.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슈베르트, 실내라서 조명이 분산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또렷하게 보이는 인물은 슈베르트. 다른 인물들은 흐린 윤곽으로 보입니다. 초기 신고전주의풍의 작품들에서 조금 빗겨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아래 그림은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황금물고기입니다. 위의 그림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일단 소재부터가 다릅니다. 슈베르트 그림은 은유라기 보다 사실에 가깝고, 황금물고기는 은유 자체입니다. 황금물고기의 은유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관람객의 눈에 달렸습니다.
은유는 음식과 같아서 맛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낍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내 해석이 옳으냐, 내 느낌이 옳으냐 하는 식의 판단을 은유 앞에서는 접어두시기 바랍니다. 클림트의 은유에 당황하지 마세요.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존 말코비치가 주연을 맡은 클림트를 보는 것도 클림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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