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그림읽기

최후의 만찬

하늘타리. 2008. 11. 29. 23:30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안에 어느 민가집 2층에서 유대민족의 명절인 과월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듣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데 나를 제 손으로 잡아 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라는 말씀이 있자 제자들은 몹시 놀라며 당황하고 있는 순간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잘 포착하여 그린 것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다른 화가들이 그린 또 다른 최후의 만찬 그림은 잘 알려지지 않고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만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이지만 그 시대에 문화적인 배경에서 한사람에 의하여 해석 되어진 이미지를 아무런 여과도 없이 맹목적으로 그냥 받아 드리고 있는 것은 혹시 선입견으로 인하여 자칫 왜곡된 진리를 수용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한번은 짚고 넘어 가야 된다고 생각이 되었기에 다른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같이 감상해 봄으로서 그당시 있었던 최후의 만찬 사 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뿐아니라 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아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빈치 Leonardo da Vinci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1495-98
fresco Santa Maria dell Grazie, Milan



 

(1)레오라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1495년 그 당시 도시국가인 밀라노의 지배자이였던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교회 식당의 벽화를 그려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수도원 식당은 레오라르도가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었던 최후의 만찬을 그려 넣기에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에 당황하는 제자들의 다양한 감정과 몸짓을 훌륭하게 표현하였으며 정확한 원근법을 구사하여 깊이가 있고 입체적인 그림을 창작하게 된 것입니다.더우기 이 그림은 높이가 약 4m이고 폭이 약 9m로써 벽면 전체를 다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식당의 일부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최후의 만찬을 하였던 장소가 그 당시 이스라엘 성내에 어느 평범한 유대인의 민가집 2층 이였고 제자들도 어부 또는 세리 등으로 그저 보통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를리가 없는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왜 최후의 만찬을 하고 있는 장소가 어느 부잣집 연회장 같고 제자들은 모두 부자와 귀족들이나 입을 만한 의상을 입혀서 그 그림에 등장 시킨 것일까요? 과연 그가 이 작품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한 진정한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는 1500년 전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이 단순한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대로 숨을 쉬며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 그림을 통하여 웅변적으로 알리려고 한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그가 교회의 식당 벽에 그림을 그렸다고 하기 보다는 그벽을 헐고 식당을 증축하여 예수님과 그의 열두 제자들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식당으로 초대하여 최후 만찬을 하고 있는 것을 재현 시켜 놓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독자들을 이해 시키는데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에 기존 식당과 어울리게 천장과 벽면을 그려 넣고 넓은 마루도 표현한 것이며 등장 인물들의 의상도 이 만찬에 걸맞게 화려할 뿐 아니라 식기나 술잔 등도 그 식당에서 실제 쓰고 있는 그대로 소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판단 됩니다.그러나 이 최후의 만찬 그림은 프레스코 방식에 의하여 제작 된 것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윤곽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훼손 되였으며 이와 더불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개인적인 작품 의도도 점점 희미해져 갔고 그동안 여러차례 개작(改作)하면서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비중을 많이 두게 되어 이제는 일반 그림이기 보다 종교화의 성격이 더 두드러 지게 된 것입니다.


틴토레토 TINTORETTO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1592-94, Oil on canvas, 365 x 568 cm
San Giorgio Maggiore, Venice



 

(2)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는 이태리 베니스 출신의 화가로 한때 V.티치아노의 제자 이였으나 로마를 여행하던 중 미켈란제로의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아 그의 작품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사라센의 해난구조] [목욕하는 수산나] 등이 있지만 종교 신화를 소재로 한 [성 마르코의 기적] [천국]같은 작품 이외에도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최후의 만찬]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작고하기 2년 전부터 그린 것으로 이태리 베니스에 있는 산 조르지오 마조레(San Giorgio Maggiore)성당에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 되여 있습니다.그런데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비하면 완전히 자연주의 화풍이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왼쪽 천정에 매어 달린 산데리아 등불과 예수님의 광배(光背)에만 빛이 있고 전체적인 화면은 더둡게 처리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좌석 배치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경우는 제자들 세분이 한 무리를 지어 예수님 양편에 두 무리씩 배치 된 것이 마치 요즈음 기념사진을 찍을 때 사진사가 좋은 사진을 만들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좌석을 조정 하듯이 되어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예수님이 한가운데 계신 것도 아니고한쪽은 5명이 또 다른쪽은 7명의 제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맨끝에 앉아 있는 제자는 마을 청년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앞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그 주위에는 그들이 기르는 가축과 음식물을 담는 바구니와 접시 물주전자 등 온갖 일상생활용품들이 부산하게 널려 있어 평상적인 실제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슬그머니 또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되는 것은 정직한 종교지도자들 이라면 실제 모습과 가까운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을 더욱 홍보하면서 그것을 교육자료로 활용하지 아니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선호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자세한 실제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의도와 상관 없이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이 그림에 나와 있는 제자들이고 그 제자들의 뜻을 승계한 사람들이 지금의 종교지도자들이며 그들이 이룩하여 놓은 신앙공동체가 곧 너회들이 믿어야 할 정통교회임을 강조하고자 하는데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mil Nolde(1867-1956)
[최후의 만찬]Pentecost
1909, Oil on canvas
Nationalgalerie, Berlin.



 

(3)에밀 놀데의 최후의 만찬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는 북 독일의 슐레스비히에서 태어 났으며 그의 본명은 에밀 한젠(Emil Hansen)이라고 합니다.세계적인 화가로서는 1913년에 최초로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그 당시의 노인과 소녀의 인물화를 그렸고 그 이전에도 이미 장승을 소재로 한 유화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하고 인연이 닿아 있는 화가이기도 합니다.그는 한동안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듯 하였지만 그 당시 아무도 시도한바 없는 색채 표현주의를 독창적으로 구현하였으며 짧은 붓 터치에 의한 연속 된 선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넓은 색면으로 자신의 내면에 잠재 된 원초적인 영감을 순수하게 펼쳐 보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해체하여 버리고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농축 된 영감을 색채의 자연 논리대로 캠퍼스 위에 표현한 것이므로 여기에 다른 지식이나 사고가 끼어 들만한 틈새를 발견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은 건장한 노동자로 재현 되어 있고 제자들도 일반 노동자와 구별할 수가 없는 모습입니다. 제가 이 그림 안에 들어가 앉아 있다고 해도 별 거부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에밀 놀데가 인간의 모습을 벗길 수 있는데 까지 다 벗겨 버린 순수한 인간상을 그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벌거 벗고 공중 목욕탕에 들어가 있으면 재벌 회장인지 노숙자인지 구별 할 수 없는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여기서 예수님은 그동안 가까이 지낸 제자들에게만 마지막 가르침을 내려 주시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직도 태어 나지도 않은 전 인류까지 포함하여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비록 내가 이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너회가 나를 배반하더라도 나는 너회들을 사랑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중개자에 의하여서가 아니고 직접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에밀 놀데의 최후의 만찬은 1909년에 완성한 작품으로서 그의 작품 [성령 강림제] [그리스도의 생애] [방랑자] 등의 일련의 종교화는 그를 인류 미술사에 유명한 앙소르, 루오, 고갱 같은 종교화가의 반열에 설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길고 재미 없는 저의 글을 읽으시기에 노고가 많으셨겠지만 유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결론적으로 성경 구절에 나와 있는 똑 같은 상황을 화가가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틀려지는 것이니 진리를 찾아가야 하는 구도자로서 지금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상이 어느 화가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 형성 된 것이 아닌지 점검하는 기회가 되였기를 바라며 어짜피 진리란 언표불능(言表不能)이요 화표불능(畵表不能)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진리에 도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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