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국가>사적 130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른다. 마니산 참성단과 더불어 단군과 연관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귀한 역사 유적이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의 세 아들이 삼랑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의 둘레는 대략 2,300m이다.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친 할석(割石)을 사용한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영조 40)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삼랑성 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대몽항쟁기에 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는데 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후반 정족산 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등을 봉안했으며, 군사 시설로 정족진을 설치했었다.
[참고문헌] 이형구·노태천, 『백제논총』제5집,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6 강화군, 『강화 삼랑성 여장 조사보고서』, 강화군, 2005. 육군박물관,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신편강화사』, 2003
양헌수승전비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36호
소재지 : (23050)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2번지
이 비는 양헌수 장군이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강화군민들이 1873년(고종 10)에 세운 것으로 정족산성 동문 가까이 있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양헌수(1816~1888)는 1848년(헌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5년(고종 2)에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탈환의 임무를 맡아 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임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기도 하다. 정족산성 전투 패배로 사기를 잃은 프랑스군은 곧바로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참고문헌]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강화정족산성진지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66호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44
산성진지에서 본 전등사법당들
정족산성진은 정족산 사고를 수호할 목적으로 조선중기 이후 설치된 국방시설이다. 1907년 방화로 전체 소실되어 평탄지로 있던 곳을 2008년 발굴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 대규모 유구가 발굴되었다. 1870년대 이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족산성진」 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내사, 진사, 포량고 등의 건물지와 담장시설, 문지 등을 대부분 확인하였다. 발굴된 일부 건물지의 경우 정족산성진 설치 이전인 1784년(정조 8년)에 건립된 정족창과 관련된 건물지로 파악된다.
- 강화정족산사고지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67호
소재지 : (417-841)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9:
정족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후기 사고 중 하나이다. 실록은 조선전기에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1606년에 다시 만들어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강화마니산, 오대산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춘추관본이 불타 없어졌고 그후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보관하게 되었다. 정족산 사고는 1653년(효종 4)마니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다. 1660(현종 1)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장사각과 함께 선원각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보각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12호
소재지 : (23050)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상로304번길 48 (온수리)
전등사의 산내암자인 극락암 뒤쪽으로 약 50m정도 올라가면 예전 전등사의 부속시설이었던 선원보각 및 장사각이 옛터에 복원되어 있다. 선원보각은 조선 왕실의 계보와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었으며, 장사각 역시 ≪조선왕조실록≫ 등 나라의 귀중한 사서를 보관하던 건물이었다.
≪전등본말사지≫에 의하면 본래 묘향산에 있던 선원보각과 장사각을 1660년(현종 1)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하는데, 이 때부터 전등사에서 줄곧 이 건물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순종 2) 소실될 위기도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절의 창환(昌煥)·영함(永咸) 두 스님에 의해 보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국가의 명으로 선원보각이 철폐되고 서적들은 한양으로 옮겨졌고 그 뒤로 건물들은 퇴락하였다. 계단석 일부와 축대석 정도만 남아 있었으나 199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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