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고종사적비
승천포는 1932년 몽고군과 싸우기 위해 수도를개성에서 강화로 옮길때 고종이 배에서 내린곳이다...
<고려사>를 보면 몽골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는 1232년 6월 강화 천도를 결정한다.
기병을 앞세운 몽골군이 대륙전에는 강하지만 해상전에는 약할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당시 무신정권 최고 실력자 최충헌은 2000명의 군사를 먼저 강화에 파견했다.
고종 임금은 그로부터 20여일 후인 7월 초에 당도했다.
<고려사절요>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던 날 장대비가 억수로 퍼부었고 ...”라고 적고 있다.
삼별초항쟁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1993년 6월 1일 강화군민들이 삼별초의 몽골에 대한 항쟁을 기려 세운 비석으로서 강화군 외포리 선착장 오른편의 얕은 산 아래에 있다.
삼별초는 고려 원종이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강화도에서 봉기한 군사조직으로, 고려 무인정권 아래에 고종 17년 경에 집정자 최우에 의해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규모가 확장되어 좌별초·우별초·신의군으로 이루어진 삼별초는 고려 원종이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강화도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은 1270년 6월 1일 강화도에서 전라남도 진도로 이동하여 항쟁하였으며, 다시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여몽연합군에게 무너질 때까지 항전을 지속하였다.
항쟁비는 삼별초가 몽골의 지배에 항거하여 궐기한 유허(遺墟)에 세워졌다.
앞면에는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三別抄軍護國抗蒙遺墟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취지가 새겨져 있다.
[출처] 삼별초항쟁비 [三別抄抗爭碑 ] | 네이버 백과사전
망양돈대
망양돈대는 남쪽으로 건평돈대까지 3,200m, 서쪽의 삼암돈대까지 1,3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포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의 원형돈대로 포좌(대포를 설치하는 곳) 4곳, 치첩 40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으로,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여명과 함경도·황해도·강원도 승군 등 모두 8,000여 명이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