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강화 교동도

하늘타리. 2016. 9. 1. 08:28

교동대교



월선포(옛 도선장)







망향대
교동면 지석리 산 128






북진나루
교동면 인사리



남산포





삼도수군통어영지
인조 11년(1633년)에 3도(경기,충청,황해)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 서쪽해안에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였으며 배가 정박할 시 묶어두었던 계류석이 남아있다.




사신당지
사신당은 교동면의 관문인 남산포를 내려다보는 언덕인 남산(南山) 위에 있다.

 당의 이름인 ‘자신당’은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으로, 본래는 사신당을 의미한다.

6·25전쟁 때 소실된 당집을 1969년에 재건하였다.

강화도는 사신(使臣)과 관련이 깊다.

강화도 앞바다는 서울의 한강과 개성의 예성강, 임진강이 모이는 곳으로 예부터 경제적·군사적 요충지였다.

또 강화도에는 사신이 바람을 기다리며 머무른 사신관(使臣館), 몽고의 사신을 맞이하는 제포궁(梯浦宮), 사신의 숙소인 풍포관(楓浦館)이 있었을 정도로 중국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또 중국 사신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거나 우리나라 사신들이 중국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특히 강화도의 서쪽, 교동면의 입구가 되는 남산포는 고려시대부터 중국 사신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남산포에 있는 산은 읍내리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보이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 부르며, 높이가 해발 53m이다.

남산 기슭의 읍내리 571번지에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선(使臣船)들이 배를 움직일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머물렀다는 사신관 터가 있다.

또 바닷가의 바위들을 정으로 쪼아서 만든 층층대가 있다.

이것은 고려 때 송나라 사신들이 사신관에 머물렀다가 떠날 때 배에 오르기 쉽도록 만들어 놓은 사신등선로(使臣登船路)이다.

바로 이 근처에 있던 것이 자신당이다.

송나라 사신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뱃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자신당은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바닷길을 지켜 주는 바다의 수호신 역할을 하다가 고려가 망하면서 사신관이 그 기능을 잃게 되자 의미가 변화하였다.

마을의 안녕과 교동 주민들의 뱃길을 지켜주고 풍어를 기원하는 당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다만 읍내리에 거주하는 개인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이는 자신당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신앙이 마을신앙에서 개인신앙으로 격하(格下)된 것으로 보인다.






교동읍성

인천기념물23호
소재지 : (417-921) 인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

읍성은 지방행정 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이다.

대개 읍성 안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관리들의 업무 공간이다.

지역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며 비상시에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전에 임한다.

교동읍성은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한 때인 1629년(인조 7)에 쌓았다.

 성의 둘레는 약 779m이고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세웠다.

 세 문 모두 옹성을 설치했었다.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이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본진이 주둔하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고쳐 쌓았고, 고종 대에도 성문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동문과 북문은 어느 때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에 폭풍우로 무너져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부분만 남아있다.

1975년에 해체 복원했는데 문루는 다시 세우지 않았다.

 [참고문헌] 인하대박물관, 『강화 교동읍성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인하대학교박물관 조사보고 제75책, 강화군청·인하대학교박물관, 2007.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문화재청 홈페이지









황룡우물


교동부지(喬桐府址)

1395년(태조4년)월곶진(月串鎭)을 설치하여 만호겸지현사(萬戶兼知縣事)를 두었다가 그후 현으로 승격 현감을 두었으며 1629년(인조7년)에는 경기수영(京畿水營)이 월곶진에 이설되고 교동현이 교동부로 승격된 후 설치되었다.
현의 부지에는 객사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관아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부에는 교련관청을 비롯하여 안해루 등이 있었으며 지금도 돌로 쌓은 계단 20여개가 남아있어 삼도수군통어영을 관장하던 본영의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안해루의 누각 석주 4개중 2개가 현 위치에 있으며, 2개는 교동공립보통학교(현 교동초등학교)의 교문 기둥으로 사용하다 지금은 학교운동장 한 켠에 세워놓았다.



연산군적거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28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 읍내리 270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 독서의 부활 「국조보감」 「여지승람」의 간행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인 폐비 윤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계하는 이가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부근당
소재지 : 읍내리 255
읍내리 교동읍성 북문지 옆 부근당이라는 당집이 있으며 이곳에는 연산군(燕山君1476∼1506)과 그의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있다.

《강화사》에는 이곳이 ‘연산군유배지’라 기록되어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폐주가 죽은 섣달에 굿을 하였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도하(都下) 각 관부에 으레 작은 사우(祠宇)를 두고 여기에 지전등을 걸어놓고 부군이라 하여 제사지냈다. 새로 부임한 관원도 반드시 제사를 지냈고 법사에도 그러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원래는 부군[付=붙을 부. 君=임금 군]또는 부근[付=줄 부. 根=뿌리 근]이라 하던 것이 뒤에 부군[府=마을 부 君= 임금 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읍내리의 부근당은 특이하게도 [扶=도울 부. 芹=미나리 근]을 쓰니 관부에 두었던 사우(祠宇)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햇 미나리가 나면 제일먼저 임금께 바친다는 뜻으로 헌근지성(獻芹之誠)이라 했으며 헌근(獻芹)이라 하여 “윗사람에게 물건을 선사할 때나 자기의 의견을 적어 마음을 표현할 때”에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 근(芹)이란 자를 쓰고 있다.

변변치 못한 도움으로 연산의 넋을 위로한다는 선조들의 겸손에 표현으로 부근당(扶芹堂)이라 이름 짓고 연산군을 신(神)으로 모시고 폐주가 죽은 섣달에 당굿을 지냈으며, 섬처녀를 하나씩 골라 등명(燈明)하는 처녀봉공(處女奉供)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부근당 안의 액자에 걸려있는 초상화는 민화적인 그림으로 상단부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에 천연색의 구름이 날고 아래에는 병풍을 둘렀으며 병풍 앞 오른쪽에 붉은 곤룡포에 검은 신을 신은 왕이, 왼쪽에는 초록 저고리 붉은 치마에 초록신을 신은 왕비가 앉아있다.

두 손을 소매 깊숙이 넣고 앞을 응시하는 모습이 어느 평범한 대갓집 금실 좋은 내외간 같은데, 왕비 앞에는 분홍 옷을 입은 하여가 앉아있는 모습을 조그맣게 그려 넣었는데 이를 처녀봉공의 표현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박두성 생가터



화개사
분류 : 전통사찰
소재지 : (23001)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9 (읍내리)

고려때 창건한 목조건물로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교동면 상용리의 "갈공사"에서 묵고 있던 무학대사, 낙공선사, 지공선사가 이곳 화개사로 공부하러 다니던 곳이라 전한다. . 또한 고려시대 목은 이색 선생이 교동을 아주 좋아하여 화개사에 머무르며 수양하고 글을 지었다 하며 화개산을 전국 8대명산중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고구리 산성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30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145

고구리산성(화개산성)은 교동면 고구리 산14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화개산은 산세가 우뚝 솟아 마치 뚜껑을 활짝 벌려 놓은 것과 같다 하여 화개라는 명칭이 붙었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서 사방이 완전히 조망되는 관측상 매우 유리한 고지이다. 이 산성은 전체 둘레가 2168m에 이르는 규모가 큰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성은 그 둘레가 1013m로서 화개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데, 이곳은 절벽을 자연 성채로 활용하고 있으며, 내성의 일부를 북쪽으로 길게 빼어 긴 용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특징이다. 외성은 전체 둘레가 1155m 정도이며, 외성의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잡석만이 성벽 선을 따라 흩어져 있다.

외성의 성벽이 이처럼 많이 붕괴된 것은 1591년(선조 24)에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또 교동이 수군의 중심지로서 부각되었던 까닭에 육상의 산성은 그 규모에 비하여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37년에 산성을 개축하여 통어영의 신지(信地)로 삼았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화개산성은 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하여 사전에 준비된 병력 집결지였으며, 해상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하였을 경우를 대비한 육상 예비 진지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고 증개축에 관한 기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에 왜구의 침입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증축하고 성내에 군량고를 두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1737년에 다시 개축하고 군창을 두었다.

화개산성은 축성 재료와 규모의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문헌기록을 종합해 볼 때 꽤 규모가 큰 산성이었던 듯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석성으로서 둘레는 1565보이며 그 내부에 연못과 샘이 각각 1개소씩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리지들에서는 석축의 둘레가 3543척, 높이는 18척인 산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전국유적총람≫은 산성의 둘레를 2km로 표시하고 있어서39) 육군박물관의 실측 결과인 2168m와 가장 유사하다.


교동봉수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29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233

화개산봉수는 교동면 대룡리 산23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수는 화개산 정상 서쪽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며, 향토유적 제29호이다. 남쪽 아래로는 교동읍성과 남산봉수가 한눈에 들어오며, 동남쪽 멀리로는 덕산봉수가, 동쪽으로는 하음산봉수가 조망된다. 화개산성 정상과는 270m 거리에 있다.

화개산봉수는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다시 본도의 하음산봉수로 연락을 보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봉수군은 46명이었다.

봉수는 김포 백석산, 통진 수안성산, 강화 진강산, 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강화 하음산, 강화 송악산, 통진 남산, 김포 북성산, 양천 화개산을 거쳐 서울 남산 제 5봉(烽)으로 연결된다.


고목근현지
강화도 교동면 교동동로 293(고구리 286)


 조선시대 한증막
교동면 고구리 산 233번지
고구리 연산군 유배지 표석 뒤
 이 한증막은 조선후기에 축조하여 사용하던 민간 목욕시설로 소나무 가지 등을 이용하여 불을지펴 그열기로 한증을하던 목욕 시설이며 * 교동면에는 이러한 현존하고있는 시설물이 여러개소가 있다.

한증막 규모 둘레 15m 직경 45m 높이 3m .

교동향교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제28호
주요시설 :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소재지 : (23001)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읍내리)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실시와 학교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설치되기 시작한 향교는 조선시대 유교 이념의 보급과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전국적으로 확대 설치되었다. 교육기관이자 교화의 중심지로 시작된 향교는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과 향촌사회의 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향촌 사회 권력 변동의 중심에서 신분상승과 부역을 회피하는 통로로, 양반신분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지방의 각 군현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참고문헌]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교동향교지』, 교동향교, 2012. 인천시립박물관, 『교동향교소장자료조사보고』, 인천시립박물관 조사보고 제16집, 인천시립박물관, 2007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대룡시장
실향민들의 아픈 역사와 피난생활의 애환이 담겨있는 대룡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