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132
소재지 : (23028)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성을 쌓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조선 전기에 개축하였는데,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숙종 때 전면적으로 성을 보수하면서 동락천 건너 남산까지 포함시켜 크게 확대하였다. 북산, 남산, 견자산으로 이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7,122m이다.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暗門), 2개의 수문(水門)이 있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다. 장인대(丈人臺)라고도 불린 남장대는 1745년(영조 21) 강화유수 황경원이 세웠는데, 2010년에 복원되었다. 4대문 가운데 북문에는 원래 누각이 없었는데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올려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남문은 1955년에 문루가 무너졌는데 1975년에 복원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江都南門’ 편액을 썼다. 2003년 동문이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성문이 복원됐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성의 동쪽 부분은 많이 없어졌으나, 남쪽, 북쪽과 서쪽의 산자락 부분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들어왔고,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들어오는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참고문헌]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강화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2007. 강화군·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강화군·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강화군·인하대 박물관, 『강화산성 동문지 주변 도로개설구간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2002. 한울문화재연구원·강화군, 『강화산성 남장대지 유적』, 2011.
북문
. 강화산성 북문은 개경과 송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부근에 있는 오읍(五泣) 약수터는 하늘, 땅, 임금, 백성, 신이 울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강화 삼도직물터
김상용순절비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35호
소재지 : (23031)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416 (관청리, 오치과)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이다. 김상용(1561∼1637) 선생의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으로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 선생이 왕실의 종묘와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로 피난 온 이후 강화를 수비하던 지휘부의 안일한 전투 준비에 대한 지적과, 강화성이 청에 의해 함락되고 김상용 선생이 손자와 함께 남문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김상용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이 글을 짓고 김창집(金昌集)이 글씨를 써서 1700년(숙종 2)에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비문이 마모되어 1817년(순조 17)에 다시 세운 것이다. 구비와 신비의 내용은 차이가 없으나 후에 세운 비에는 새로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년도, 찬자와 서자의 이름이 첨부되었다. 신비를 세우면서 구비는 땅에 묻었었는데, 1976년 신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던 중 파묻혔던 구비가 발견되어 두 비를 함께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 인천사연구소, 『강화충렬사지』, 강화충렬사유림회, 2005. 강화군·강화문화원, 문화재청 홈페이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424
소재지 : (23031)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관청리, 대한성공회상화읍성당
문의처 : 934-6171
1900년에 한옥으로 지어진 대한성공회 성당이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고요한(Corfe,C.J.)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강화성당은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성당의 전체적인 건물 배치는 서쪽에 출입문을 두어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입구 계단, 외삼문·내삼문·성당·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성공회 강화성당 實測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韓國聖公會史槪觀』대한성공회출판부, 1980. 김정신, 「初期 韓國聖堂建築의 土着化에 관한 硏究」,『建築士』173호, 1983.
용흥궁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제20호
소재지 : (23031)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관청리)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元範)이고,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44년(헌종 10) 회평군(懷平君)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살았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용흥궁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왕이 되기 전 머물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는데 용흥궁은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른 뒤 궁으로 고쳐 부른 이름이다.
용흥궁은 처음엔 3칸짜리 초가였는데 철종 즉위 후 지금의 한옥으로 증축했다.
'如是我見 寫而不作 > 우리강 우리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 연미정 (0) | 2016.08.31 |
---|---|
강화 홍릉 (0) | 2016.08.31 |
강화 갑곶돈대 (0) | 2016.08.29 |
강화 답사 기본자료 (0) | 2016.08.14 |
경복궁 - 건천궁, 곤녕합, 소주방, 동궁일원 그리고 민속박물관 (0) | 2016.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