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미술관으로 올라가다가
솔동산 8경 안내 현수막을 보고
적당한 시간뒤에 만나기로 하고
솔동산으로 갑니다.
7월 10일
솔동산과 그 주변의 모습입니다
이중섭 미술관에는 들르지 않았지만
강용희선생이 발췌해온 이중섭관련 자료입니다.
이중섭, 제주에 오다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의 한 부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독립운동가 조만식이 세운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는다.
임용련은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한 수재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을 가르쳤고 이는 이중섭의 미술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대부분의 중학교 미술 교사란 일본에서 온 이들인데 반해 미국 유학에다가 유럽 화단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임용련의 존재는 확실히 이채롭다. 그의 미술 교육이 어떠 했는지 소상히 알 길은 없으나 이중섭으로 하여금 새로운 미의식에 눈뜨게 한 것을 보면 상당히 진취적 미감각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섭의 소질을 인정한 임용련은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며 일본유학을 권유하였고, 그는 스승의 말에 따라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민족적 정서를 가지고 있던 이중섭은 서양 미술의 화풍에 젖어있던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적응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동경문화학원으로 학적을 옮긴다. 그 곳에서 이중섭은 착하고, 따뜻한 여인이며 훗날의 아내가 되는 마사코를 만나게 된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자 1943년 혼자 원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봉직하기도 하며, 창작활동에 매진한다. 그러던 중 1945년 해방을 몇 달 앞두고 동경문화학원을 다닐 때 사귀던 마사코가 이중섭을 찾아 원산으로 찾아온다.
둘은 원산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이중섭은 이때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란 한국식 이름을 붙여 준다.
하지만 1946년 병으로 첫 아들을 잃고,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그의 인생은 참담한 고난이 이어진다. 이중섭의 집은 비행기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고,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다. 피붙이 하나 없는 부산에서 그는 몇 달 동안 부두의 막노동자, 운수회사의 인부노릇 등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다 1951년 1월 서귀포로 들어온다.
아마도 부산의 아우성 속에서 벗어나 안정되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을 것이다. 또한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 생활이 여유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곁들어 졌을 것이다. 하지만 피난민들의 아우성 치는 환경에서 그림은커녕 제대로 생활도 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 이중섭으로 하여금 부산을 탈출케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중섭은 서귀포항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초가집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적은 양의 배급과 고구마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 잡아온 게로 연명하였다.
비록 어려운 생활이 어어지기는 했으나 가족과 함께 있는 이중섭의 서귀포 생활은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평온한 눈빛을 지닌 소를 목격하고 다시 소 그리기에도 열중했다. 특히 이웃에 있는 잘생긴 소에 반하여 이를 열심히 그렸다. 또한 후일 벽화를 그리겠다며 갖가지 조개껍데기를 채집하기도 했다. 9월에 부산에서 열린 월남미술가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서귀포에서 그린 그의 작품으로 <피난민과 첫눈>을 비롯해 유화 <서귀포의 환상>, 그리고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이 있다. 배를 태워준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하나 이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10개월 남짓의 제주생활을 뒤로하고 이중섭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방황하는 날이 많았다. 게다가 어려운 생활이 계속 이어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제3차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고향인 도쿄로 떠나버린다.
이중섭은 1953년 일본으로 돌아간 아내와 가족을 만나러 가는데 이 때가 가족을 본 마지막이었다.
가족과 헤어진 이중섭은 전국을 떠돌며 방랑 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중 1955년에 처음으로 미도파 화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기도 한다. 그러나 전시회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거식증에 걸리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가족을 몹시 그리워하며 선과 면을 만들던 이중섭은 1956년 9월6일 가을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병원의 침상에서 마흔살의 일기로 세상과 이별한다.
<이중섭의 작품세계>
이중섭은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예민한 감수성과 순진무구함, 외곬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일본 유학시 보수적인 관학풍의 경향보다는 오히려 서구 아방가르드 회화에 깊이 빠지게 했다.
감정이 실린 격렬한 필치와 강렬한 색감, 날카로운 선묘로 이루어진 독특한 조형세계는 그가 야수파 화풍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과 재능은 단순히 서양어법을 모방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그를 키워준 향토의 숨결과 희망을 담게 했다. 초기 작품에서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나 그 뒤로는 피난시절 가족과의 생활,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 등 생활일기와 같은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의 예술세계는 철저하게 자신이 처한 삶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 개인적 삶의 고뇌를 지극히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냄으로써 한 시대의 아픔을 극명하게 나타냈다. 동시에 서양미술의 어법을 완벽하게 소화·흡수하여 개성적인 조형을 성취함으로써 한국미술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특히 원산에서 그린 현존하는 소묘를 비롯하여 가족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표현한 후기의 은지화는 자유자재한 선묘와 심도있는 정서적 표현력을 보인 탁월한 작품이다. 작품으로는 〈흰 소〉·〈투계〉·〈닭과 가족〉·〈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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