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희 선생이 발췌해온 자료
서복과 제주
서귀포에는 지명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오는데 고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소망을 이루고자 서복을 보내 불로초를 가져오라고 하자 서복이 제주도 조천포로 들어와 불로초를 구한후 서귀포에 와서 정방폭포 바위에 서불이 지나갔다는 의미의 서불과차(徐巿過此를) 새기고 떠났다고 해서 서귀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방폭포 바위에서불이 새겼다는 이 글자는 조선 말엽까지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후 암각화는 폭포 위 전분공장의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제주 향토사학자이자 한학자요, 서예가였던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1885~1956년)이 지은 파한록에는 ‘서귀포 해안 절벽에 진나라 방사인 서불이 새겨 놓았다는 글자 흔적이 있는데, 조선시대 백낙연 제주목사가 이러한 전설을 듣고는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그려오게 하여 탁본 한 글자를 살펴보니 전부 12자 였는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과두문자'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파한록’은 고려~조선 제주의 문벌, 교화. 고적. 풍속 전반을 기록한 야사(野史)로 ‘탐라기년’에 담을 수 없었던 제주역사를 보완한 책이다.
서복은 기원전 255년에 제(齊)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사기》(史記)권6 진시황본기 및 권118 회남형산열전(淮南衝山列伝)에 따르면, 기원전 221년에 6국을 복속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이후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이에 서불은 기원전 219년(진시황 28년), 시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齊人徐市等上書言 "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
제(齊) 사람 서불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이에 서불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
— 《사기》(史記)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又使徐福入海求神異物,還為偽辭曰:『臣見海中大神,言曰:「汝西皇之使邪?」臣答曰:「然。」「汝何求?」曰:「願請延年益壽藥。」神曰:「汝秦王之禮薄,得觀而不得取。」即從臣東南至蓬萊山,見芝成宮闕,有使者銅色而龍形,光上照天。於是臣再拜問曰:「宜何資以獻?」海神曰:「以令名男子若振女與百工之事,即得之矣。」』秦皇帝大說,遣振男女三千人,資之五穀種種百工而行。徐福得平原廣澤,止王不來
또한 서복(徐福)으로 하여금 바다에 들어가 신선에게 기이한 물건을 구하게 하니, 그는 돌아와 거짓으로 말하기를 "신(臣)이 바다 속의 커다란 신(神)을 만났는데, '네가 서황(西皇)의 사자냐?'라고 묻기에 신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묻기에 '수명을 연장시키는 약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신은 '너는 진왕(秦王)의 예(禮)가 박해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 취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로 신을 데리고 동남쪽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으로 갔습니다. 영지초(靈芝草)로 이루어진 궁궐이 보이고 사자가 있었는데, 구릿빛에 용의 형상이었으며, 그 광채가 하늘까지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재배(再拜)하고 '마땅히 어떤 예물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묻자 해신(海神)은 '양가집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의 제품을 바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라 했습니다. 진시황은 크게 기뻐하며 동남동녀 3천명을 보내고 오곡의 종자와 여러 장인들의 만든 것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서복은 평평한 들판과 넓은 못을 얻자 거기에 머물러 왕이 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사기》권118 회남형산열전(淮南衝山列伝)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서복과 관련한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을 제주로 설정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삼신산에 대한 기록은 어떠할까? 사마천(BC 145∼86)의 사기에는 ‘제위왕(齊威王), 제선왕(齊宣王), 연소왕(燕昭王)때부터 사람들을 시켜 바다로 가서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찾도록 하였다.
이 세 개의 신산(神山)은 전설에 의하면 발해(勃海)의 가운데 있었고, 인간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선인들은 머지않아 배가 도착할 것이 걱정이 되어 얼른 바람을 이용해서 배를 떠밀어 버렸다. 일찍이 그곳에 갔다 왔던 사람이 있는데 거기에는 많은 선인들과 불사약이 있다고 하였다. 궁궐은 모두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곳에 아직 도착하기 전에 멀리서 바라다 볼 때는 온통 운해(雲海)처럼 떨어져 있었지, 막상 그곳에 이르고 보니 세 개의 신산은 오히려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으며, 안쪽으로 배를 대어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이상한 바람 때문에 배가 떠밀려 끝내 그 곳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사서에 따르면 삼신산은 진시황뿐만아니라 그 앞전의 전국시대 인물들인 제위왕, 제선왕, 연소왕들도 삼신산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담고 있는 삼산산의 내용은 인간세상과는 다소 유리된 묘사를 하고 있다. 선인과 불사약이 있고, 짐승들은 흰색이고, 궁궐은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고 있다. 물속에 가라앉아 있고, 가까이 가면 이상한 바람이 불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다. 인간세상과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여기서 설명되고 있는 내용들은 오히려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형태의 이미지를 준다.
특히 그곳에 갔다왔다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신비감은 증폭되고, 불사약까지 있어 못가본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가고 싶은 공간이다.
‘사기’보다 300여년 후대의 사서인 진수의 ‘삼국지’ 오서(吳書) 손권전(孫權傳)에는 삼신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러 장군을 파견하여 무장한 병사 1만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단주는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진나라 시황제가 동남동녀 수천명을 서복과 함께 보내어 봉래(蓬萊)의 신선과 불사약을 구하도록 했는데, 이 주(州)에 이르러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수만호가 되었고 그 땅(단주)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회계(會稽)로 와서 베[布]를 샀고 화계 동야현(東冶縣)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다가 태풍을 만나 단주까지 표류해 갔다. 이처럼 먼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장군들은 도달할 수 없었고 단지 이주(夷州)의 수천명만 데리고 돌아왔다.’
이처럼 삼신산에 대한 기록은 막연한 부분이 없지않고 신성하게 여겨지게 되면서 학자들이나 연구자들마다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과거에도 조선의 학자들은 삼산산을 태백, 지리, 한라산(또는 금강, 지리, 한라산)을 지칭한다고 보았고,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에 있는 것으로 여겼다.
심지어 중국의 학자들은 해남도라는 주장도 하고, 동중국해의 어느 섬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이처럼 삼산산의 위치가 특정짓지 못하게 다양하고, 그 묘사도 인간세계와 유리된 부분 등으로 볼때 삼신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도솔천처럼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이상향 속에 존재하는 동경의 공간이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서복전시관에는 두 번에 걸친 불로초 대장정을 ‘서복의 1·2차 동도(東渡)’로 표현하고 있다. 기원전 219년 1차에 이어 2차 동도는 210년에 이뤄졌다. 1차 동도는 산동성에서 요동반도로 건너 한반도 서쪽 해안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진도를 거쳐 최종적으로 제주 금당포(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도착했다. 제주로 오는 도중 진도 부근에서 선단이 둘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탈한 세력이 지금의 남해와 거제방면으로 진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차 동도 때는 지금까지도 조선해운업으로 유명한 절강성 영파(寧波) 지역에서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이곳 서귀포 서복전시관에서 전시돼 있는 서복의 1차 동도 항해의 항로가 바다가운데 섬을 찾는 항로가 아니라 한반도 서쪽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서복일행이 삼산산을 전설이나 신화속의 공간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복일행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항로가 아니라 제주방향이나 일본, 또는 그 당시 삼신산의 위치로 알려진 방향으로 항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삼산산이 이상향의 공간이라고 해서 서불이 제주에 오지 않았고 이는 사실이 아닌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2200여년 전 서복은 시황제가 원하는 불로초를 찾기위해 당시 동경의 대상이었던 삼신산이라는 이상향의 공간을 제시했고,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하다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듯 동쪽으로 항해를 하다가 찾아온 곳이 제주도 였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일단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바탕으로 한 팩트는 동남동녀 수천명을 거느린 서복 일행이 불로초를 찾으러 나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진시황의 불로장생 묘약을 찾기위해 서복 일행이 떠난 삼산산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는데 다만 발해 가운데 있다고 적고 있어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 임을 추정할 뿐이다.
어쨌든 서복일행은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두번에 걸친 항해를 시작한다. 중국을 떠난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그의 여행에는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 하지만 기원전 210년 두 번째로 출항에 나선 서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의 첫 출항지에 대해서는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에서 저장성(浙江省)에 이르기까지 여러 설이 있는데 허베이성(河北省) 진황도(秦皇島), 저장성 닝보시(寧波市) 츠시시(慈渓市)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서복의 흔적들>
서불의 불로초를 찾기위해 시행한 두차례에 걸친 항해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제주와 남해안, 그리고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문화적 교류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불로초를 찾으라는 진시황의 명에 따라 한반도 서해와 제주도에 이어 남해를 찾은 서복이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는 양아리 석각(일명 서불과차) 전설과 더불어 서불일행이 도착한 곳이 남해의 영악인 보타산, 즉 지금의 금산 산하 앵간만과 조용한 포구 벽련포와 두모포라고 하며, 진시황의 장자로서 부소의 전설이 담긴 남해 금산 서남편에 있는 부소암에 대한 논의가 몇 년전부터 시작됐다.
또한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서복의 또 다른 이름)과 동남동녀 수백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지리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너무 차가워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거제시에서도 서복이 불로초를 캐러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해금강일대에 왔었고 일운면 와현리 일대에서 유숙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서복 관련한 스토리는 이처럼 한국내에서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으며 일본에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일본에서도 미야자키현(宮崎県)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서불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오모리 현(青森県)에서 가고시마현(鹿児島県)에 이르기까지 일본 각지에 서복과 관련된 전승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사가현(佐賀県) 사가시(佐賀市), 미에현(三重県) 구마노시(熊野市) 하다스정(波田須町),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신구시(新宮市), 가고시마현 이치키쿠시키노시(いちき串木野市), 야마나시현(山梨県) 후지요시다시(富士吉田市), 도쿄도(東京都) 하치조섬(八丈島), 미야자키현 노베오카시(延岡市) 등이 유명하다.
조선시대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천황으로 분류되는 고레이 천황(孝霊天皇) 때에 불로불사약을 찾으러 온 서복이 일본의 기슈(紀州)에 닿았으며, 스진 천황(崇神天皇) 때에 죽어서 신이 되었고 일본 사람들이 서복을 제사지냈다는 전승도 있다.
서복은 지금의 가고시마현 이치키쿠시키노시에 상륙하여 아사타케(冠嶽)에 자신의 관을 봉납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아사타케 신사(冠嶽神社)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서복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산동성 용구시에는 서복의 사당이 있으며 저장성 츠시시에는 2000년 3월30일에 서복기념관(徐福記念館)이 개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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