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8. 09.
제주의 마을 답사 2회차
귀덕리 집중탐구
제주역사문화연구소
송장환
귀덕리 마을유래
예전에는 石淺村(석천촌)이라 불리웠다.
모살개 북방 0.5km 해상에 自然熔岩島嶼(자연용암도서)가 2개 있는데 이를 "큰여""작은여"라고 부르며 이 마을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이것을 이름하여 "石淺島(석천도)"라고 불렀으며 마을 이름을 "석천촌(石淺村)"이라고 불렀다.
西記 1212(高麗 熙宗 7)年에 제주에 현(縣)을 설치하면서 石鏡村(석경촌)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서기 1300년 고려 충렬왕 16년에 제주도에 본읍 동서에 14현(縣)을 설치할 때 중국(中國) 중경(重慶)지방의 명을 따서 귀덕현(歸德縣)으로 이름지어 불렀다 한다
현재의 1리는 모살개와 들덕이라 불리었고
2리는 쉐못개와 진질코지이다.
3리는 자연마을인 머흘왓과 한다리를 통합하여 새로 흥성한 마을이라는 데서 신흥동이라고도 불리었다.
서기 1609년 기서(己西) 광해원년(光海元年) 제주판관 김치(金緻)가 현제(懸制)를 폐지하고 방리제(坊里制)를 실시하면서 귀덕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서는 귀덕리를 4개 구(區)로 분할하여 리장 산하에 구민제(區民制)를 두었으며
1區에는 사동, 하동, 중동을
2區에는 장흥동과 장라동을
3區에는 성로동과 신서동을
4區에는 마흘동과 다교동을 합하여 행정을 구분하였다.
1953년 10월 장흥동 장라동이 귀덕2리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통합되었으나 1960년 또다시 귀덕2리로 분리되었으며
1963년 당시에 귀덕 4區인 마흘동(머흘왓)과 한교동(漢橋洞,多橋洞))이 분리되어 신흥리(新興里)로 불리어 오다가 1997년 귀덕3리로 개칭되었다.
마을답사
1. 정짓내
2. 큰여 거북이 등대
3. 豊麗水
4. 동포구
복덕포구라고도 한다.
제주도 巫俗社會에서 '영등신'이 음력 2월 초하룻날 들어왔다가 보름날 떠난다고 한다. 그 '영등신'은 '복덕개'로 들어왔다가 우도로 나간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영등신화에 나오는 복덕개가 이곳이 아니고
지금은 없어진 수원리 영등당앞 바닷가라 한다.그곳은 포구이름이 변천되었고 이곳은 비슷한 이름이 남아서 이곳으로 착각되는 것인데
설화속에서는 조물캐복덕개라 나온다.
(최근 수원리 영등하르방당에서 영등제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몇 년전 까지도 귀덕에서는 영등에 관한 신앙행위가 없었다.
마을상징도 영등과 관계없는 거북이등대이고
이곳 귀덕리 당도 영등을 모시지 않았다.
'영등신'은 그 해의 바다밭은 물론 뭍의 밭에 뿌려질 씨앗을 가지고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복덕'은 특정지역의 포구명칭이 아닌 福德을 가지고 들어오는 개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5. 환해장성(추정)
해안도로변에 약500m 정도가 남아 있는데, 성 위의 폭은 1m쯤 되며, 성 안쪽에는 폭 1.5-2m, 높이 1m 정도의 회곽도(군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가 남아 있어 환해장성의 축조 양식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배수구가 있는 것이 이채롭다.
6. 큰이물
표고 1.3m, 용암류경계형에서 나오는데 하루 평균 3,183입방미터의 용출량을 자랑하는 큰 물이다. 2011년까지는 샘이 흘러나오는 돌 아래 쪽 샘 주변은 사각형으로 구역을 만들었고, 물이 흘러나가는 곳은 좁은 수로처럼 되어 있었고, 샘의 서쪽에는 현무암 자연석을 2단으로 쌓고 그 위에 시멘트 블록을 3단으로 쌓아 담장을 만들었었다. 담장 서쪽으로도 물길이 나 있었다. 지금은 샘솟는 바위는 예전 그대로이고, 물이 모였다 내려가도록 넓게 2구역으로 만들었다. 가운데를 막았던 담장은 없앴다. 크니물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 는 크니물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현무암 자연석을 이용하여 옛모습을 복원하려고 노력했다고 되어 있다.
두 개의 바위 사이에서 용천수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윗 바위는 점성이 높은 용암에서 만들어졌고, 아랫용암은 이와 다른 용암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라일보 120718)
7. 귀덕본향당 해모살당
2005년 9월에 당집을 새로 지었다.
그 이전에는 돌로 쌓은 울타리 안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었고
제단위에 궤를 두곳 설치해 두었었다.그리고 당굿을 드릴 때 천막을 칠 수 있도록 철골로 지붕을 해 두었다.
본향당 앞 표석에 쓰여있는 당의 약력.“당초 쿠리쿠리(購伊舊伊) 일대에 사람이 살면서 멀왓 입구(당밭 2511번지 경) 부근에 있었다는 설이 있고,
漁業을 하면서 선왕댕이(2733번지 경)에 船王堂을 모셨다 하나 합쳐진 내력은 알 수 없다.
1702년 경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부임하면서 신당철폐령이 내려져 당수덕(3242-1번지 경)으로 옮겼다가
해안의 현위치인 屯地(1031-3)에 오면서 둔지당으로 불렀다.
처음 宋氏할머니가 좌정했다 하여 ‘귀덕할망당’으로 호칭되어 이 지역 및 실향민들의 情緖를 기려오던 중
북제주군의 토속신앙 中興과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현대식 건물과 제단을 설립,
후세에 지역민 및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의 마음의 정서와 안정을 위하고자 하며
祭日은 每年 陰曆 정월 입춘 후 첫未일에 귀덕 1,2,3리 마을회와 1,2리 어촌계 합동으로 奉行하고 있음.
2005년 9월 歸德里民 一同 謹竪”
8. 됫물(옛 사진)
용출 지점 주변이 됫박 형태를 하고 있어 이 모양을 보고 되물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2012년 후반기에 물이 솟아나는 곳을 둥글게 바꾸고 돌담의 높이도 50cm 이상 높였다. 물이 흘러내려가는 주변 돌도 기계로 깎은 돌을 평평하게 깔았고 계단도 고쳤다. 그 이후 대물이라 불리운다.
용출량은 1일 평균 3,580㎥이지만 용천수 주변 여러 군데에서 분산되어 많은 양이 용출되고 있다.
수온은 평균 15.7℃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주민들의 생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
9. 귀덕1리 포구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어서 모살개라고 불리웠다.
그래서 이 일대 동네이름이 사동沙洞이다.
참고사항 : 1908년 제주의병항쟁과 관련하여 1909년 3월 3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총살되었고, 의병 참모 김석명은 동광양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중심은 조인관·노상옥 등과 더불어 귀덕 포구에서 육지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포구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10. 귀덕연대터
귀덕초등학교의 북쪽 울타리 부근에 명월진에 소속되어 있는 연대로
동쪽의 애월연대와 서쪽 귀덕2리의 우지연대와 교신했다고 한다.
비석들은 학교개교후 보수에 도움을 주신분들의 기념비이다.
북제주문화원에서 세운 안내비에 의하면동쪽 애월연대와 서쪽 우지연대와 교신하였으나
애월연대와 우지연대가 서로 교신하면서 필요성이 없어져
연대터에 월대를 구축하여 망해대라 이름짓고 시인묵객들이 교류하던 장소로 쓰던중 1940년 4월에 귀덕초등학교가 개설되면서 학교뒷뜰에 편입되어 그 흔적은 사라졌다고 한다.
11. 귀덕1리마을회관앞 독립투사 항쟁기
마을 출신 항일 독립투사들의 이름과 간략한 항쟁기 조대수, 홍원표, 김대원, 고태리, 홍성옥, 고경수
- 각종 송덕비
12. 절골 구정사지
고려말까지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 70명에 이르는 큰 절이었다는
구정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곳이다.
귀덕리 사지에서는 기와편과 도자기편 들이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기와편은 암·수 기와가 고루 확인되었으며 등문양은 어골문 계열의 복합문이 주종을 이룬다.
기와 중위와 나뭇가지와 같은 형태의 문양이 ‘x’ 자 형으로 교차되어 표현된 종류, 격자문이 표현된 종류, 불상의 광배와 같은 나뭇잎 형태의 문양이 결합한 종류 등이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 절골 기와편과 도자기편
도자기는 청자와 도기가 출토되었다.
대접, 접시, 잔, 호 등의 기종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형태를 알 수 없는 파편들이다.
상감 기법을 이용하며 학의 무늬와 여의두 무늬, 그리고 뇌문(雷文), 연판문(蓮瓣文) 등을 장식한 양질의 강진산 청자와 무문의 조질 청자도 함께 확인되었다.
검은색을 띠는 철화 안료도 장식한 편도 확인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도자기편은 대부분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들이다.
현재 경작지로 조성되어 있으며 수차례의 경작지 조성 사업으로 인해 유물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향토 문화사전)
13. 향사/은진의숙터
구한말까지 도가라고도 불리우는 향사가 있던 곳으로 일제강점 후 개량서당으로 운영하다가 1920년에 은신의숙을 설립하여 보통교육을 받을 수 없는 일반 서민 자제들에게 한국어, 한문, 일본어, 산술 등을 가르치는 초등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은신의숙에는 적을 때는 20명에서 많을 때는 60명 정도의 학동들이 다녔는데 주로 남학생들이었다.(2008 제주여성문화유적)
14. 잣질
폭 2~3m, 높이 1~1.8m의 잣질은 마을 안길과 안길을 이어주고 있으며 잔돌을 성담처럼 쌓아 매우 견고하다고 한다.
사실 이 마을 주변에 있는 밭을 보면 흙보다 돌이 많음을 쉽게 볼 수 있다. 크기 5㎝ 내외의 자갈들이 밭을 완전히 덮어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밭을 개간 하면서 일구어 낸 돌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밭의 경계를 만들어 넓게 쌓아 돌담위로 걸어 다니게 되면서 이 길을 ‘잣질’, 이 마을을 ‘잣질동네’(城路洞)라 부르게 되었다.
- 잣질동네입구 옛 천주교 건물.
15. 연라못/연하못
설촌 당시에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밭작물 모두의 생명의 젖줄이었다.
현재는 연못 주변에는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고 입구도 막혀 있다. 꽤 높은 돌담이 연못 울타리를 두르고 있지만 길이 매립되다 보니 노면과 비슷한 높이가 되어 버렸다. 연못 위에는 그물을 쳐 놓았다. 수면에는 여러 가지 쓰레기들이 떠 있고 물이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요즘에도 가뭄이 들면 이곳에 양수기를 걸어서 물을 실어가기도 한다.
전에는 이 연못에서 물이 솟았기 때문에 이 물을 이용하여 3000여평의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물의 동쪽으로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습지 동쪽 밭에서부터 점차 매립하는 과정이다.
16. 조군성시혜비
조군성씨가 자기 밭을 내놓아 연못을 파도록 한 것을 고맙게 생각하여 세운 비석이다.
비석 앞면 趙君聖施惠碑, 앞면 우측 義捐畓田 掘井水湧, 앞면 좌측 家?蒙惠 永世不忘, 뒷면 里民一同, 우측면 紀元二千六百年五月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紀元二千六百年은 일본기원으로 서기로는 1940년이다.
‘趙’字는 글자 부분을 파내어 다시 새겼다.
17. 조인철 효자비.
趙仁哲은 歸德人이라.
어려서부터 孝行으로 稱하더니
父母喪埋코 그 墓所에서 慰靈寬人을 3년을 지내니
鄕民이 感動하여 上典하여
孝子完文을 내리우니
高孫明允이가 귀덕리 長興洞 路上에 旌閭를 建立하다.
(출처 : 한림읍지)
1941년도에 세운 비석이다.
18. 신서동(새시멀)
옛날 소랭이왓(士郞田) 부근 쿠리쿠리(舊伊舊伊=쿠리초)란 마을과 횡개못(黃鶴池)부근에 마을이 있었으나
서쪽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하여 새시멀(新西洞)이라 부른다.
19. 김명집효자비.
도광 신축년(헌종7년, 1844)에 제주목사로부터 부역과 잡역을 면제받았다는 내용으로 이 비석은 1925년에 세운 것이다.
비의 앞면 "孝子金明集之閭“
오른쪽에 "道光辛丑后八十四年甲子竪"(도광신축후84년갑자수)
뒷면에
"慶州后人曾自幼穉之稟性至孝懷橘之奉扇枕之誠□不用極而其父病篤殆至氣絶斷其左指以血和脈因得回甦久得生存之黨欽仰面里咸嘆去道光辛丑具由牒報于本牧則嘉其卓行不送完文烟戶雜役幷傾世遠年久念其泯跡玆立棹楔焉"라고 새겨져 있다.
20. 참랑거리 비 석군
- 김광삼처 최씨효열비
가난하게 살던 한 여인이 더 가난한 김광삼에게 시집왔으나
남편이 시모와 아이 둘을 남기고 27살에 죽으니
고생고생하며 시모를 봉양하고 아이를 키우던중 시부기일에 제수가 없어 고민하던 중
이때 날아가던 매가 꿩을 쳐 떨어뜨리고 가니 이것으로 시부의 제사를 지냈다.
마을사람이 하늘의 도움이라 감탄하여...
- 處士金孟元妻貞烈金氏之閭
김씨는 김맹원의 처이다.
시집온 지 1년만인 나이 20에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애통함이 그지없었다.
삼년상이 끝나는 날에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시부모가 울면서 달래기를 '네가 만일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목숨을 보전하겠느냐?' 하므로,
김씨는 뉘우치고 딴 마음 없이 힘을 다해 시부모를 공양하다가
돌아가시자 예제(禮制)를 다하였는데 삼년상이 지난 뒤에 목을 매었다.
사람들이 여러 번 그의 정절을 천거하므로 군수가 가상히 여기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삼강록에 수록되었다.
(2001 탐라의 효자열녀전)
- 애국지사 현주순충혼비
21. 궤물동산 궤물
22. 원담
이 마을에 원담이 열 곳 넘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는 지금 그 형태와 이름이 사라지고 있다.
보통 1.5m의 높이로 원담을 축조하면 밀물에 물고기가 들어오는데
어종은 주로 멸치, 독가시치, 벤자리 등이었고
썰물때 물이 빠져 갇힌 물고기들을 족바지를 이용하여 잡았다고 한다.
23. 병단물
망대에 주둔 했던 병사들이 마신물이라하여 병단물이라 한다 하나 주변 무덤에 兵單伊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뜻은 확실치 않다.
주민의 말로는 옛날에는 이 물이 워낙 좋아서 모두 이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24. 소금밭 물통
이 일대에 해안도로가 만들어지기전 꽤 큰 소금밭이 있었다.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열두물에서 네 물 사이 약 3일 간, ‘당그네’라는 나무 연장을 이용 소금밭의 모래를 밭갈이 식으로 갈아 놓고 뙤약볕에서 풀이하여 갈아엎으면, 소금함수를 품은 농축 모래가 되는데,
이 모래를 높은 지대의 모살터로 옮기고 덮개를 씌워서 비바람을 막아 보관해 두었다. 날씨 좋은 날을 골라서 ‘서슬’이라는 침전 장치에 넣고 바닷물을 저장해 두었던 저수지에 해수를 길어다 붓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서슬 밑에 있는 웅덩이로 농도가 높은 함수인 곤물이 흘러내린다.
이 곤물을 가마솥에 놓고 하루 정도 열을 가하면 소금이 되는데
이 소금을 제주 전역으로 돌아다니면서 팔아서 생계를 이끌어갔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5. 진질개 도대불
진질개는 포구 왼편에 자리잡은 ‘진질코지’가 축이 되어 ‘안캐’, ‘중캐’, ‘밖캐’로 축조되어 있다. 진질개 정면에는 ‘검은여’와 ‘가시린여’가 있다. 이 사이에는 ‘조기빌레’라는 수중암초가 있어 파도의 거센 흐름을 막아준다. 포구 오른 편에는 도대불이 남아 있다
외벽은 현무암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속은 잡석채움을 하였다. 윗부분에는 호롱불을 놓기 위한 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관망을 겸할 수 있도록 윗면이 넓게 되어 있다. 이 도대불은 크게 대를 이루는 부분과 등화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를 이루는 부분은 진질개 주변에 높은 지형이 없는 탓인지 가급적 높게 쌓으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처음부터 밑지름을 크게 잡고 석축하였다. 이는 윗부분이 허물어진 상태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윗부분의 대는 긴 나무를 이용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나무를 이용하여 어른키 정도되는 높이에 등화도구를 넣고 불을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불을 켜거나 관망시에 위로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1966년 마을에 전기가 가설된 뒤부터 귀덕리 도대불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상단부가 훼손되어 있던 것을 1985년 포구가 확장될때 다시 쌓았다.
26. 귀덕 2리 회관앞 광장
마을이름을 ‘진질’(長路)마을이라고 부른다. 포구에서 잣질동네까지 이어지는 진질이 있고 방파제를 떠받치는 코지 이름도 ‘진질’이다. 포구 이름은 ‘진질개’이다. 진질개는 주변의 지형을 충분히 활용하여 만들었다. 포구 왼편에 자리잡은 ‘진질코지’가 축이 되어 1985년부터 시작된 방파제가 이어진다. 100m가 족히 되는 이 코지는 포구의 버팀목인 셈이다.
27. 해운사 앞 굼둘애기물
바위틈에서 생수가 솟아오르는데 물이 풍부하고,
여름철과 백중날 이곳에서 목욕하면 잔병이 없어지는 약수이다.
옛날 귀덕 앞바다에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물고기인 인어(人魚)가 살고 있었다.
인어는 낮에는 바다 속에서 헤엄을 치며 놀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면 마을 앞 큰여에 올라가 쉬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인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피해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보아도 못본척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덕리앞바다로 커다란 물고기들이 몰려왔다.
바다 속에서 여유롭게 헤엄을 치던 인어는 큰 고기들의 습격을 받고 쫓겨 다니다가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큰여에 올라 숨을 돌리던 인어는 만신창이가 된 자기몸을 치료하러 사력을 다해 약수가 나오는 라신동앞 용천수로 다가왔다.
인어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용천수에 몸을 던져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인어가 마을 앞에 모습을 드러낼 당시 용천수 주변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빨래를 할 때였는데 상처입은 인어가 나타나자 자리를 비켜준 것이 었다.
긴 시간동안 상처를 씻으면서 마을사람들이 다가왔다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인어는 그동안 자신의 모습을 마을사람들이 보았으면서도 해꼬지않하고 위해주었음을 알게 된다.
인어는 마을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를 느끼게 되어
마을을 향해 고맙다고 인사를 꾸벅꾸벅 올리고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이 용천수에 몸을 씻은 사람들은 신비하게도 잔병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부터 인어 대신 거북이가 바위 위에 올라와 마을을 향해 인사하고
물속을 노닐다가 바다를 향해 떠나가곤 했다곤 한다. 이렇게 이물에 거북이가 나타나는 해에는 라신동에 경사가 생긴다고 한다.
굼둘애기란 제주어는 물오리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바닷속으로 재빠르게 들어가는 모습을 뜻한다는데
인어가 물오리처럼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하여
이물을 굼둘애기라 부른다.
28. 라신동 소못(牛池)
「제주삼현도」에서는 잠수촌과 귀덕촌 사이에 우지포가 있다고 가록하고 있다.『탐라지』에서는 제주목 안에 있던 일곱 개의 우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지는 그 중 하나의 우물이다. 이 우물은 제주성 서쪽 53리에 있고, 귀덕포는 제주성 서쪽 5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덕포에서 서쪽 3리에 우지가 있다는 말이다.
일부는 금들애기물이 원래의 소못이라 하고
일부는 용운동포구에서 나는 물이 소못이라 한다.
29. 우지연대
주민들은 이곳을 ‘망밭’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연대는 1976년 복원한 것이다.
테두리에 심석을 엇물려 놓은 후 돌로 쌓아올린 사각형구조물위를 평평하게 마감하고 층계 오르는 부분을 제외하고 돌담을 한번 더 둘렀다.
이 연대의 원 모양은 타원형이었다고 한다.
4.3전 까지는 원형이 남아있었는데
4.3당시 마을성담을 쌓을 때 허물어서 가단만 남았다가 1975~6년경 제주의 연대를 일차복원할때 전부 같은 모양 사각형으로 쌓아올렸다
원형을 바꾸는 복원을 할바에는 무너진 상태 그대로 기단만 남겨놓았다면 더 좋았을 듯 하다.
30. 통정 김려관처 효열이씨지려
氏全州后人也年若冠幷歸于金氏之門以事親之孝孝於舅姑以如賓之敬敬於夫子■■■■不失尺寸人莫不敬而禮之年?二十四生一子十?月所天奄逝幾欲滅性而顧念■禮無托幼孤無依斷乎反省强起■事喪葬祭奠一遵家禮不言不笑天禮終三年家勢本窮■成富統倫中行實聞於遠近全南有司及多士嘉其卓行以所薦報完文至矣歲月久遠惑有欠闕綽楔之典坎刻著片碣建玆碑閭焉 年七十八而終 檀紀四二八八年三月日 子景平 謹竪
31. 귀덕 3리 : 신흥동시절의 공덕비
32. 귀덕3리 마을성담
위치 ; 한림읍 귀덕3리 58번지. 귀덕3리 4거리 신호등 동쪽 50여m 지점 남쪽
4·3 당시 귀덕리는 한림면에서 가장 넓은 마을로 4구(區)까지 있었다. 귀덕2구는 바닷가에 접해 있고 나머지 1,3,4구는 바닷가에서부터 중산간까지 이어져 있었다.
귀덕리에서 4·3 관련 첫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총선거 다음날인 1948년 5월 11일이었다. 토벌대는 귀덕 주민들이 거부하여 선거를 치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분풀이를 하려는 듯이 마을을 포위하고 총을 난사했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도망쳤으나 4명이 붙잡혔고 그 중 3명이 속칭 '소주웨궤'에서 총살되었다. 김원석(31세), 조상옥(27세), 윤모씨가 숨졌고, 15세 정도였던 홍길옥씨는 도망쳐 살아났다.
당시 한림면은 마을별로 성담을 쌓지 않고 면 전체의 남쪽을 가로질러 쌓았고 귀덕리는 성안에 들었기 때문에 소개에 따른 피해는 없었으나 무장대가 해안 마을을 습격한 다음부터는 토벌대의 보복학살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귀덕리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2월 3일 무장대가 금능리를 습격한 다음부터였다.
1948년 12월 5일 귀덕4구 청년들을 향사에 집합시켰다가 그 중 일부인 이창봉(26세 남), 강정송(25세 남), 강창오(25세 남), 김일수(25세 남), 강천부(19세 남)씨 등을 한림국민학교로 끌어가 12월 9일에 대림 지경의 속칭 '봉근이굴'에서 총살하였으며, 12월 7일 김백근(38세 남)씨가 토벌대에 총살되었고, 12월 11일에는 양재수(37세 남), 고덕봉(23세 남)씨가 한림국민학교로 끌려가 총살되었으며, 12월 14일에는 김재평(33세 남)씨가 서청특별중대에 끌려가 총살되었다. 12월 18일에는 김여옥(29세), 이연보(22세), 이원석(22세)씨가 총살되었다.
귀덕3리에 남아 있는 이 성담은 장성의 동쪽 끝 부분이다.북쪽으로 금성천 중간 지점까지 이어졌었다고 한다. 너비는 2m를 넘는 규모지만 일부는 헐어 버린 곳이 있고, 높이는 어른의 허리 정도에서 가슴 정도까지만 남아 있다.
33. 馬屹洞과 漢橋洞
馬屹洞은 높은 지대에 말(馬)들이 많은 남쪽 동네라하여 멀왓이라고 불리며 한교동은 마을 모양이 하늘에 닿은 다리(中天多橋)와 같다하여 한다니(多橋洞)라 불렀고 지금은 한교동(漢橋洞)이라고 부른다.
끝.
참고 : 영등하르방, 영등할망
문헌(설화적 내용)
煙燈節 諺傳 大唐商人 漂沒於州境者 四?分解 頭骨入於魚登浦 手足入於高內涯月明月等浦 故每年正月晦時 百風有風自西海來則 謂之迎燈神降矣 沿邊居民聚群巫作野祀 夜以繼晝 造?形如馬頭者 飾以彩帛 作躍馬戱 以娛神 至二月旬望 又造舟形具帆檣 汎于浦口 謂之送神 是時風自東北來則謂之燃燈去矣 自二月初吉于望後絶不放船 又俚語以爲燃燈神每於正月晦日入牛道 採食海族 翌日登陸地于十六日 復自牛島出去而所過沿邊蚌蛤螺蠣之屬 盡爲空殼乃燈神所採食者云. 心齋 金錫翼, 『海上逸史』 燃燈節條
김석익의 연등절煙燈節에 관한 글
“당나라 상인이 제주 근경에서 표류해 빠져죽었다고 하는 데서 시작한다. 시신이 네 부분으로 나뉘어 두골은 어등포로 들어오고, 수족은 고내포·애월포·명월포 등지로 들어왔다. 이 때문에 매년 정월이 되면 모든 바람이 서쪽 바다에서 불어 오며, 이를 일컬어 영등신迎燈神이 하강했다고 하여 이곳에 사는 백성들이 무리지어 무당과 함께 들에다 굿판을 벌인다. 밤낮으로 말머리 같은 나무 등걸에 비단으로 꾸며 약마희를 지어서 신을 즐겁게 하고, 2월 15일에 이르면 돛대를 갖춘 배 형태를 만들어 포구에 띄우면서 이를 신을 보낸다고 일컫는다. 이 달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다.”
김석익의 글에서 당나라 상인의 시신이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어등포·고내포·애월포·명월포 등지로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것이 영등신이 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고 왜 매년 정월에 약마희를 하는 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단지 연등절, 영등신 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고 구전되는 설화 및 본불이에서 어부들을 구해준 영등의 사체가 삼등분으로 나뉘어 들어왔다고 하는 것과 유사할 뿐이다.
(1. 진성기, 영등대왕, 『남국의 전설』, 일지사, 1968, 60~62쪽.
2. 진성기, 영등할망, 『남국의 전설』, 일지사, 1968, 62~63쪽.
3. 진성기, 영등당본풀이, 『제주도 무가본풀이 사전』, 민속원, 1990.)
본풀이를 종합하면 황영등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용왕국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한 어선이 폭풍을 만나서 외눈배기 나라로 표류해 갔다. 이것을 본 영등은 어부들을 살리기 위해 왕석 위에 나가 앉아 있었다. 영등은 배와 어부들을 왕석 안에 숨겨놓았다. 외눈배기가 개를 데리고 찾으러 왔다. 외눈배기가 영등에게 어부들의 존재를 묻자 자신도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외눈배기가 가자 영등은 배와 어부들을 내놓고 어부들에게 관음보살을 읊으면서 가라고 말했다. 한참을 빠져나온 어부들이 안심하고 관음보살 읊기를 그치자 외눈배기가 있는 곳으로 다시 끌려오게 된다.
영등은 다시 관음보살을 읊으면서 가라고 신신당부하면서 2월 초하루에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어부들이 한수리로 돌아온다. 영등은 외눈배기에 의해 세 토막이 나서 머리는 소섬에 오르고, 사지는 한수리에 오르고, 몸체는 성산에 올랐다. 도민들은 어부들의 수중액을 면하게 해준 영등의 고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소섬에서는 정월 그믐날에 제를 지내고, 2월 초하루에는 비꿀물에 오르고, 2월 5일에는 성산면에서 영등제를 지낸다.
하지만 이 영등하르방에 대한 설화는 제를 지낸다는 것 이외에는 지금 제주에서 신앙하는 바람과 풍요의 신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신적 관념에서 영등할망은 육지에서 비와 바람과 관련된 신격인 동시에 풍농과 관련되는 신격이으로 우리나라 중부와 남부지방에서는 흔히 섬기어져 왔었다. 이 신은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시기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이월 초하루에 내려와서 이월 보름이나 스무날에 올라간다고 여긴다.
농경과 어로 같은 생업에 큰 영향을 주는 바람을 관장하는 신(神)인 ‘영등할머니’가 하늘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 이월 초하룻날을 가리키는 이날을 지역에 따라서는 영동할머니날, 이월할매 오는 날, 이월밥 먹는 날, 바람님 오는 날, 풍신날이라고 달리 부른다.
영등할머니는 지역에 따라 영동할멈, 영동할머니, 영둥할마니, 영등할망으로 달리 부르며 영등할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해에는 비를 맞아 초라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비를 몰고 오기 때문에 풍년이 들고, 딸을 데리고 오는 해에는 다홍치마 노랑저고리의 고름과 치맛자락이 나부껴서 예쁘게 보이게 하려고 바람이 불기 때문에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등신앙은 한반도의 기후 환경 중 특히 바람과 기상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정착된 생태민속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월의 기후생태학적 환경과 지역의 생업 조건 간의 관련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음력 이월은 대개 입춘을 지나 우수, 경칩의 절기에 해당한다. 이는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이때의 기후 는 변화가 아주 심하다.
따뜻한 저기압과 차가운 고기압의 확장과 소멸이 불규칙적이어서 기압의 변화로 인해 바람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절기상으로는 봄에 해당하지만 여전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등 겨울의 잔재가 여전하다.
이러한 기상 조건은 영등할머니의 속성을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 영등에 대한 신앙은 육지부에서는 전부 소멸하였으나 이곳 제주에서는 송별제가 격식을 갖추어 치러진다는데 의의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