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2. 14.
제주의 마을 답사 3회차
용담동 집중탐구
제주역사문화연구소
송장환
용담동
현황
면적
용담 1동 : 611,112.8㎡.
용담 2동(법정동 용담 2동, 3동) : 4,932,479.2㎡
인구
용담 1동 : 3,789세대 8,363명(남자: 4,238명, 여자: 4,125명)
용담 2동 : 6,580세대 16,594명(남자: 8,397명, 여자: 8,197명)
마을유래
삼성혈 서북 해안에 큰내(한내 : 대천, 한천)가 바다에 닿는 곳에 한독(대독)이라는 마을이 형성.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가구 및 인구가 늘어나자 한내 동측에는 동한두기 서측은 서한두기라 불렸으며
동·서 한두기를 통칭할 부락 이름의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용소(용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의미를 살려 용담이라 칭하였다 (약 100년전임)
1955년 8월 13일자 법률 제368호에 의하여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어
동년 12월 13일자로 제주시 25개 리가 40개 동으로 개편됨에 따라
용담리는 병문천 서측과 한천 동측을 용담 1동,
한천과 도두동 다호부락과 용두암을 연결하는 용담 2동,
닥그네(수근동)와 어영부락을 용담 3동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1962년 1월 1일 제주시 40개 동을 통합하여 14개 행정동으로 구분케 됨에 따라 법정동인 용담 1.2.3동을 용담동이라는 1개의 행정동으로 관리하다가,
1985년 10월 1일 제주시 조례 1034호로 용담 1.2동으로 분리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답사
1. 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6호 용담지석묘6호
(사적522호, 제주 용담동 유적에 통합)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3.15m, 너비는 2.17m이며, 잘 다듬은 판석 11매를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받침돌로 받쳤다.
무덤방은 지상에 마련되어 있는데 길이 1.6m, 너비 1m로 땅을 파고 바닥에 자갈을 얇게 깔았으며 테두리는 깬돌을 이용하여 돌상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용담지석묘 6호는 외형은 바둑판식인데, 지상에 무덤방을 마련한 것으로 보아 제주도 고인돌 중 특수형에 속한다.
또한 적갈색 민무늬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만들어진 시기는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철기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2. 제주 용담동 유적 (사적522호)
제주 제주시 용담2동 2696-2번지 등
제주 용담동 유적(龍潭洞 遺蹟)은 2011년 2월에서 5월까지 건축허가에 따른 구제 발굴(救濟發掘; 정비와 복원 목적이 아닌 건설공사 등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발굴조사) 과정에서 수혈(竪穴, 구덩이)주거지 29기, 대형 굴립주(堀立柱; 작은 구덩이를 여러 개 파서 기둥을 세운 것) 건물지 3동, 불다짐 소성유구 3기, 우물(집수장) 4기, 수혈유구 58기 등이 확인된 선사 유적이다.
발굴된 유물은 제주산의 직립구연 토기, 원형점토대토기, 삼각형 점토대토기, 발형 토기, 고배형 토기, 적갈색 토기, 파수부 토기 등의 토기류와 유구석부, 석창 등의 석기류, 홈돌, 고선, 갈돌, 갈판 등의 가공류가 확인되었고
용담동식의 대형 지석묘가 주변의 한천변을 따라 제주도에서 가장 발달한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제주 용담동 유적(龍潭洞 遺蹟)은 선사 유적지와 고분군이 연계되어 탐라 초기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제주시 용담동 2696-2번지 일대 선사유적지와 지석묘 3기를 포함한 21필지(1만279㎡)의 '용담동 유적'을 사적 522호로 지정.
(국립제주박물관 보관 유물)
* 인근 유적 : 무덤유적(용담2동 741-1번지), 제사유적(용담1동 311번지), 탐라시대 마을 움집터(용담2동 746-2번지)
3. 제주향교 (濟州鄕校) :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2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시대 지방 관립 학교.
제주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제주민을 교화·교육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았고, 교수관 1명이 정원 7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와 장의 등이 담당하고 있다.
제주향교는 원래 제주성 안의 교동에 세웠다.
1435년(세종 17) 안무사 최해산이 중건하고, 1466년(세조 12) 절제사 이유가 중수하였다. 1536년(중종 31) 심연원 목사가 명륜당을 개축하고 향학당을 건립하였다.
1582년(선조 15) 목사 김태정이 가락천 동쪽의 고령전으로 이전하였으며, 1668년(현종 9) 목사 이인이 예전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1724년(경종 4) 화재가 일어나 향교 건물들이 소실되자 목사 신유익이 가락천 동쪽의 예전 자리로 이전하였다.
1754년(영조 17) 목사 조명집이 대성전을 중수하고, 1827년(순조 27) 목사 이행교가 현재의 자리로 옮긴 뒤 오늘에 이른다.
현재 동무와 서무 등은 사라지고 없고, 대성전과 명륜당, 계성사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4. 서자복 西資福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385
서자복은 제주시 용담동 해륜사지 옛터에 보존되어 있는 미륵으로,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옛 제주성의 서쪽에 성안을 수호하듯 세워져 있었다.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불상이 토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 중의 한 양상인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추정되며,
머리에 씌워진 대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자복은 신장 273㎝, 얼굴 길이 135㎝, 신부 길이 138㎝, 신부 둘레 315㎝, 기단 높이 66㎝, 기단 둘레 335㎝, 감투 둘레 135㎝이다.
제주산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를 쓴 입상이다.
기단 위의 석상은 하체가 없으며 양손은 가지런히 펴 가슴에 대고 있다. 움츠려 있는 듯한 귀, 뚜렷한 입술, 옆으로 길게 감은 듯한 눈, 둥근형의 머리 부위 등 전체적인 인상은 자비롭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법의는 통견이지만 목과 어깨 부분에서 하단부까지 앞이 터진 도포 같은 것을 입고 있는데, 문양 표현이 없는 등 토속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서자복 옆에는 높이 70㎝, 둘레 100㎝의 작은 석상이 있는데, 여기에 걸터앉아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온다.
또한 서자복은 전염병과 같은 질병도 잘 막아주는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서자복은 바닷가와 인접하고 있는데, 이 마을의 주민들은 해상 어업의 안전과 풍어, 출타한 가족의 행운을 빌면 효험이 있다 하여 치성으로 제를 지내고 있다.
서자복은 불교 신앙과 민간 신앙이 결합되어 길흉화복을 가져다주는 미륵 신앙의 대상물이 되고 있다.
제주 지역의 미륵 신앙은 자연석, 혹은 미륵불과 같은 석불을 대상으로 하지만, 신들의 성격은 이재, 풍어, 득남 등을 가져다주는 무속신적 성격이 강하다.
서자복도 토속적 불교 의식과 아들을 낳고자 하는 기자 풍속(祈子風俗)이 결합된 민간 신앙의 대상물이 되고 있다. 서자복은 동자복과 더불어 제주성의 수호신적 기능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5. 용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한두기길 35
‘영주십경’의 하나인 ‘용연야범’의 장소이다.
‘용연’의 계곡물은 산등성이부터 바닷가로 흐르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나무로 연결되어 있는 용연 다리에서는 정자와 어우러져 있는 계곡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다.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데, 용연에 살고 있는 용이 승천하여 이곳만큼은 비를 내리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용연은 용두암에서 동쪽으로 200m정도 거리에 있는 호수로 용이 놀던 자리라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오색물결빛이 아름답고 울창한 숲과 조화를 이룬 절벽과 물속의 바위들의 모습이 수려하다.
또한, 선인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로 유명하며 마애명이 절벽에 새겨져 있고 용연야범축제가 매해 열리는 곳이다.
(마애명 중 취병담)
6. 흥운동 (새정드르마을)
비행장확장공사로 살던 곳을 잃은 정드르사람들이 이전해 와서 다시 마을을 만들었다.
용담 2동의 모체이자 중심지이다
경로당과 포제단 : 진태왓 한가운데 있는 소로기동산에 위치
* 진터왓: 제주민란때 이재수가 이끌던 서진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
7. 용담동 다끄네 본향 (궁당)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2동에 있는 다끄네마을의 본향당.
제주 지역의 신당은 흔히 본향당과 같은 마을 공동체의 신을 모시는 성소가 있고 해신당, 오당 등 직능신을 모시는 곳이 있다,
그리고 다니는 일자에 따라 일뤠당, 여드레당으로 나뉜다.
이 중 본향당은 마을굿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본향당 당신은 마을 공동체의 신인만큼 마을 사람 전체의 생명과 건강, 사업 번창 등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본래는 모든 자연마을마다 마을이 형성될 때 함께 세워졌을 것이나 지금은 많이 통합되거나 소멸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지역의 전체 신당 중 약 44%가 본향당으로 여전히 본향당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용담동 다끄네 본향에 모셔져 있는 당신은 ‘상서대왕 중전대부인’과 ‘정절상군농’으로,
이 신들은 본래 한내[漢川] 삼동물가에 있다가 1882년(고종 19) 훼철된 내왓당[川外祠]에 모셔진 신의 일부이다.
본풀이에 의하면, 중전대부인은 상서대왕의 큰부인이고 정절상군농은 작은 부인인데,
정절상군농이 임신했을 때 돼지고기를 먹자 상서대왕은 부정하다는 이유로 두 부인을 함께 내쫒았다.
이곳으로 이전해 온 정절상군농은 백메와 청감주에 청근채를 받아먹으며 불도가 되고, 정절상군농은 바깥쪽으로 좌정해 돼지를 잡아 열두뼈를 받아 먹으며 한꺼번에 아이 일곱을 나아 길렀고
그 아이들은 용담동 전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8. 용마마을과 말머리 소금빌레
8-1. 용머리마을 전설(1985년『제주도 전설지』)
아주 오래 전 제주시 용담동의 바닷가마을에 한 섬 쌀밥과 돼지 한 마리를 먹어야 겨우 배가 차는 사람이 살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 하여서 사람들이 ‘배 큰 정서방’이라고 불렀는데, 많이 먹어서 그런지 힘도 장사였다.
어느 날, 먹어도 먹어도 언제나 배가 고프다는 자식을 먹여 살리는 게 힘들어진 부모는 관가에 도움을 청하였다.
관가에서 조사해 보니 아무래도 천하장사가 틀림없다.
이대로 놔두면 아무래도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면서 죽이기로 결정했다.
관가에 불려간 정서방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하여 한번 배불리 먹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관가에서 정서방의 소원대로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만들어 주자 정서방은 한꺼번에 다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자기를 죽이려면 큰 바윗돌을 두 팔과 두 다리에 묶어 매어 배에 실어다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정서방의 말대로 관가에서는 정서방의 두 팔과 두 다리에 큰 바윗돌을 묶고 바다에 던졌으나 정서방은 3일 동안 물 속에 가라앉지 않았다.
정서방은 바닷가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에게 어찌해야 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정서방의 부모는, “배고파 죽느니 지금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며 살라고 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자 정서방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바닷속에서 백마가 머리를 내밀고 나와 하늘을 향해 세 번 크게 울고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말은 원래 때가 되면 정서방이 타고 다닐 말이었으나, 주인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후 말이 머리만 내밀었다가 들어가 버렸다고 해서 다끄내〔修根洞〕 옆의 바닷가를 ‘말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말머리」의 주인공은 한 섬 밥과 통돼지 한 마리를 먹는 대식가인데,
이런 식성은 제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궤네깃도 본풀이」나 「송당 본풀이」의 영웅인 궤네깃도와 문곡성과 매우 유사하다.
소도 한 마리, 돼지도 한 마리를 먹어 그 식성 때문에 용왕국에서 쫓겨나는 내용도 유사하다.
본풀이의 영웅은 그 대식성의 능력으로 강남천자국을 평정하고 제주에 들어와 신이 되지만 「말머리」의 주인공은 대식성 때문에 결국 죽게 된다.
앞의 것은 신화이고 뒤의 것은 민담이다.
부모가 “배고파 죽느니 지금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한 말 속에 제주의 가난과 이 때문에 죽어야 하는 비애가 묻어난다.
8-2. 소금빌레
제주 지역에서 행하여졌던 비교적 너른 바위 위에서 소금을 얻는 형태의 염전.
암석염전에 이용하는 암석은 평평한 암석이라고는 하지만 균열이 나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 틈을 따라 찰흙으로 둑을 쌓았으며, 둑의 폭과 높이는 약 15㎝ 안팎이었다.
이때의 둑을 ‘두렁’이라 하고, 둑을 만드는 일을 ‘두렁막음’이라고 하였다.
증발지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곧 천일염이다.
천일염을 만드는 증발지를 ‘소금돌’이라고 하였다.
비교적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는 암석염전으로는 애월읍 구엄리의 구엄염전이 있다.
구엄리 암석염전의 대부분은 비교적 높은 곳에 있어 겨울 외에는 조수의 조건에 구속받음이 없이 제염(製鹽)이 이루어졌다.
9. 예비검속 희생자 위령비 (옛 포로수용소 인근)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장 김병원은 즉각 각도 경찰국에 통첩을 발송하여 소위 ‘불순분자’를 잡아들이고 분류하여 군에 넘겼다.
제주에서도 예비 검속이 실시되었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 내 4개 경찰서에 예비 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10. 수근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3동에 있는 포구.
수근포는 지금의 제주시 용담동 닷근내라는 자연마을에 있는 닷근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수근포는 『여지도』 등에 나와 있는 修根村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시 용담3동은 정드르·어영·닷근내라는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수근포는 닷근개의 음을 빌린 말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정으로 쪼아 포구를 만들었다는 데서 닷근개라고 했으며, 그 주위에 형성된 마을을 닷근내라고 하였다.
수근포 사람들은 1980년대 들어 관광개발 바람을 탄 제주국제공항 확장 공사와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항공기 소음 공해로 인하여 끝내 170여 가구 700여 주민들이 떠나야 했다.
그러나 포구는 지금도 여전히 제 구실을 한다.
닷근내라는 자연마을의 바다 밭은 머리에서부터 족은연디까지이다. 그 안에 포구는 수근포 하나뿐이다.
닷근내 해변은 전체적으로 완만하여 포구를 만들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정으로 연안의 넙빌레를 쪼아 포구를 만들었다. 포구 입구는 북동쪽으로 나 있다.
11. 어영마을 수근연대
연대 : 횃불과 연기로써 급한 군사 소식을 전하던 전통 시대의 통신 수단.
제주도 내 해안 구릉에 위치한 연대로서, 연대와 연대, 혹은 내지봉수와 연결하는 연변봉수의 기능을 담당했다.
수근연대는 동쪽으로는 사라봉수(직선거리 4.6㎞), 서쪽으로는 도원봉수(직선거리 2.8㎞)와 서로 군사 소식을 주고받았다. 봉군은 별장 6명, 직군 12명이 있었다.
수근연대는 1978년에 제주도 내 일반적인 연대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연대의 상부는 7.1m×7.1m, 하부는 7.4m×7.6m, 높이는 2.9m로 큰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다.
끝.
출처 :
문화재청,
제주자치도청,
용담동 마을지,
디지털 제주시 문화대전,
제주시 옛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