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을 갔었습니다.
싱게물공원지나 마리여등대옆으로 가서 원담을 사진찍으려고...
삼동낭모살왓으로 해서 마리여 코지로 가면서
인접해 있는 우진알을 보면서
예전에 무엇때문에 저 곳을 헤메였을까?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전혀 기억이 안납니다.
마리여 등대앞에서 뒤돌아 보면서
허리뚜들 원담을 찾습니다만 물이 들어와 보이질 않네요.
2002년 부터 2014년 가을까지 이 일대에 총 350억원을 들여 바다목장을 만들었고
생태체험장도 만들었지요.
그때 자바리상을 세우고 해상낚시터를 조성하고
일부가 남아있던 원담을 보수 보강하여 동그랗게 쌓았습니다.
그 동그런 원담의 모습을 보려고 왔는데 물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의미없이 마리여등대와 바다목장 다리 그리고 자바리상을 찍습니다.
나오는데 또 우진알이 눈에 띕니다.
모르겠습니다. 왜 저기를 올라갔었는지...
그 앞 삼동낭물을 찾으러 갔었나요?
그 삼동낭물은 지금도 있을까요?
일행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요.
그 지역일대를 왜 갔는지,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고
그 대답이 "잊었다는 것을 안다면 아직 치매는 아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야 할지..한숨을 내쉬어야 할 지...
돌아오자 마자 옛 기록을 뒤져봅니다.
2010년 3월이 그 지역에 대한 내 마지막 답사기록이네요
두편으로 나뉘어 있는
그 때의 글을 한장에 카피해서 올립니다.
............................
바닷가 빌레를 걸으며
밀려오는 파도의 포말을 느끼며..
모살왓에 왔습니다.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가 등말코지입니다.
그리고 그 동쪽이 상코지인데
이 두코지에 의지하여 신창포구가 들어서 있습니다.
아 여기는 산여끗부근입니다.
신창포구 마을로 나왔습니다...
마을 올레에서 본 신창포구
마을 민가담에 붙어 아주 협소한 창고처럼
당이 있습니다.
돈짓당입니다.
돈짓선왕 남자분을 모시고 배를 타는 남성들만 다니는데
물색의 색감이 아주 화려합니다.
1933년에 가져다 놓은 방애
마을 공동방애였답니다.
조선소..
아니 선박수리소..
무언가 있었던 자리
허물어지고 밑둥만 남아있습니다
쇠물을 찾아가는데
저쪽편 뒤로 성당이 보입니다.
반갑지요. 오래된 습관.
냉담한지도 꽤 오래되는데 어디서든 성당만 보면 반갑습니다.
냉담이라는 표현을 명확히 해야겠네요.
내주님과 냉담한게 아니고 그 매개자들과 냉담한 겁니다.
주님과 나사이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인줄 모르고 그 자신 스스로 주님인줄 아는 매개자들에게 냉담한거지요.
그러다 보니 내가 힘듭니다.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가 훼방을 놔서 못가는 사람처럼 내가 힘듭니다.
쇠물통입니다.
빙둘러서 성을 앃았습니다.
유래를 읽어보시죠.
내부의 모습..
작은 새물통..
요기는 여탕입니다.
길쭉한 돌구유가 꽤 오랜 연륜을 나타내 보입니다.
제주어로 돌구시
여기는 남탕..
소금밭이 있던 자리입니다.
신창리 성당입니다.
사람은 보지않고 주님만 만나고 와서 따로 블로깅하겠습니다.
신창리 신흥동입니다.
연토준천...이비송덕인데
준설한 샘물은 없어졌습니다
매립후 그 자리에 들어선 마을회관겸 경로당건물
오른쪽에 애향비를 세워 그 뒤에 이 건물을 지을때 출연한 분들의 성함을 써놨습니다만
이것도 얼마나 기리어 질까요?
신흥동 마을에 큰 팽나무 그 밑둥 세부분에 돌담을 붙여서 쌓았습니다.
이나무 얼마나 갑갑할까요?
그래도 원망하지않고 새싹을 내고 있습니다.
여름이면 큰그늘을 주겠지요.
마을 올레길..
정자목으로 서있는 성굴앞 팽나무입니다.
성굴입구
도구리할망에 대한 전설도 있어 도구리할망굴이라고도 합니다.
굴의 왼쪽입니다.
한라산쪽으로 나있는데 한 500미터된다 합니다.
부분부분을 막아서
격실을 만들었습니다.
가다가 뒤돌아 보니
꽤 많이 온것 같아서..
뒤돌아 갑니다.
동굴입구를 지나서..
바다쪽으로 갑니다.
길이가 800미터정도되는데
한 200미터는 가야
한복판에 20미터 둘레의 석주기둥이 형성되어
옛날 물이 맴돌며 흐르던 자취가 바닥암반과 굴벽에 남아있는
돌병풍이 늘어붙은 현상을 볼 수 있다기에..
가고
가고
또 가다가
혼자가는 길 재미없어서 돌아나갑니다.
마을을 지나
다시 해안도로쪽으로 갑니다.
............................
신창 - 용수간 해안도로입구에 있는 마을회관
그 앞에 설촌유래안내판..
마을회관주변에 마을이 없네요.
그만큼 해안도로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거지요..
제주도 어떤 해안도로보다 자연과 가까우며 풍광이 뛰어나다고 자랑하고 있으며
풍력발전기로 인한 이국적인 풍광이 드라이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일견 일리가 있을 수도 있지요.
제주 동부 오름군락사이에 있는 풍력발전기는 또 다른 흉물이자
엄청난 산소를 배출하고 그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는 임야를 파괴하는
자연파괴의 주범이지만
이곳 풍력발전기는 바다와 평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나름 멋있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해안도로에서 보는 배영굴...과
먼여를 배경으로 서있는 풍력발전기.
풍력발전기 크기가 궁금하세요?
기둥이 62미터높이로 있고 기둥끝부분에 달린 블레이드길이가 36미터
기둥의 아랫둘레가 4미터 조금넘고(4.2)
윗둘레는 2미터조금 넘는답니다(2.3)
블레이드가 떨어지면 큰일이라고요
이건 멈춰진 상태로 초속 60미터까지는 견딘다하네요.
그리고 초속 4미터이하 25미터 이상이면 자동으로 멈춘답니다.
제주에 가장큰 피해를 준 1959년의 태풍 사라가 순간 최대 초속 33미터였다하니까
안전에은 걱정이 없나봅니다.
경제적 효과?
바람이 일정치 않아서 전력생산량이 들쭉날쭉하기때문에 에너지공급원으로는 낙제점이라서
화력 및 원자력발전기의 소요를 줄일수 없다하고요.
풍력발전시설이 들어설때마다 예비전력비축을 위해 발전기를 더 설비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만드냐구요?
녹색성장의지의 표현이랍니다..
사실 무늬만 녹색성장이지만..
그리고 그 발전기옆을 지나갈때 나오는 터보엔진의 굉음! 참으로 견디기 어렵지요.
그런데 왜 말리지 않냐구요?
누가 말려요.
정부에서도 강력히 밀어 붙이고 마을 사람들이 아무소리 안하는데..반대하는 사람이 도리어 역적으로 몰리는데..
왜 아무소리 않하냐고요?
아무것도 할게없고 그냥 놔둔다고 돈들어 옵니까?
제주관광은 해안도로를 개설하면서 제주시와 중문단지를 제외한 지역관광은 끝난겁니다.
잠시 들르거나 차타고 휭하니 지나가버리지 어느마을 어딘가에서 잠을 잡니까? 밥한끼를 사먹습니까?
그런데 골프장이던 풍력발전시설이던 어떤 시설이 들어오면 마을에는 마을발전기금이 들어오는데..
여기서 그만!!!
벌내물
과유불급..
지난번 정비한 선에서 딱끝내면 좋았을걸..
다리까지 놓네요..
있는 그대로..
또는 약간의 정비후 그냥 놓아두면 않되는 건가요?
꽁꽁 갇혀있는 갯대추 자생지
사람이 들어오지 말라는 건지
갯대추가 더이상 퍼지지 말라고 하는건지...
앞에 다리가 놓인 후 또 어떻게 변할줄 몰라
같은 사진을 계속 찍습니다.
벌내물을 나와서..
싱게물로..
싱게물공원
멀지도 않은데 되게 멀게 보이는 신창구간 해안도로의 랜드마크
마리여등대..
랜드마크치곤 너무 왜소하지요.
풏력발전기에게 자리를 물려준지 오래됐다는데
나는 아직 마리여등대를 봅니다.
싱겟물공원 나오면서 본
못다핀 아니 아직 덜핀 꽃송이..
삼동낭물표지석
무진알
태동산
무진알 옆에 있는 상동낭물
해안도로 개설전 그모습이 그대로 있는게 너무 신기하고 반가워서
상동낭물을 한바퀴 돌면서..
올라온 태동산..
태동산 건너편
갤러리 까페라고 알고 있어서
차한잔 먹으러 갔는데
영업을 안하는 듯하여
빠꾸...
조금더 용수쪽으로 가다
예전에 용수에서 신창으로 가는 시멘트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돌아가려구요..
좌우로 둘레둘레 돌아본 길옆의 풍광들입니다.
밭담이라고 보기에는, 목마를 위한 잣이라고 보기에는
그 폭이 대단합니다.
일설에는 환해장성이라고 합니다.
머들을 뒤덮고 피어닜는 선인장들..
부부의 묘입니다.
통상 산담을 트던데
산담을 그대로 둔 상태로 가운데에다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산담올레는 서로 반대로 열어놨습니다.
생뚱맞은 야자수..
이렇게 소나무가 제격인데..
효자효부정려비입니다.
1862년인 철종3년에 완문을 받았고 1921년에 비석을 세웠는데..
(완문이 내려왔으면 관이나 향리에서 그때 어딘가 정려비를 세웠을텐데 그기록은 없습니다)
풍마세우로 각자가 멸실되어
1990년에 다시 세웠답니다.
이건 그 부근에 있는 영사비인데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젊은 장정 네명이 어느날 어느시 함께 풍파속에서 돌아오질 못하여
단장의 아픔을 가진 네명의 애비들이 표석을 세워 아들들을 기린답니다.
야자수보다 더 생뚱맞은 우체통이 있어서..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집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데..
동네에서규정한 것 같습니다.
어두워지고..
황사도 짙어지고..
버스를 기다리며..
전화국번을 보면서 언제 이병원이 문닫았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이마을이 쇠락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주이야기 > 제주의 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담동 답사자료 (0) | 2016.02.12 |
---|---|
귀덕리 답사자료 (0) | 2015.08.12 |
화북동 일부분 (0) | 2015.06.16 |
김녕리 몇곳 이리저리 걷다. (0) | 2015.02.26 |
도평동 사라마을 이비외송 (0) | 2015.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