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공양왕릉답사 안내자료

하늘타리. 2015. 8. 22. 21:19

서삼릉과 서오릉에서는 문화해설사들이 설명을 해줄테니 그 설명을 유의해서 들으면 많은 보탬이 되겠지요.


 그리고 나서 갈 공양왕릉에는 문화해설사가 없습니다.


 공양왕릉에 가기에 앞서 고려의 릉에 대해 잠시 알아보지요.


 고려사에 왕릉명이 거론된 고려왕릉의 수는 59기입니다.
 현재는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36기이며 능주를 모르는 것 포함 43기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중 남한 땅에 소재해 있는 것은 5기로, 21대 희종의 석릉, 22대 강종과 비의 곤릉, 23대 고종의 홍릉, 24대 원종과 비의 가릉 등 4기가 강화에 위치하고 있고 고려의 마지막 34대 임금 공양왕의 고릉이 고양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려왕릉은 조선 태조이후 조선왕조에서 관리해 왔으나 시기별로 그 경중이 다릅니다.
 조선태조즉위원년에 고려태조묘인 숭의전에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 충렬왕, 공민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으나 점차 축소되어 세종때는 태조,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의 4위에 대한 제사로 국한되었지요.
 능에 대한 관리도 태조왕릉과 현종, 문종, 원종의 선릉, 경릉, 소릉에 대해서는 관리를 하였다고 하나 상당히 부실했다고 합니다.


 고려조가 멸하고 조선조가 창건된지 260여년이 지난 1660년 현종때에 들어와서야 고려왕릉에 대한 관리가 정착되기 시작합니다.
 현종 1년 고려태조묘인 숭의전 부근에 민간에 의한 무단 투장사례가 보고되자 태조묘와 그  부근의 인근 7릉에 대해 투장사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 국왕의 명으로 태조왕릉은 200보, 선릉, 경릉, 소릉을 포함한 그 주변 7릉에 대해서는 150보로 한정하여 그 안의 묘는 모두 파내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현종 3년인 1662년 고려왕릉에 대한 전반적인 현지실사를 실시합니다.
 그 결과 송도근처 고려왕릉은 수호인이 없는 곳이 많기 때문에 릉 경내에 주민이 함부로 집을 짓거나하여 무너진 릉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여 무너진 곳에 대해서는 우선 보수토록 하고 정비규정을 보다 세분화하였습니다.
 태조릉은 200보, 주변 7릉 중 선릉, 경릉, 소릉은 150보의 경계를 유지하되 나머지 릉과 새로이 파악한 35개릉에 대해서 100보의 경계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하여 경기도 관할지역에 사는 왕씨자손가운데 해사자를 골라 역을 면해주고 왕릉을 수호하게 하여 관리와 금법자에 대한 신고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고려왕릉은 일부만이 관리 보수되어 오다가 조선 헌종때의 적간을 통해 총 43기의 소재를 파악하였고 이 때의 기록이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왕릉조사사업으로 이어지고 오늘날 까지도 유지, 보수의 근본이 됩니다.


 현종대에 공양왕릉에 대한 관리기록이 나타납니다.
 현종 14년인 1673년 3월에 좌의정 김수항이 임금에게 아뢰길 송도, 풍덕, 장단에 있는 고려왕릉의 경우 왕씨 자손이 그 지역에 있어 수호및 관리 토록하였으나 공양왕릉은 멀리 떨어진 고양에있어 왕씨자손에 의한 수호관리가 어렵다고 보고합니다. 이에 임금은 인근거민을 골라 수호케하고 아울러 공양왕 릉토의 훼손여부를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경기감사의 보고에 의하면 고양군수 조봉원이 직접 확인 한 결과 공양왕과 왕비 노씨의 묘가 원당면에 있는데 묘의 형태가 분명하고 표석이 각각 세워져 있으나 글자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과 석인이 각 1쌍씩, 석상이 각 1기씩 있으며 장명등이 각각 하나씩 있지만 하나는 파손되어 있고 호석 역시 각 1기씩 있으나 하나가 없다는 것과 곡장이 붕괴되어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릉주변에 전 참봉 신시주의 처 윤씨의 묘를 비롯해 7기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들 모두 공양왕의 외외자손으로 오래전부터 신가의 족산으로 수호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고양군에서 무너진 왕릉주변을 개축, 개토하였다는 사실과 인근에 사는 5인을 릉의 수호인으로 정하였다는 것을 아뢰고 있습니다.
 이에 추가하여 경기감사는 공양왕릉과 너무 가까이 있는 신시주의 처 윤씨의 묘를 하루빨리 이장할 것과 이후부터는 공양왕의 외파리 할지라도 입장하는 일이없도록 하겠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후 숙종 원년인 1675년의 예조정랑의 서계에 보면 고양군 공양왕릉 북변 50보안에 숙위 윤씨의 묘, 도사 신율, 생원 신혁, 참의 정자양, 익위 신홍전, 충의위 신홍지등 6기의 묘가 있는 바 이들 50보안에 묘를 모두 파내라고 명한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들 묘의 대부분은 공양와의 외손과 외외손으로 공양왕의 묘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음이 인정되어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 공양왕릉과 주변 묘역의 사진은 현장에서 보시라고 안 올리고 네이버맵에서의 항공사진에 왕릉 주변묘역의 주인을 기재한 사진을 올립니다.

 


  공양왕은 1389년부터 1392년 까지 고려를 통치한 제 34대 고려국왕입니다.

   고려는 공민왕 재위기간인 1351년 부터 1374년 사이에 잠깐 흥하다가 망조가 들었습니다. 원나라에서 시집온 노국공주가 15년 만에 출산하다 산고로 죽어 버리자 공민왕은 혼미해져 버렸다고 합니다. 정사는 신돈에게 맡기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시녀들을 방 안에 모아 귀족집 미소년 김흥경 홍륜 한안 등과 난잡한 음행을 시켜놓고 자신은 문틈으로 엿보는가 하면, 때로는 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고 자신의 후계가 없자 세 번째 부인 익비 한씨를 차례로 윤간케 해 임신시켜 놓고 왕손으로 조작하기 위해 이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공민왕이 이들의 칼에 맞아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때의 모든 정치행위의 패착의 책임을 전부 신돈이 뒤집어 씁니다.
 고려말 조선초의 신진사대부들의 대부분을 신돈이 발탁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골수 성리학자인 그들은 신돈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시대의 허물을 모두 신돈의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공민왕에게는 부인 다섯이 있었으나 모두 소생이 없었습니다. 오직 신돈의 몸종이었다고 하는 여섯째 부인 반야한테서만 아들이 생겼는데 이가 바로 제32대 우왕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흥세력들이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창업한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이 되었지요. 신돈의 몸종이었으니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리로 우왕과 창왕 부자는 왕위에서 쫓겨나 결국 살해되고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입니다.   그는 제20대 신종의 둘째 아들 양양공의 6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의 차남으로 어려서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고 이름은 요(瑤)입니다. 성격이 유하고 당시 45세로 나이가 많은데다 이성계와 사돈으로 조종하기가 쉽다하여 1389년 창왕 폐위 직후에 임금자리에 올랐습니다만 새 왕조 창업이 다급한 신흥세력들이 그를 군왕으로 오래 머물게 할 리 없었습니다.

 2년8개월 만에 ‘양위’라는 명분으로 밀어낸 뒤 강원 원주로, 간성으로, 삼척으로 옮기며 험한 꼴은 모조리 겪게 한후 1394년 4월 고돌산 살해재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정남진등에게 교살당합니다.
 
 공양왕의 능으로 전하는 묘소는 두 곳에 있습니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우리가 찾아갈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입니다.

 삼척공양왕릉(三陟恭讓王陵)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허목의 척주지에 1662년에 그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곳으로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이 다시 봉토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1995년 9월 18일에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강원도 삼척시의 공양왕릉은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었던 것으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습니다.
 현재도 ‘궁촌왕릉’이라고 부르며 매년 제향을 지내고 있습니다.


 고양에 의치한 릉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개성에서 도망쳐 이곳 견달산 아래에 도착한 왕이 다락골 누각에 숨어들었을 때 돌보는 이 아무도 없었으나 인근 절의 스님이 공양을 몰래 날라주며 정성으로 보살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아끼던 삽살개가 짖어대는 연못을 뒤져보니 둘이 나란히 빠져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위에 쌍분으로 장사 지낸 곳이 바로 이 고릉(高陵)이라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이곳 주변에는 ‘식사동(食寺洞)’ ‘대궐고개’ ‘어침이’ ‘왕릉골’등의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고양의 릉은 1970년 2월 28일에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무덤 양식은 쌍릉 형식이며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床石)이 각각 하나씩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石燈)과 석호(石虎) 그리고 무덤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 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석호는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띠고 있지만, 조선 초기 태조의 건원릉(健元陵)과 태종의 헌릉(獻陵) 무덤 양식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석은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묘표석(墓表石)은 조선시대 고종 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화재당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고양시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릉이라고 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의 기사 때문입니다.
태종 16년(1416) 태종이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였고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릉(高陵)이라는 능호가 정해진것은 그 다음달입니다. 이 기사에는 사신을 보내 제사를 올린 능의 위치가 나타나 있지를 않습니다만
세종 19년(1437) 7월 17일(을사) 4번째기사를 보면
 "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 무덤 곁의 암자에 이안하도록 하다.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현(高陽縣)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라고 하여 공양왕의 무덤이 고양현(현 고양시)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유추해석하기를 처음 살해되어서 묻힌 곳은 삼척이었지만, 공양왕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한양으로 불러 올린 후 고양현에 다시 묻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공양왕릉을 관리하는데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공양왕릉의 묘역도 조선왕조에서 쓴 것이 아니고 공양왕의 딸이 사위의 도움으로 사위집안의 문중 묘지내에 조성한 것입니다.


 공양왕의 딸은 세명으로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전 첫째 딸은 익천군 왕집에게로, 둘째딸은 단양군 우성범에게로 세째딸은 진원군 강회계에게 시집을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될때 우성범과 강회계는 이성계 일파에게 참수되었죠.
종실인 첫째 사위(부마)는 더 일찍 제거되었구요.


 제주도회원님들은 가시리에 있는 한천의 사당 충의재에 가면 이 내용을 읽을수 있습니다."공양왕이 원주에 방치되자 단양군 우성범, 진원군 강회계는 참하고 대제학 한천은 탐라에 유배되었으니..."라고 쓰여있을 겁니다.


 공양왕의 둘째딸인 정신궁주와 우성범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 보문각직제학 정홍鄭洪의 둘째 아들 정연鄭淵에게 시집을 가 있었습니다.

 당시 정홍의 집안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가 없었습니다.
 정홍은 知議政府事와 大提學을 지냈고 큰아들이 조선 개국주역 조준의 사위 정진鄭鎭이고 둘째 아들이 정연입니다.
 공양와의 딸인 정연의 장모가 정연에게 아비의 시신을 수습해 줄것을 부탁합니다.
 정도전이 王氏들을 배에 실어다가 바다에 수장을 시키던 시기..그래서 왕씨들이 성을 버리거나 성을 전씨, 옥씨로 변경하던 시기에...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그 시신을 수습해 정씨 문중묘역내에 안치시켰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1416년에 다행이도 공양왕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그때로 부터 5년이 지난 1421년인 세종 3년에 공양왕의 딸 정신궁주는 세종에게 장계를 올립니다.
"태종시절에 아비를 추봉하여 공양왕으로 하고 어미를 왕비로 하고 이어서 능호를 정하였습니다 그 후 예조에 명하여 호를 사급하고 법규를 정하여 관리한다 하였으나 아직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질 않고 있으니 노자한호를 복역시켜 수호하게 하소서"라고 하소연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후 어진을 옮겨준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가 없어서 주변 일대를 금제하질 못합니다.

 이에 정신궁주는 딸인 정연의 부인 영춘현부인단양우씨에게 공양왕의 무덤을 잘 지키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정연은 배위 영춘현부인단양우씨와의 사이에서 4子 3女를 두었습니다.
 첫째딸은 신숙주의 형 신중주에게 출가를 했고, 둘째딸은 太宗의 외손자이자 권근의 손자인 권담에게, 셋째 딸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용瑢에게 출가를 하였습니다. 
 네 아들은 自源자원, 自洋자양,  自濟자제自淑자숙입니다. 자숙은 松江 鄭澈의 증조부입니다.


 그런데 정연이 1444년 사망하자 문중에서 그의 무덤을 이곳이 아닌 파주군 갈현리에 쓰기로 결정합니다.

 정연의 부인은 네 아들에게 외조부인 공양왕의 무덤을 잘 지키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첫째 아들 自源은 맏이이기에 아버지병조판서 鄭淵정연의 묘 아래로 가고 둘째아들 自洋과 셋째 아들 自濟, 넷째 아들 自淑은 공양왕의 묘를 빙 둘러싸고 묘를 자리잡아 공양왕의 묘를 수호를 하였습니다.

 그 후 정자양의 손녀사위 신숙주의 아들 신형의 묘역이 조성되고, 외가로 상속된 이 곳에 신형의 아들인 신광한의 묘역이 1555년에 조성됩니다.


 신광한(申光漢)은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로 그의 집은 훗날 이승만씨가 거처했던 이화장(梨花莊)이었습니다.
 인종의 효릉을 이야기 할때 을사사화이야기를 잠시 했습니다만 을사사화 때 윤임 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기도 한 분입니다.


 정리하며는 공양왕릉과 같은 능선이면서도 왕릉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에 무덤을 쓴 최초의 인물은 정자양입니다.

 두 번째는 신광한(申光漢)으로 그의 묘는 공양왕릉에서 바라보면 정자양 묘 바로 뒤에 있습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무덤을 쓴 이는 신광한의 손자 신홍점(申鴻漸)형제입니다.

 이 중 신홍점의 사망연도(1600년)와 이곳에 석물을 설치한 년도(1607년)가 월사선생문집(月沙先生文集, 麻田郡守申公[鴻漸]墓碣銘幷序)에 나와 있습니다. 동 문집에는 신홍점이 죽기 전에 황해도 봉산(鳳山)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참고한다면 그 후손들은 그곳으로 낙향하여 1600년 이후에 더 이상 이곳에 무덤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숙종 원년인 1675년에 고양군 공양왕릉 북변 50보안에 숙위 윤씨의 묘, 도사 신율, 생원 신혁, 참의 정자양, 익위 신홍전, 충의위 신홍지등 6기의 묘가 있는 바 이들 50보안에 묘를 모두 파내라고 명하였다가 이들 묘의 대부분은 공양와의 외손과 외외손으로 공양왕의 묘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음이 인정되어 그대로를 인정하여 현재의눈으로는 이상한 모습의 형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통설로 떠도는 말처럼 조선 사대부들이 고려왕을 능멸하여 그 부근을 파훼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호의 방법이었던 것이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로 이곳에 묻히지 않고 갈현리에 조성한 정연 묘에서 5리 남짓한 곳에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와 인조의 비 인열왕후의 무덤인 장릉(長陵)이 있습니다.

 당초 장릉은 파주 북운천리에 있었으나 능침에 뱀이 들끓는다는 이유로 조선 말엽인 영조 때 지금의 자리인 갈현리로 이장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왕의 능역을 조성할 때는 주변에 있는 관청과 민가는 물론이려니와 사대부 집안의 묘를 모두 옮겨야 합니다. 정연의 묘 또한 장릉의 인근에 있었기에 당연히 이장해야 했으나 묘를 이장하려 하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이장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왕실에서도 마음데로 못하는 파워를 가지고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 공양왕릉 주변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 지역에 묘역이 없는 왕족을 위해 정씨일가에서 땅을 내어준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세종의 아들인 수춘군은 정연의 셋째 아들 정자제(鄭自濟)의 사위입니다.
 수춘군이 병환끝에 죽었을 때 무덤 쓸 곳을 구하지 못하다가 그의 어머니인 혜빈 양씨의 요청으로 수춘군 처가의 산인 고양 원당골로 장지를 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주이씨 대종회)
혜빈 양씨가 수양대군의 눈밖에 나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수춘군의 죽음을 챙기지 않을때 정자제는 사위 수춘군의 묘지를 이곳에다 마련해 준것이지요.


 정자양, 정자제 형제와 수양대군의 관계는 참으로 아이로닉합니다.

 정자양형제는 안평대군의 처남입니다.
그럼에도 이들 형제는 안평대군의 편에 서지 않고 수양대군편에 섭니다.
 안평대군이 군부인 정씨와 사이가 안 좋아 군부인이 죽기 전 7,8년을 별거했고, 죽었을 때 시신조차 확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분노한 군부인 정씨의 형제들은 안평대군이 아니라 세조 편에 섰기에 멸문의 화를 면하였습니다.


 공양왕릉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데 떠오르는 주변의 형세가 정치라는 격랑속의 인간의 비정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알아야 보이니
알려줄 것이 많아
쓸말은 많지만...
내가 지금 해야할 일이 있어
여기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