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조선왕릉답사 안내자료

하늘타리. 2015. 8. 22. 21:17

 조선의 왕릉을 찾아서 서울과 경기도 일원을 답사하러 오시는 답사회원님들을 환영합니다.

 그 날 하루는 회원님들과 함께 하며 열정을 한 수 배울까 합니다.


 조선의 왕릉은 공식적으로 세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있습니다.

 이것은 경기라는 지명이 왕도의 수호지역, 왕도의 외곽지역, 왕실의 보위지역이라는 것을 극명히 나타내 주고 있지요.


회장님과 오멍가멍님이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여 부가적인 내용의 전파가 필요없을겁니다만...

그래도...


 각종 백과사전에서 여기저기 발췌하여 간략한 소개를 한다면...


 경은 도읍을 뜻하고, 기는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나타내는 것으로 둘을 합쳐 京畿라는 정식지명이 나타난 때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1018년(현종 9)입니다. 995년(성종 14)에 설치된 개경 주변의 6적현과 7기현 중 왕경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12현을 묶어 ‘경기’라 부르고, 주현(主縣)인 개성현과 장단현(長湍縣)의 현령(縣令)으로 하여금 분할 통치하게 함으로써 지방행정조직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왕과 왕후의 능을 소재시켜 왕도와 왕실을 보위하고 왕실 경비의 일부를 지용(支用)하는 궁원전(宮院田)과 중앙관청의 공해전 등을 개성 주위에 집중시키고, 공신전(功臣田)·양반전(兩班田) 등의 사전(私田)을 외방 주현(州縣)에 둠으로써 왕실과 관청의 경비를 조달하였습니다.


 1390년(공양왕 2)경기는 처음으로 도(道) 단위의 지방조직으로 변모했고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되었습니다.

 당시의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개성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당성(唐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금주(衿州 :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과주(果州 : 지금의 경기도 과천), 서로는 안주(安州 : 지금의 황해도 재령)·연안(延安), 동으로는 철원과 포주(抱州 : 지금의 경기도 포천), 북으로는 곡주(谷州 : 지금의 황해도 곡산)·수안에 이르는 범위가 포함되었지요.


 경기 좌·우도는 태조·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다시 ‘경기’로 합칭되었고, 경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내려옴에 따라 수안·곡주·연안 등 이전 경기의 서북지역이 풍해도(지금의 황해도)로 환속되고, 광주(廣州)·수원·여주·안성을 비롯한 동남지역이 경기로 이속되는 등, 한양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 이루어져 말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병자호란과 이괄(李适)의 난 등을 겪은 인조대 이후, 경기의 네 요충지인 개성·광주·수원·강화에는 유수부와 함께 관리영(管理營)·수어청(守禦廳)·총리영(摠理營)·진무영(鎭撫營) 등의 군영이 설치되어 왕도와 왕실의 보위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의 경기는 고려시대와 같이 역대 여러 왕과 왕비의 능이 위치하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곳입니다.


 첫날하루 짧은 시간이지만 답사회원님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일정수립을 담당한 제기대님에게 답사노정을 수정하기를 요구했고 제기대님을 통해 답사회 공식문서로 서삼능 비공개지역에 대한 안내요청 등을 하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시고 다 모이시면 서삼능으로 갈예정입니다.


 서삼능까지 한 40분걸릴까요?

 서삼릉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현재와 같은 능역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입니다. 원래 제3대 태종의 헌릉 옆으로 택지가 결정되었으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중종의 정릉이 자리 잡았고, 아들인 인종과 인성왕후 박 씨의 효릉이 조성되었습니다만 중종의 정릉은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옆으로 옮겨 갔고. 이후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삼릉 이외에도 역대 3세자의 묘인 의령원(사도세자의 장자인 의소세손), 효창원(정조의 장자인 문효 세자), 소경원(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이 있고, 역대의 후궁, 왕자, 공주, 옹주등의 묘 51 기와 역대 왕의 태가 안장되어 있는 태실, 그리고 폐비 윤씨의 회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공개되는 것은 희릉, 예릉, 의령원, 효창원에 불과하고 희릉과 예릉은 강(묘를 쓴 둔덕)이 너무 높아 실제 무덤은 볼수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오른쪽에 자리한 한국마사회 종마목장에서 밀려오는 말똥냄새 와 왼편의 축협육우개량사업소에서 밀고오는 소똥냄새가 사람을 아주 피곤하게 하지요.

 그래서 답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비공개지역인 효릉과 회묘, 그리고 태실에 대한 안내요청을 했는데 효릉과 회묘가 위치한 농협중앙회젖소개량사업소 관할지역은 구제역을 이유로 절대 출입이 불가하지만 태실은 안내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만이라도 어디냐!!
 효릉과 회묘주인의 슬픈 사연은 책에서 읽는 것만으로도 그 아픔에 같이 동참할 수 있지만 한 시대를 주름잡던 그 막강한 왕들의 상징인 태실이 한곳에 불러모아져서  충혼묘지 병사들과 진배없이 한여름의 뙤약볕에 노출되어 있는 그 처연한 모습은 눈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도시화에 따른 개발 과정에서 쉴곳을 잃어버린 후궁, 왕자, 공주의 묘를 한곳으로 집장한 곳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가보지는 못하겠기에 그 아쉬움에...
 효릉에 대해 간략히 쓰면...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1515년에 태어났는데, 생모 장경왕후가 7일 만에 사망해 문정왕후 윤 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모인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탓에 초기 문정왕후의 삶은 그다지 녹록지 못했습니다. 신하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왕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문정왕후는 왕궁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의 쓴맛을 골고루  맛보면서 후일의 토대를 차곡차곡 쌓아나갑니다. 왕비가 된 지 20년이 다 되었을 때 드디어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는 20년 동안 세자(인종)의 방패막이로 자임했지만 이제는 세자가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정적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터에 뛰어들었습니다. 대윤과 소윤이 일으킨 광풍을 아시지요. 하지만 중종이 사망하자 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문정왕후의 정적들이 권력의 핵이 된 것입니다. 이 때 문정왕후는 장차 경원대군과 자신의 친정 가문을 죽이지 말라고 인종에게 눈물로 하소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약한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했습니다. 명종이 즉위하며 또 한번 광풍이 몰아칩니다.

 실록에서는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버지인 중종이 병이 나자, 인종은 옆에서 밤낮으로 갓과 띠를 끄르지 않고 음식 먹는 것도 금해 몸이 몹시 수척해졌다고 합니다. 또한 중종이 사망하자 머리를 풀고 맨발로 뜰 밑에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고, 다섯 달 동안 계속 곡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왕의 장례를 치르느라 몸이 허약해진 인종은 음력 5월의 폭염에 시달려 병석에 눕고 말았으며 급기야 일어나지 못한것이지요.

 인종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결정된 사유는 효심이 지극했던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우연히 병을 얻어서 부왕께 끝까지 효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부왕과 어머니 장경왕후가 계신 정릉 근처에 내 묘를 써야 한다. 또한 모든 내 장사는 소박하게 해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

 그래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으로 정해졌습니다만 부왕인 중종의 묘는 후일 다른곳으로 옮겨가버리고 말았지요.

 인종의 릉은 왕의 무덤임에도 병풍석이 없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의 눈치를 보느라고 그랬겠지요.

선조대에 인종의 부인 인성왕후가 사망하자 선조가 인종 곁에 장사 지내면서 인종의 릉 개수를 명해 병풍석을 둘렀다고 합니다. 면석에는 십이지 신상을, 우석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했는데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라 수많은 왕릉 조각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그 병풍석을 볼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그런데 이 인종은 참으로 박복한 인물인 듯 합니다.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를 잃고,
 왕위에 오르자 병치레 끝에 몇달만에 죽고,
 아버지옆에 묻히길 원했으나 아버지의 무덤은 옮겨가고..
 그것도 모자라 무덤이 불에 타기도 했습니다.
 숙종 30년(1704)에 수라간에서 일어난 불이 능상까지 번졌습니다. 왕릉을 태운 죄로 해당자는 사형 당하고 가족과 관리자, 참봉 등 관리인들은 천민으로 강등되어 귀양을 갔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것은 현재에도 능의 좌우사방이 전부 축사와 가축 배설물집적지로 막히었고 홍살문앞에는 철조망이 쳐있어 참도도 유명무실해 지고 외딴 섬처럼 방치되어 있습니다.


 비공개지역에 있는 또다른 묘인 회묘는 한 때 회능이라고도 불리었지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묘입니다. 윤 씨는 성종보다 열두 살 연상이지만 빼어난 미모로 숙의에 봉해졌고, 원비 공혜왕후가 사망하자 왕비로 책봉되어 그해 연산군을 낳았으나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아 죽은 후 지금의 경희대학교 자리 야산에 오로지 묘비만 세워져 있었습니다.

성종이 사망하고 왕이 된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가 윤 씨인 것을 알고 묘를 능으로 승격해 능호를 회릉이라 했습니다.
 능의 석물 또한 왕릉의 형식을 따라 조성했고 제향 절차도 종묘에 위패를 모신 연대 왕의 제사 절차에 맞추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능 자체를 훼손하지 않아 왕릉으로서의 면모는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은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회묘는 원래 서울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경희대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옮겨져서 또 다른 유배아닌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태실은 해설사가 안내해 줄것이라고 생각해 넘어가려고 하였습니다만 조금 다른 견해가 있어 몇자 더 적습니다.

 이곳에는 전북 금산군 추부면에 있던 태조의 태묘(태반을 묻은 묘)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왕 21위와 대군, 세자, 공주 등 모두 54위의 태를 한곳에 모은 태실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견해는 "일제는 태실의 형태를 일日자 형태로 만들고 묘석 높이도 3미터에서 1미터가량으로 대폭 축소해 민족정기 말살을 시도했으며, 서삼릉을 신사 참배의 장소로 쓸 목적으로 본래의 형태를 훼손해 공원으로 만들었다."라고 합니다.

 맞는 말일겁니다만 ...
 당시에 조선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왕직에서 전국각지에 산재해 있는 태실의 관리와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태를 창경궁(昌慶宮)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 서삼능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평가가 될 것 같습니다.


 당시 신문기사입니다.



태조이하 각태봉에 무수한 암장시가 들어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옮겨지지 않은 충주에 있는 경종태실과 예산에 있는 헌종태실 사진을 올립니다.



그리고 창경궁까지는 옮겨왔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곳으로 옮겨지지 않은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의 모습입니다.


현장에서.... 도열하듯 서있는 태실묘석을 보시고 마음속으로 비교를 해보세요.
 
 비공개자역의 태실을 안내받아 다녀오면 공개자역의 희릉, 예릉, 의령원, 효창원을 둘러보고 서삼능을 나섭니다.

 인근의 서삼능 보리밥집이 여러 방송에 나왔다고 하여 꽤나 유명한 곳입니다.
 그리고 맛도 있다는데 제 느낌속에서의 그 집은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운영자께서 주변 검색을 해서 싸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다음목적지인 서오릉으로 승용차로 30분이 않걸릴 테니 서오릉 부근 식당들이 평이 괞찮으니 한번 알아보세요.

 식사후 창릉, 경릉, 익릉, 명릉, 홍릉의 왕릉 5기를 비롯하여 수경원, 순창원의 2기의 원, 대빈묘 1기로 구성된 경기 서북부 최대의 조선왕릉군인 서오릉을 갑니다


 서오릉은 두시반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명릉의 능상개방시간이 두시반이거든요.

 저는 최근 유네스코문화유산에 지정된 곳은 가급적 가지를 않아요.

 유네스코 유산 지정이유가 보존과 창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레테르를 하나 더 달고보자해서 지정받은 후에는 권세를 얻었으니 누려보자고 보존을 이유로 접근을 아주 까다롭게 합니다.

 특히 왕릉같은 경우 정자각까지만 접근하고 정자각뒤쪽에 바리케이트를 쳐서 능침으로의 접근을 완전봉쇄하거든요. 그래서 능침옆에 어떤 석물이 있는지 이 능에 설치된 석물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살필 수가 없이 그냥 멀리서 쳐다만 보고 정자각과 비각만 기웃거리고 돌아 옵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곳 서오능 명능은 예전에는 아예 접근을 차단했던 곳인데 지금은 오전, 오후 1회씩 능상개방을 해서 관람자가 능침옆으로 올라가서 병풍석이나 석물들을 가까이서 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기대님에게 서오능관리소측과 연락해서 두시반에 명릉앞에서 해설사를 만날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해설사의 안내하에 능상이 개방된 명릉을 먼저 둘러보고 그후 문을 달리하는 다른 4기의 릉과 수경원, 순창원, 대빈묘를 찬찬히 돌아보려 합니다.


 서오능에서 나와 공양왕릉으로 갑니다.

 공양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와 이방원이 북면하여 모신 왕이고 (엄밀히 말하면 고려의 마지막 왕은 이성계입니다. 공양왕으로 부터 고려 왕위를 인수받아 명으로 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으며 조선왕으로 인정받은게 해 다음 해 봄이지요)
  그리고 이 왕능의 조성시기는 시기는 구체적이지 않지만 그 때가 언제든 조선조에 해당되지요.

  제기대님 최초 계획에 강남의 선정능을 답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선정릉이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파헤쳐져 그 안에 모신 분이 없다 라는 큰 슬픔이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고양에 왔으니, 일부러 다시 오기 어려우니 고려조 마지막 왕의 능을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하여 코스조정을 요구했습니다.

 공양왕릉을 가신다면 제가 공양왕능 안내 및 해설을 할것이고 선정능을 가신다 해도 그곳까지는 함께 움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