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답사한
대정읍과 안덕면의 고인돌을 찍은 사진을 정리합니다.
그 날 답사의 마지막 지점이었던 대평리 고인돌 앞.
이 고인돌 보다 더 고인돌인듯 싶은 곳이 있습니다.
이자리에서 차로 5분 더가서 걸어서 5분을 더가면
애기업개돌로 가기 직전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들이 무더기로 나옵니다.
세기씩 세곳
9개의 고인돌 덮개로 추정되는 돌이 있습니다.
한때는 대평리고인돌군이라고도 하더니 이제는 그 돌들은 고인돌이 아니라고 하네요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라고 하지요.
석기시대니 철기시대니 하는 것은
당시 인류의 다수가 사용하는 도구가 돌을 이용한 것이냐, 쇠붙이를 이용한 것이냐에 따른 분류이지만
청동기는 다수가 아닌 소수가 청동으로 만든 기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려 지배자가 자기 신분을 나타내는 어떤 위신재로서의 청동기물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고
그런 지배자가 죽은 후 그 들의 무덤으로서 지석묘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요사이 학교에서는 다시 고인돌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는데 일부러 지석묘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고인돌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돌을 고여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덤이 아니라도 상관없지요.
지석묘라는 용어는 돌에 의지해서 만든 무덤이라하여 그 만드는 방법, 만드는 도구 그리고 용도까지 다 표현 된 말입니다..
그래서 지석묘라는 말이 더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만...
최근에는 지석묘라는 말이 일본식 조어라해서 다시 고인돌이라는 용어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데
그렇게 말한다면 철학, 사상, 사회이론, 교육일반에 쓰이는 한자어 모두를 철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학문이 꽃피우는 시기에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있었고 일본에 의해 조어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유교라고 할까요, 유학이라고 할까요.
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조선 500년 학문의 주류, 아니 유일한 학문인 유학과
일제강점기 부터 이땅에 등장한 근대 학문들과의 차이는 통합과 분절입니다.
유학은 그 스스로가 종교이고 학문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철학과 사상과 교육 등 모든 것들이 유학의 한 영역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용어가 없었던 것이고
분절되는 학문에 필요한 용어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부터 도입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고고학은 참으로 기구하지요.
출발부터가 일본 고고학계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군부의 도움으로 약탈적 발굴을 하면서
낙랑군 유물조작 등을 진행하는 시기에
그 약탈과 왜곡의 주역들에게 배움받은 이들이 한국 고고학의 문을 엽니다.
일제가 식민지배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한국인의 역사적 자부심을 꺽으려는 방편으로의 고고학이 시작이 된 것이지요.
그 폐혜를 극복하려고 지금의 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듯 합니다만
그것이 본질에 접근해야지 말단 지엽의 용어문제에서만 맴돌면 곤란하지요.
하여간 고고학에는 관심이 있어도 접근하기 어렵고
접근하더라도 전문가의 판단이 아닌 개인의 견해는 아무 가치가 없으니 점점 멀리하게 되어
누구에게 같이 가보자는 말이 상당히 망설여 지는데
용감한 흑군태자덕에 고고학적 유물을 다시 둘러봅니다.
신도리 고인돌을 제일 먼저 갔지요.
올레꾼들에게는 바당올레 도구리 해안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바닷가 옆 입니다.
농로길을 넓히고 다시 포장하면서
길옆에 엎어져 있던 돌을 둔덕위로 올려 뒤집어 세우고 고인돌이라는 안내문을 세웠습니다.
문화재 위원회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아니지만 올레길 옆 볼거리를 만든 것이지요
어디가 원래의 상단인가는 모르겠습니다만 돌을 엎어 놓으니 성혈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옵니다.
성혈은 바위표면에 홈처럼 파여진 구멍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간단히 cup-mark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性穴이라고 쓰기도 하고 星穴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성혈의 의미에 대한 다른 해석 때문에 그렇습니다.
S.Muller는 성혈이 불씨를 만드는데서 생긴 것으로 보았고
G, Schwates는 죽은 이에 대한 경외의 표현으로,
J, Maringer는 태양숭배의 사상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이럴때는 cup-mark의 번역을 星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혈을 별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북한의 견해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이 성혈을 性穴이라 하여
풍요와 생산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학자가 우리나라 최장수교수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정년퇴직한 최몽룡이지요.
그 앞에서 감히 다른 의견을 입에 담을수 없었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고인돌을 세운 후 후대에 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혈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져
심심해서 파놓았다에서 부터
종교적의미가 있다까지
여러가지 의미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서림저수지로 갔습니다.
그 입구옆에 지하 무덤방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인 개석식 고인돌이 있습니다.
고인돌은 통상 북방식, 남방식, 그리고 지석이 없는 개석식 이렇게 세가지로 구분된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우리 나라 고인돌을 크게 두가지,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분류합니다.
남방식 고인돌은 매장시설의 주요 부분이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우선 매장시설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과 형태상으로 구분된다고 하며
개석식은 별도의 형태가 아니라 남방식 고인돌의 형태에 속한다고 합니다.
속 시끄러서 그런지 요새는 고인돌의 형태를 일반적인 고인돌 형태인 탁자식 고인돌과 함께
기둥모양 받침돌이 있는 바둑판식(碁盤式),
지하 무덤방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인 개석식 고인돌이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곳의 개석식 고인돌은 문화재위원회에서 인정 받은 곳이 아니니 누군가가 개간을 한다고 치워도 할 말은 없는 곳입니다.
일과리 지석묘입니다.
도지정 기념물로 2005년에 지정된 곳입니다.
밭주인이 밭을 정비하면서 모조목재로 된 울타리를 치우고 지석묘쪽으로 바짝 붙여 산담을 쌓았습니다.
정성은 갸륵한데 속은 보이네요.
그리고 고인돌의 전체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져서
결국 밭을 질러 산담으로 다가가야만 합니다.
옛 구분에 의하면 남방식에 속하며 받침돌은 남쪽 양쪽에만 있습니다.
동일리지석묘로 갑니다.
대정읍 동일리 1628일대에 있는 동일리 지석묘 1, 3, 4호입니다
지석묘 2호는 약 200미터 동쪽에 있습니다.
2005년 10월 같은 날 지정했으면서 일련번호를 지그재그로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1호의 뚜껑돌의 장축은 255cm, 2호의 뚜껑돌의 장축은 253cm로 큰 편입니다.
3호와 4호는 218 그리고 205cm입니다.
3호와 4호의 설명문중 3호에서는 홈줄이 보이나 홈줄에 관한 설명은 없고
4호에서는 홈줄이 보이지 않으나 뚜껑돌 남서쪽에 나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서로 바뀌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지석묘 안내문에서 제주도의 고인돌은 한반도와는 달리 청동기시대가 아닌 탐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지금부터 대략 BC 12,000년경부터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구석기시대가 BC 70만 년경부터 시작되어 BC 8,000년 까지 이어 졌다고 하니
구석기말기에 한반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지요.
BC 8,000년경에 신석기시대를 맞이 하고
인류적으로는 청동기시대는 BC 6,000년경인데
한반도에서는 청동기를 BC 2,000년에 맞이했고
초기 철기시대를 BC400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 다수의 의견입니다.
우리나라 고고학 편년상 초기 철기시대 이후인 BC100년경 부터 고구려·백제·신라 형성기인 300년까지의 약 3세기간을
원삼국시대,
Proto-Three Kingdoms Period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원후 100년부터를 통상 탐라시대 전기라고 하지요.
예전에는 주호시대라는 표현도 썼습니다.
어쨓든 제주의 고인돌은 육지부에서처럼 청동기시대가 아닌 그보다 한참 뒤인 초기 철기시대 이후에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제주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된바 없어 청동기시대가 없었다고 보고
지배와 피지배의 구분이 나누어지는 시기적 특색에 맞추어
탐라시대 전기에 고인돌이 출현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육지부에서는 이시기에 벼농사의 발전에 따른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가 있었고
고인돌이 소멸하면서 석곽묘라고도 하는 돌덧널무덤이 발달하게 됩니다.
빠르고 늦고가 아니고 생산방식의 차이가 문화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육지부에서는 대략 4세기경에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함으로써 원삼국시대는 종결되고 삼국시대로 진입합니다.
하모리 고인돌로 갑니다.
올레길 옆에 있어서 최근 꽤 많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고인돌이기도 합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42cm, 폭 185cm, 두께 60cm입니다.
덮개돌의 전체 모양은 삼각형에 가깝고 매장 시설은 지하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계속 높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푹꺼진듯하여 어찌 고인돌로서는 이상한 형세가 되어 있습니다.
화순리 지석묘로 왔습니다.
2004년 남제주군 문화유적분포지도에 고인돌이라고 명시하였으나
그렇게 규정한 이가 누군지가 기록에 없습니다.
아래 사진 포함 두기 모두 지정되어 있지 않아 아무런 보호책이 없으나
밭 경계지점 구분석으로 딱 좋은 용도라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그냥 이자리에 있습니다.
제주도 고인돌 중 가장 최근인 2011년에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된 화순리 지석묘 1호입니다.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회에서 문화재 지정을 예고하면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화순리 지석묘는 지상 위 석식의 전형적인 제주도식 지석묘다.
판석형 지석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상석아래 가장자리 부분을 둘러싼 지석묘 형태를 띄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제주시 용담동 6호 지석묘와 유사하다.
이러한 형식의 고인돌은 제주 서남부지역에서는 보기드문 것으로
지석묘의 규모나 형식으로 보아 화순리 유적의 무덤양식을 보여준다는 데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만....
2004년 부터 남제주군 문화유적분포도에 고인돌이라 특정하였던 곳인데
비닐하우스안에 있어 본 사람이 몇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세계유산연구소에서 밝힌 2010년 4월 한라일보기사에 의하면
2010년 2월 과수원을 정비 조성하는 과정에서 지석묘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굴착하는 바람에
지석묘 주변이 알아볼 수 없도록 훼손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모습입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지석묘는 화순리 유물산포지 제2지구에 위치해 있고,
화순리유적 문화재 보존지구와는 불과 30m 정도 떨어져 있다.
문화재보호법상의 저촉을 받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행정의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석묘는 현재 상석 자체가 지표에서 1~2m 정도 위태롭게 떠있는 상태로 놓여 있다.
상석 주변으로는 5매의 지석이 드러나 있고, 하부구조 일부도 공사과정에 훼손돼 노출돼 있다."
공사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인돌의 훼손 사실이 알려지고 문제가 일어나자
서귀포시 문화재담당은 "지난 2월에 훼손된 것을 알고 공사를 중지시켰다"며
"앞으로 원상회복 시키고 문화재지정 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부터 문화재 지정절차를 밟아 2010년에 먼저 표시판을 세우고 문화재위원회에 심의를 올렸습니다.
그결과 2011. 4. 29일 도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 의결 되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입니다.
토지주의 자진신고로 문화재등록이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없어질 뻔 한 것이 구샤일생으로 살아 남은 것이지요.
살아남았으 나 주변을 빙둘러서 커텐이 쳐지듯 비닐하우스가 들어섰습니다.
답사당일에는 비영농철이라서인지 아무 제한 없이 들어갔습니다만
경작이 한창일때는 타인의 출입을 금하기 때문에 입구의 문을 잠금니다.
당연히 문을 잠구었을때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문밖 어디에도 이 비닐하우스문을 들어가야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는 표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등 문화재전문가들은
"제주도가 스스로 문화재로 지정을 해놓고 관리에 대해서는 손을 놓고 있다"며 강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옆 안내문이 무색합니다.
화순리 보막은소 옆 봉우리로 갑니다.
동행들은 씩씩하게 올라가고 나는 올라가는 이들의 뒷모습만을 봅니다.
그 이유는 다른글에서 밝힌바 있으니 생략합니다.
보막은 소 옆에서
봉우리를 쳐다 봅니다
창천지석묘 1호로 갑니다.
1990년에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사면이 심한 두 개의 밭 경계에 있습니다.
길이 250cm, 폭 235cm의 덮개돌은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인데,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 3군데에 높은 받침돌을 고였습니다.
현재 남동쪽 방향은 받침돌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무덤방 내부에는 시신의 베겟돌로 보이는 돌이 하나 남아있고
적갈색 민무늬토기 조각이 몇 개 보입니다.
그 자리에서 군산이라고도 하는 굴메 정상을 한번 올려다 보고 오늘의 마지막 지점으로 갑니다.
고인돌이다. 고인돌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다. 설왕설래하는 동행들의 이야기를 한쪽 귀로 흘려 들으며...
한라산을 봅니다.
그렇게 하루의 답사를 마쳤습니다.
많은 생각에 머리가 피곤한 ...그러나 마음은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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