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제주도 애월읍 광령리에서 고성리를 지나 장전리로 가면서 들러본 몇곳

하늘타리. 2014. 12. 30. 23:28

12월 21일

광령리 사라마을입니다.


올레코스를 걸을까하고 집을 나서 광령교인근에서 버스를 내렸습니다.
광령천을따라 내려가다가 사라마을다리앞을 지나는데....
다리를 건너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광령리쪽으로 다리를 건넜습니다.

올레코스를 계속 가려면 다리를 건너기 전 도평동지역으로 돌아가 외도쪽으로 쭉 내려가야 하는데

발길이 광령리 지경 사라마을 어느 골목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민가담장에 기대어 있는 방사탑으로 갑니다

 

처음부터 민가담장에 기대어 있지 않았겠습니다만.. .

빈터에 집들이 들어서다보니 올레가 막히고

그 막힌 올레에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고 

 그 뒷집이 담장을 넓히다보니 담에 기댄 형세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동네 어른에게 듣기로는 옛날 그곳에서 도들봉이 보여서 그 허한 기운을 막으려 세웠다고 하는데

향토 사전에는 마을 가운데 ‘대석(大石) 동산’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 곳을 향하여 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대석 동산’이 있는 쪽에서 액이 온다고 믿고 있었다.

그곳에서 살(殺)이 비쳐와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방사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돌탑은 액을 막고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마을 가운데 액이 있다고 하면 말이 않되지요.

 

집 뒷켠에 있어서 살펴보기가 좀 애매하여 구조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구조는 향토사전에 쓰여진 글을 옮기겠습니다.
"돌탑은 윗면에서 보면 사각형이고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으나 시각적으로는 사각형과 흡사해 보인다.

돌탑의 규모는 상단 너비가 동서 방향 227㎝, 남북 방향 284㎝이고,

하단 너비가 동서 방향 225㎝, 남북 방향 298㎝이다.
돌탑의 윗면은 약간 불룩하고 그 가운데에는 길쭉한 돌을 세웠다.

돌의 방향은 북서향이고, 재질은 조밀한 현무암이다.

크기는 56.0㎝, 폭 11.0㎝, 너비 23.0㎝이며,

쌓음석은 구멍이 많은 현무암을 거칠게 다듬어 허튼층 쌓기를 하였다."

 

이 방사탑의 축조시기는 조선시대입니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다른 어떤 마을의 방사탑은 일제강점기에 축조되었어도,

부서지고 형태가 달리 최근에 다시 만들어 졌다해도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 방사탑은 만들어진지도 오래되었고

그 고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도 그냥 동네 한구석에서 처연히 서있습니다.

 

동네가 작아서 방사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가 사라紗羅라는 말이 불교에서 나왔다고 하데요.
나름 제주에서는 이름이 있다는 어느 학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길...
"제주의 사라오름, 사라봉 등에 쓰이는 사라라는 이름은 불교적인 의미로는 깨달음과 알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며

"제주는 불교적 영향을 받아 범어가 많이 남아 있다.

한라산을 나한산이라고도 표기하며

오라, 아라, 사라등의 지명은 불교 범어 용어이다"라고 얼굴색하나 않 변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말이 많이 인용되는데...

불교 경전 어디에도 사라라는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굳이 찾아 본다면 선禪의 유래라고 하는 가섭존자와의 삼처전심을 들수 있습니다
영산회상 염화미소(靈山會上 拈華微笑),

다자탑전 반분좌(多自塔前 分半座) ,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
이중에서 두그루씩 심어진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하신 부처가

가섭존자가 돌아와 세번 관을 돌고 세번 절하자 두다리를 내어 보이셨다는 이야기에서 사라가 나오지요.
즉 사라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도의 어떤 나무이름을 한문으로 음차하다보니 사라라고 쓰였을 뿐입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라紗羅,
뜻,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이라고 나오고

 

성서에서 찾아보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이자 이삭의 어머니의 이름이고

전설에서 찾으면 다빈치 코드,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등의 소재가 되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탄생하여 예수가 죽임을 당한 후

어머니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아리마대의 요셉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탈출,

지금의 프랑스로 피신하였다는 어린 소녀의 이름입니다.

 

굳이 또 끄집어 내자면 1959년 9월 추석 때 제주도 및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태풍의 이름입니다.

근세이후 가장 피해를 크게 입힌 태풍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 후에 발생한 태풍들은 종종 태풍 사라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동네는 지금 놓여 있는 다리 자리에 한라산으로 부터 쓸려온 모래가 가득 쌓여 사라라고 불리었던 것을

한문으로 사라紗羅라고 음차한 것입니다.
300년전 하천의 동쪽으로는 경주 김씨가 들어와 살았고

서쪽으로는 제주고씨가 들어와 살았지만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여 양쪽 마을 모두를 합쳐도 50호를 넘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하천 동서쪽 모두 사라마을이라고 하지만

하천 동쪽마을은 제주시 도평동이고

서쪽 마을은 애월읍 광령리에 속한 서로 다른 마을입니다.

 

 

방사탑에서 보이는 부근 공터 한구텅이에서 덩굴에 덮혀가는 나무를 봅니다.

 

올레길을 포기하고 어디론가로 걸어갑니다.
아마도 지난주 답사회에서 방사탑답사를 하면서 이마을을 지났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내 발길이 이곳으로 온 것 같으니

다음 행선지 였을 곳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소길리를 찾아가

그 마을을 찬찬히 돌아볼까 합니다.


골왓마을과 사수동을 지나서 이곳으로 왔다면

광령리에는 다른 방사탑이 없으니 고성리 방사탑이 가장 가까운 지점입니다.
광령리에도 기록에는 또 다른 방사탑이 광령2리 마을회관옆에 있었다합니다만

방사탑은 흔적도 없고 방사탑이 있던 자리옆에서 나오는 물이

거악대물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광령리북부를 동에서 서로 가로 질러 고성리 보름이 들판쪽으로 왔습니다.

 

고성리 방사탑입니다.

 

고성천이 흘러 내려와 새로 공사한 1136번도로아래를 지난 곳에 알작지소가 있습니다.

그 알작지소 옆에 고성리에서 바굼지 오름쪽으로 쌓은 방사탑이 있습니다

 

쌓을 당시에는 여기가 고성리 주거지역 북단에 해당되어 북에서 다가오는 삿된 기운을 막아 주었지만

지금은 대단위 휴먼시아아파트가 더 북쪽에 있으니 글쎄요....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부의 모습은 남아있는 알작지를 보고

 

 

다시 방사탑을 봅니다.

하천 넘어 왼쪽 던덕모르에 예전에 당이 있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을까요.
그 당시도 폐당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찾지도 못할 겁니다.

 

고성리 마을로 갑니다.

고성리마을이 언제 설촌되었을까요?

누구는 이곳에 있는 항파두성의 예를 들어 고려말부터라고 침을 튀깁니다.
하지만 땡이라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곳 고성리는 삼별초가 붕괴된 이후 사람이 살지 않았지요.
그러다 약 200여년이 넘게 흐른 1600년에 박언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고성1리로 들어옵니다.
이 박언이라는 사람은 임진왜란 종료직후 조정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아닌 남의 탓잡기로 해서

조부와 부친이 죽임을 당하자 29세의 나이로 벼슬을 사임하고

모친 김씨를 동반하여 제주도로 내려옵니다.
주거지를 연화촌(지금의 연동)으로 정하고 제주 향교에 출입하면서

당시 제주목사 성윤문을 향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이런 저런 대화끝에 박언의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성윤문목사는 박언의 아버지와 한 때 막역한 사이였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윤문 목사는 박일에게 모친을 모시고 어느정도 편히 지낼수 있도록

귀일촌 남쪽 고성천변에 큰 집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장소가 지금의 마을 부근입니다.
그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후 귀일촌이 하귀리와 상귀리로 분할될때 상귀리상동에 속했다가

고종때인 1884년에 신우면 고성리로 분리되었습니다.

 

고성촌 다리옆 복개지부근에 서있는
김영흥의 시

무화과

"이른 봄 한 모서리
외로운 잔가지들
별 나비 멀리 하여
동정으로 맺은 인연
목 축일 한 줌 햇살도
은총으로 받아 든다
바람 탓은 아니다
하늘의 일일 게다
고뇌의 잔을 들면
앵돌아 토라진 몸짓
몸부림치는 저 생명. "

 

고성천 다리아래로 내려 가서 고성천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고망난 바위
주변이 깨끗하지 않아서 다시 다리위로 돌아 갑니다.

 

선돌쪽으로 가다가 만난 마을 운동장

 

1934년에 고성리 마을에 2년제 간이학교가 들어섭니다.
간이학교입니다만 마을사람들이 호별할당금을 설정하여 갹출하였고

부족한 금액은 재일교포의 지원을 받아 주변 마을과의 경쟁속에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1943년 국민학교로 승격하였으나 48년 4.3때 학교가 전소됩니다.
4.3이후에도 학교는 다시 문을 열지 못했고 운동장만 덩그머니 남아 있게되었죠.
1971년에 그 땅을 팔고 이곳에 부지를 매입하여 조그마한 운동장을 조성했습니다.
그 후 2000년에 고성목장조합에서 인근 땅을 매입 마을에 기증하여 지금의 크기가 되었고

2003년 관람석을 만들며 잔디구장으로 재조성하였고

그 후 조금 조금 개보수를 해오다가 금년 4월에 완공비를 세웠습니다.

80년만에 완공된 운동장이네요.

 

운동장 한곁 그런대로 오래되었을 듯한 나무를 찍어봅니다.

 

선돌로 갑니다.

 

고성리 선돌은 다음 지도에도 등재되어 있는 곳입니다만 마을에서는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제주도청 홈피 제주소개 제주문화란에

故 김병수(金秉洙)씨가 제주설화집에 구전으로 제보한 것을 살을 붙여 실었다고 하여 

이곳 고성마을 동쪽 선돌목을 포함

서쪽은 거제비 위쪽 성동산에, 남쪽은 상듸촐왓 위쪽 구석에, 북쪽은 알작지소에 있었다고 하며

이런 저런 스토리가 적혀 있습니다만

이곳의 선돌도 선돌임을 아는 이가 극히 적고

다른 지역 선돌에 대해서는 아무리 나이드신 어른이라도 아는 분이 없습니다.

 

선돌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동구시물로 갑니다.

 

 

동구시물 마께왓당입니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광령리 끝자락이 될겁니다만 고성리 주민들이 광령당 송씨아미를 가지갈라 모셨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다니는 이 없어 당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고성리 선돌이 동서남북에 있었다고 하듯 당도 동서남북에 있었습니다.
동쪽은 동구시물에, 서쪽은 성내골에, 남쪽은 백토골에, 북쪽은 던덕모를에,

그리고 장털왓에 장털일레당까지 해서

5개의 당이 근세까지 내려왔으나 지금은 모두 그 흔적조차 희미합니다.

 

동구시물에서 고성리 마을쪽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다시 고성천으로 내려가 봅니다.

서있는 선돌을 봤으니 그에 대응하는 고망난돌이 다시 생각나서입니다.

 

예전에는 하천으로 내려가는 길도 잘 정비되어 있고 주변도 깨끗했습니다만

지금은 길은 남아 있으나 주변이 깨끗하지를 않습니다.

 

이리로 계속 올라가면 폭포가 멋있던 웃작지소가 나오고

가시나물동산을 지나 먹통소가 나오고

더 올라가면 산세미가 나오겠지요.

하지만 가지 않으렵니다.

 

길을 따라 상귀리지경 항파두리성아래 구시물을 지나갑니다.

 

 

 

 

최근 복원한 옹성이 보입니다.

 

옹성아래 옹성물로 갑니다.
가는 길에 극락사 대웅전 측면이 보이네요.
여기 탑이 언제부터 있었나?

패쓰


옹성물입니다.

 

옛 기록에 옹성물은 옹성안에 있었고 신분이 높은 이들이 이 물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복원한 옹성 밖에 있으니 옛기록이 참 허무합니다.

이 자리를 먼저 차지한 절집때문에 옹성위치가 바뀐것은 아니겠지요.
이 절집도 1928년 창건시 극락極落오름 기슭에 있던 것이 1948년 불타없어지고

1957년 이곳에 다시 세워지니

절집이름이 極落寺가 아닌 極樂寺가 되었습니다.


종각속 종앞에 반가좌하신 부처가 계신데 종소리도 안들릴만큼의 사유속에 계신듯 합니다.

 

장수의 발자욱이라는 장수물을 지납니다.

 

 

 

 

장전리 지경이네요.
학생 송처권처 열녀박씨 지려

열녀비입니다...

 

제주의 열녀비, 효열비 중 여러 곳이 조정에서 내려온 정려에 의한 것이 아닌

집안 후손이 세운 것이 많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것입니다만

이 비석은 비석자체는 볼품이 없을지 몰라도 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19권, 16년(1816 병자 / 청 가경(嘉慶) 21년) 6월 8일(병진) 2번째 기사'
"예조에서 이현·이경법·남수일 등의 효행·군공 등에 대하여 상을 줄 것을 청하다

예조에서 여러 도의 유생들이 올린 글로 인하여 도의 조사를 거친 뒤에,

지평(砥平) 사인(士人) 이현(李玹) , 포천(抱川) 학생(學生) 이경법(李敬?) , 청주(淸州) 학생 조성빈(趙星彬) ,

평산(平山) 의 고(故) 동지(同知) 채영창(蔡永昌) , 강릉(江陵) 사인 김철휘(金喆徽) 에 대해서는 효행(孝行)으로,

황간(黃澗) 의 고(故) 현령(縣令) 남수일(南守一) ,

고성(固城) 의 고(故) 동지 최균(崔均) 과 그의 아우 고(故) 부총관(副摠管) 최강(崔堈) 에 대해서는

임진 왜란에 의병을 일으킨 것과 갑자년3683) 에 세운 군공(軍功)으로 모두 증직(贈職)할 것과,

파주(坡州) 학생 이연희(李演羲) 의 아내 최씨(崔氏) , 연일(延日) 의 공생(貢生) 정일극(鄭一極) 의 아내 박성(朴姓) ,

청주 의 양인 권한손(權汗孫) 의 아내 장성(張姓) , 태인(泰仁) 의 사인 김재흠(金載欽) 의 아내 나씨(羅氏) ,

제주(濟州) 의 유생 전형원(田衡元) 의 아내 양씨(梁氏) , 유생 오융복(吳隆復) 의 아내 김씨 ,

아전 손처권(孫處權) 의 아내 박성(朴姓) ,

대정(大靜) 유생 김창은(金昌銀) 의 아내 김씨(金氏) 에 대해서는 열행(烈行)으로,

공주(公州) 의 증(贈) 좌랑(佐郞) 김응려(金應礪) , 삼척(三陟) 의 고(故) 숭정(崇政) 이상호(李尙虎) ,

김제(金堤) 의 사인 홍수벽(洪壽璧) , 제주(濟州) 의 목자(牧子) 고윤문(高允文) 에 대해서는 효행으로,
순천(順天) 의 고(故) 첨사(僉使) 김대인(金大仁) 은 임진년에 세운 절개로 모두 정문(旌門)을 세워줄 것과,

함양(咸陽) 의 유학(幼學) 조성윤(曹聖允) , 자산(慈山) 의 백성 이오(李烏) ,

금산(錦山) 의 백성 명관덕(明觀德) , 고부(古阜) 의 출신(出身) 김윤상(金胤祥) 과 그의 아들 진사 김기섭(金基?) ,

제주(濟州) 의 양인 임성언(林成彦) , 정의(旌義) 장교(將校) 현윤경(玄胤慶) 에 대해서는 효행으로

모두 복호(復戶)해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 중기이후의 충, 효, 열에 대해 포상한 기록입니다.

 

그 옆 충혼비

제주에는 마을마다 충혼비가 있습니다만 그만큼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가운데는 이곳으로 정려비를 옮겨오고 충혼비를 세운 누군가의 유공기념비입니다

 

 

장전리 고지물 일뤠할망당

 

이곳은 아직도 누가 다니시는가 봅니다.

 

지전 물색이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한때의 장전마을 생명수 고지물입니다.

 

 

장전리를 지나 갑니다.

 

1986년에 이 도로를 포장했지요.
향리출신 기업가들이 돈을 보탰습니다.

소길리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