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김천 황악산 직지사

하늘타리. 2014. 8. 1. 08:00

 동국제1가람황악산문 직지사입니다.

 

안내판에 쓰여진 공식설명을 보시지요.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라는 가르침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한번 돌이켜 보기만 하면 그 즉시 깨어난다"라고 해석됩니다.
달마의 제자였던 혜가(慧可)가 불도(佛道)를 얻는 법에 대해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게 된다는 것이지요.
자기 마음이 참된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여 밖에서 도를 구한다면

많은 세월을 수행으로 보내고, 애써 경전을 베끼고, 끼니를 잊으며 경전을 외우더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보람도 없이 힘들기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곧바로 알면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온 ‘직지(直指)’는 ‘곧바로 가리킨다’는 뜻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直指心經)”의 ‘직지’이기도 합니다.

 

직지사가 위치한 황악산은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으로 불리웠고,

지도상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직지사의 현판을 비롯, 택리지등에 황악산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산에 수림이 울창하고

산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은 곳곳에 폭포와 소를 이뤄 그윽한 계곡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각배치도

 

직지사 한켠에 있는 다실입니다.

 

다반향초라는 간판이 보이네요.


다반향초는 차를 즐기는 곳에서 가장 많이 보는 글귀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

중국 송나라 시인인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의 시구로

추사 김정희가 자주 애용했다는 다구입니다.

통상 차는 반을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라고 해석하는데

저는 차를 반쯤 달이니 향기가 이제 일어나고...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얕은 지식으로 건방떨지말고 빨리 표끊어 들어가야지요.

 

여초 김충현이 쓴 동국제1가람황악산문현판아래를 지나 매표소로 갑니다.

 

매표소 옆으로 직지사 시비가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된 시비에는 백수 정완영의 ‘직지사운’이란 시조를 일중 김충현이 썼습니다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
   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

 

대다수의 산사에서

산문을 지나 속세와 불가의 경계를 나누는 영역인  다리까지 가는 길이 다 나름 운치가 있습니다만

이곳도 고즈녁한 숲길이 펼쳐집니다.

 

숲길 그 자체보다 숲길이 주는 이미지에 빠져듭니다.

 

 

 

 

숲길의 끝에 다리가 나옵니다.

 

다리를 건너기전 왼쪽 옛길

한국의 명수로 꼽히던 직지사 약수정으로 가던 길입니다.

한국의 명수로 이름을 날린 직지사 초입의 약수터가

2005년 6월 이후 1년간 매달 수질 검사 결과

음료 불합격 판명으로 나타나 잠정 폐쇄결정을 내려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다시 맑은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만세교 옆 계곡 오솔길 약수정 바위 표지판은 없어지고

끝까지 가는 길도 없어지고

약숫물도 없어졌습니다.
직지사와 관계자의 무관심이 전국에서 가장 물이 좋다고 하던 약수터를 폐쇄시킨 것이지요.
수도가 콸콸나오는데 무슨 약수가 필요하냐고 하면 나는 할말은 없습니다.

 

다리를 넘어가 비석군을 봅니다.

 

비석군앞 이정표

 

행적비와 공덕비

 

꽤나 기막힌 이야기
포월당김봉율화상 행적비

나라가 바로서지 못하면 정사가 위사속에 파묻히고 인심이 어지러우면 진실이 비리앞에 고개를 들지못한다.

여기 외로웠던 날의 한 스님의 행적이 있으니

그가 바로 1927년부터 1948년까지 직지산문을 지키다가 뜻하지 않은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룬다음

그 여독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뜨신 포월당 김봉율 주지스님 바로 그 분이시다.

김봉율 스님은 1897년 6월23일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에서

아버지 선산김공 병문과 어머니 김해 김씨 하림의 3남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해인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해인학림에 들어 수학했으며 후일 일본경도 불교대학을 졸업했다.

직지사 퇴운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나

그 당시 나라잃은 울분을 가슴에 품었던 우국지사가 다 그러했듯

스님은 산문이 당신의은신처요 불보살이 당신의 호신불이었다.

이래 60성상의 남선북마 3.1운동때는 해인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전국 사찰을 두루 돌며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3년 옥고를 치르기도 했었다.

1919년 만주 신흥 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입교하여 광복군으로 광야를 달리다가

 다시 국내로 잠입  체포되어 또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풍찬노숙 스님의 가사자락은 마를 날이 없었고 6.25동란에 두 아들까지 나라에 바쳤건만

광복된 조국은 자기 정권에 편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웠다.

이래 반세기 이 오욕의 굴레를 벗겨드리기 위하여

오직 두점 혈육인 송자. 죽자 자매와 상좌 일당 스님의 불망의 노력으로 백일하에 신원이 되고

1996년 건국훈장을 추서받아

여기 돌 한덩이의 등불을 밝혀 공양 드리오니

불굴의 지사시여

스님이시여

왕생극락 하사이다.

합장 드립니다.

 

이런저런 군수 공덕비

 

 

직지사 안내도와 그 앞 바짝 마른 수조

 

안내도를 복습하고

 

또 다른 마음가짐으로 숲길을 걷습니다

 

 

 

직지사사적비와 선사비

가운데 기적비는 글은 조종저가 지었고 글씨는 낭선군 이우가 썼다고 합니다.

이 비에서 능여能如 스님이 자를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터 닦을 곳을 가리킨 데서

직지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비에서도 언급되지만 직지사는 고려 초부터 크게 사세가 확장되었습니다.

그 단초는 능여 스님이 어려움에 처한 고려 태조를 도와주면서 마련되었으며,

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에 이르기까지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지요.

왕건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했을 때

신숭겸 장군은 다급한 나머지 왕건에게 병졸 복장을 갈아 입혀 도망을 치게 하고

본인이 왕건인듯 적병을 유인하여 결국 목이 잘린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만

그때 왕건이 피신한 곳이 바로 이곳 직지사입니다.

 

이어지는 숲길을 걸어 일주문으로 갑니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3문(三門)과 2루(二樓)가 있었다고 되어있는데

삼문의 첫 번째가 일주문입니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이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친 일주문은 다른 이름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며

 사천왕문, 천불전과 함께 임란의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입니다.

 

"黃岳山直指寺"라는 현판 글씨는

송설체로 유명한 원나라 조맹부의 필체로

송하 조윤형이 1770년에 쓴 것입니다.

 

직지사 일주문의 기둥은 천년묵은 싸리나무와 느티나무로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당우들은...
관광객과는 거리가 조금 멀지요.

 

대양문

 

다른 절에서는 본 기억이 없지요.
부처님의 큰광명을 상징하는 제 3문이라하며

1990년에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 신축되었습니다.

한학계의 거두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선생이 현판을 쓰셨습니다.


좌우 그림을 찬찬히 보면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

원효가 해골속의 물을 마시고 그 다음날 아침 깨우쳐 신라로 돌아온 이야기가 생각나실겁니다.

 

구석기라는 시인도 '직지사 대양문 익공'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직지사에
얼음의 문門과
폭설의 문門 사이
따사로운 볕으로 지어진
문門이 있어
덜썩 주저앉은 원효가
해골 속에 담긴
햇살 한 바가지 들이키자마자
새의 부리에
물고기의 비늘과
닭의 벼슬을 지닌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치켜들며
절 한 채 끌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는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닫혀있는
해탈의 저 마지막 문고리를
하염없이 잡아당겼다."

 

대양문 양쪽에는 인왕이 그려져 있습니다.

 

응향각이 보입니다.

응향각이란 본전에 올릴 향을 준비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법회의식을 담당하는 스님의 거처를 말하는데 요새는 이런 저런 용도로 쓰이지요.

대구의 파계사는 아마 종무소가 응향각일것이고

가까운 직지사의 말사로 석장승이 인상적인 상주 남장사는 조사전으로 쓰이지요.


금강문을 지납니다.

 

 

내부 왼쪽

 

내부 오른쪽

아까 대양문 좌우에 있던 두분 인왕과 이곳 두분 인왕은 다른 분일까? 같은분일까?

 

문하나 더 만들어 달아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는데

인왕은 여기 계셔야 옳은가요

 아니면 대양문에 계셔야 옳은가요?

대양문에서서도 아~, 훔~
금강문에서도 아~, 훔~

 

직지사 금강문에는 전설하나가 얽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승려가 이런저런 회의를  마음에 품고 떠돌다가

경남 합천에서 마을촌장의 딸인 노처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내는 장삼을 깊숙이 감추어 두었는데

아들을 낳고 삼년이 지나서 이제는 더 이상 승가생활을 생각하지 않겠지하고

장삼을 버리기 직전 보여주었더니

그 장삼을 챙겨 남편이 도망갔습니다.
전국의 절집을 수소문 하여 직지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지사를 찾았다가

분하고 억울함에 그리고 피곤에 지쳐

지금의 금강문 있는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후부터 매년 부인이 죽은날이 되면 직지사 스님들이 한사람씩 지금의 금강문자리로 홀려나와

부인이 죽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습니다.

절에서 부인의 원귀를 위로하고자 그 옆에 사당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몇 년후에 고승 한분이 직지사를 찾았다가 사찰내에 사당이 웬말이냐고 나무라기에 지난 날의 자초지정을 얘기 했더니

"그렇다면 사당 대신에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을 지어 원귀를 막아라"고 해서 금강문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원귀를 달래는 것이 아니고 원귀를 막는 것이지요.


아 그래서 금강역사가 두분 더 필요했던 것이네요.

천왕문입니다.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으로

원래 사천왕은 고대인도의 바라문교에서 숭상하던 신들이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일주문에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은 후에

 이곳에서 다시한번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공간이며

중생들이 불이(不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직지사 천왕문은 임진왜란의 병화를 면한 건물이기도 하지만

천왕문앞 좌측 평평한 바위가 사명대사에 대한 설화를 가지고 있어 유명합니다.

 

천왕문을 지납니다.

 

 

 

 

만세루

황악루와 함께 직지사의 2개의 누각중에 하나인 만세루는

대웅전 앞쪽에 있는 2층의 누각으로, 원래는 37간의 거대한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백여 년 전에 화재로 전소되어  1978년에 신축하였습니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건물양식을 살렸습니다.

 

만세루 왼쪽 축대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조그만 폭포를 만듭니다.

 

만세루를 지납니다.

 

대웅전은 지형에 맞추어 휘어져 올라온 북쪽에 위치하며

만세루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오른쪽 탑

 

왼쪽 탑

전면 좌우양탑은 원래 문경 도천사라는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와서 복원한 것으로

보물 60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신라의 석탑은 2층 기단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식인데

문경, 선산 일대는 이와같이 독특하게 단층 기단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대웅전입니다.

6개의 주련이 있는데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높이 찬양하는 게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佛身普遍十方中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 하시니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의 모든 부처님 다르지 않네
廣大願雲恒不盡   광대무변한 원력 다함이 없어
汪洋覺海묘 難窮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게 헤아릴 수 없네
衆會圍요諸如來   부처님 앞에 대중들 모여드니
廣大淸淨妙莊嚴   광대청정 미묘한 장엄이로다.

 

열려진 쪽문 사이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뵙습니다

 

쪽문안으로 고개를 넣어 석가모니부처님, 약사여래부처님, 아미타 부처님을 뵙습니다.

 

좌측 신중탱화부분을 한장 당겨서 찍고...

 

대웅전 앞 안내판에서 대웅전과 3존불 뒷면에 걸린 삼존불탱화에 대한 복습을 합니다.

 

 

대웅전 현판은 일설에는 이완용의 글씨라고 합니다.
대웅전을 다시 정갈한 마음으로 한장 찍고 대웅전안으로 들어갑니다.

 

대웅전내부의 각종 탱화와 부처님계신 벽 뒷면 그림도 사진으로 기록합니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약사 불회도(藥師佛會圖),아미타불회도(阿彌陀會圖) 3점 모두 보물 67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내부 또한 아름다운 채색벽화로 가득합니다.


천정과 바닥까지도 정성스러이 기록합니다.

 

 

 

 

 

 

 

 

 

 

 

 

 

 

 

 

 

 

 

 

 

대웅전을 나서 측벽을 한장 더 찍습니다.

대웅전 현판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
프레시안에서 본 공감하는 이야기.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해 주는 일시적 소강상태 속에 고종이 권력의 사유화에만 매진하자

모처럼 넓은 범위의 조선인들이 독립협회를 통해 정치적 표현에 나설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조직력을 발휘해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노선을 이끈 것은 박영효가 대표하는 친일파 집단이었지요.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이 친서양적 고종 친위세력에서 친일파로 변신하는 계기도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성좌각

 

다른 절집의 삼성각과 같습니다.

 

감은전

현판글은 초정 권창윤 선생이 썼고, 조정훈 선생이 각을 했습니다.

2012년에 개축을 완료하고 점안법회를 했습니다.

 

조선의 만년 위패를 봉안하고, 그 영가들의 천도를 비는 곳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

 

감은전앞에서 다시 대웅전 앞 양탑을 봅니다.

 

대웅전 뒷부분. 떨어져 내리는 벽면...

 

 

 

육화당옆으로 포대화상이 계신데

복전에 희사하신 성금은 직지사 노인양노원에 쓰여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지 않고 이렇게 멀리서 찍은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찰의 전통에 의해서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해서인듯해서 입니다.

중국에서는 부다이(布袋) 또는 부다이루오한(布袋和尙)이라 하고 부귀불조(富貴佛祖)로 모시지요,

일본에서는 호테이(布袋)라고 하며 칠복신(七福神) 중의 하나이지요

직지사 포대화상 안내문에

'늘어진 배에 길상의 모습을 한 포대화상은 지팡이에 자루를 매달고 다니면서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자루에 담고,

포대에서 웃음과 기쁨을 내주시는 스님입니다.'라고는 쓰여 있지만

이제는 절집에서도 돈이 곧 복을 나타내는 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이상해집니다.


사실 모든 종교가 돈이 없으면 운영이 되질 않지요.
세상돌아가는 이치의 기본이 돈이된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라

이제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 아니고 견리수명見利授命인데

뭘 그리 새삼스러워 하는지....

 

비로전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무그늘이 시원합니다.

 

향적전

향나무를 때서 공양을 짓는다는 고사(古事)에 따라

향적전은 강원에서 대중들이 생활하는 큰방의 역할을 하며,

또는 안거철마다 큰 절 대중들이 모여서 공양을 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미황사 향적전이 생각이 납니다.
이곳 직지사에서는 스님들의 요사로 쓰이는 듯 합니다.

 

관음전입니다.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주며

세상 사람들의 기도소리를 듣고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하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계십니다.

 

 

 

벽안당

 

응진전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과거불인 갈라보살

그리고 16나한상이 모셔져있습니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완전한 사람,

즉 존재의 참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수행자가 추구해야할 목표로 보며

남녀를 불문하고 출가(出家)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 모셔진 16나한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까운 제자들로

석가모니의 부탁으로 다음부처가 올 때 까지 사람들이 섬길 수 있도록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남아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응진전은 고려태조 14년에(931년) 능여조사가 창건했다가 임란때 전소된 것을

효종7년(1656년)에 중건했습니다.
 
응진전앞에서 보이는 비로전앞 삼층석탑

 

사명각


사명각은 직지사의 고승 사명대사를 모신 곳으로 정조11년(1787년)창건하였습니다.
사명대사는 16세에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이후에

30세에 주지가 되셨고 임란때 구국선사로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로 독립된 건물에 모시고 있습니다.


사명각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명부전

 

고려 태조14년(931년)에 능여조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전소된 후

현종 9년(1668년) 팔상전으로 중건되었다가 명부전으로 개액했습니다.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도명존자, 왼쪽에 무독귀왕이 협시하여 있고

그 옆으로 시왕이 좌정해 있습니다.

 

 

시왕은 원래 불교 경전에는 등장하지 않고  중국의 도교에서 나온 말로

시왕들이 각기 하나의 지옥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까지는 7일마다 각 시왕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 이후부터는 100일, 소상, 대상 때에 차례로 생전에 지은 선악을 심판받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명부전에서 제를 지내 사후의 길을 편안케합니다.

 

빅정희대통령부처와 박대통령 부모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꽤 오랜기간 매년 제를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로전과 삼층석탑

 

비로전 앞 삼층석탑

 

보물 제607호로 대웅전 앞 석탑과 함께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왔습니다.

 

비로전

 

고려 태조때 능여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천불전(千佛殿)으로 불리며

임진왜란때 일주문,천왕문과 함께 병화를 모면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불전으로는 유일하게 소실을 면하였습니다.

 

 

비로전내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중에서 현재의 천불을 신앙하는 것이며

14개의 나무계단에 경주 옥돌로 만들어진 천개의 서로 다른 표정을 가진 불상이 모셔져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295구가 분실되었던 것을 후에 보완했다고 하며

천불 가운데 발가벗은 동자상이 비로자나불 뒤에 서있는데

법당에 들어가서 참배할 때 첫눈에 바로 이 동자상이 보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소문이 나있습니다.

 

 

 

약사전

 

약사전에는 동방유리정 세계의 교주라고 하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습니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해주고 생명을 연장해주는 의왕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부처님으로

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원래 모셔저 있던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제작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파손이 심하여 현재 성보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청풍료에 모셔저 있습니다.

 

 

 

비로전과 삼층석탑을 다시 보고 돌담을 따라 황악루로 갑니다.

 

황악루는 본래 대웅전 앞의 누각 건물이었으나

비로전 앞으로 이전 개축되어 비로전의 입구 역할을 합니다.

 

후면에 걸려 있는 주련을 봅니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일 누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려고 하거든 

마땅이 법계의 성품을 살펴라.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이루어진다."
조계사 대웅전 후면주련도 같은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요전각은 다 돌아본듯 하네요.

 

잠시 그늘에서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