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에서 나와 다시 문화공원으로 갑니다.
세계 도자기 박물관
재일교포 2세인 복전영자(福田英字)씨가
서양자기, 크리스탈 등 1,019점을 김천시에 기증하면서 만들어진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진귀한 명품 도자기의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는 것도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중늙은이 남자 혼자 들어가 보기에는 뻘줌할 듯하여 패스합니다.
몽향 최석채선생 기념비입니다.
좌측 기념비의 내용을 옮기면...
몽향(夢鄕) 최석채(崔錫采) 선생은 우리 언론사에 크게 새겨질 정론의 대논객이었고 직필의 참언론인이었다.
서민의 옹호자, 여론의 목탁, 민주 언론의 기수, 정의 사회 구현의 선봉장이었다.
독재 정부에 저항하다 옥고를 치렀고 무능정부의 국정 혼란을 가차없이 경책했으며, 군사정부의 독단과 폭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권력의 감시와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고, 폭력의 협박과 공각레는 오히려 완강하게 항거했으며, 시종일관 의연하고 당당했다.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과 주필,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주필, 문화방송 경향신문의 회장, 대구매일신문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세론을 대변하고 역사를 증언했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호헌 구국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 등의 사설은
부패정부와 독재 정권을 예리하고 단호하게 질타. 통매한 정론 중의 정론이었다.
1964년 언론윤리법 철폐투쟁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언론 윤리법 철폐를 끝까지 관철시키기도 했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의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 선정은 정론 직필로 일관한 위대한 언론인임을 확인. 평가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타계하였으나 그 높은 정신과 큰 업적은 우리의 자긍과 영광이 되어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몽향 최석채 선생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김상호 근찬)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말라 사설비
사설의 전문
연필모양의 조형물이 있는 이 계단을 오르면 백수문학관입니다.
현대 시조의 선구자로 시조의 중흥기를 열었던 백수(白水) 정완영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학관입니다.
연필벤치
문학관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마주친 시
정완영시인은 1919년 11월 11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나 1960년 해바라기로 국제신보 신춘문예 당선,
1962년 조국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었으며
문화공보부 문예창작기금 한국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만해시문학상 등 많은 수상경력이 있는 시조시인입니다.
백수문학관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살아있는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관으로
그의 직품을 중점적으로 전시 하면서
정완영시인을 중심으로 김천 지역은 물론
전국의 문학인들과의 활발한 문학 교류 활동을 이뤄나가는 장이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리고 시에서는 지역의 참신한 문인을 배출하고
지역문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워 주기 위해 문학아카데미를 주기적으로 개설하고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둘러메고 다니는 베낭이 하도 무거워서 문학관에 들어갈때 벋어 두었는데
남에게 잘 않보이는데 두었더니 내가 찾는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도자기박물관 건물을 도자기처럼 감상하고 문화공원으로 내려갑니다.
시비들이 있습니다.
한수 한수 읽으며 문화공원입구로 내려갑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데크 ...
눈으로 따라 올라가보니 아직 공사중입니다.
시비들을 지나 조각물앞으로 왔습니다.
조각의 숲을 빙글빙글 돕니다.
12지신이 호위하는 분수
아까 올라갈때는 물이 나왔던 것 같은데...
자기 기능을 않하면 단순 조형물일뿐이지요.
큰길가에 자리잡은 조각품 옆을 지나면서 눈에 들어온 예전 직지사 가는 길
다가가 보니 길 옆에 직지인심견성성덕(直指人心見性成德)이라 쓰여 있는 바위가 있습니다.
예전에 이 길로 직지사를 오가는 불자들 보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한번 돌이켜 보기만 하면 그 즉시 깨어난다는 直指人心見性成佛"을 악간 고쳐
깨어난다를 덕을 이룬다고 약간 바꾼 것이지만
지금은 저곳 좌판 상인들이 좌판 옆에서 멀리 문화공원쪽으로 돌아가는 사찰관람객을 보며 저 말을 되뇌일것 같습니다.
직지문화공원표석앞을 지나고...
어느나라 어느도시와의 우호를 상징한다는 달팽이 벤치를 지나고...
참 오래간만에 민족중흥을 외쳐 봅니다.
그런데 중흥이라....
언제 이 민족이 흥한적이 있었나요?
저 민족중흥을 주장하고 나온 사람의 시기에 잠시 흥했고 그 혜택을 아직 누리고는 있습니다만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공보다는 과만을 보며 그를 탓하는 사이
우리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예전 금릉군시절 청년회의소에서 세운 경천애인비석을 보며 세운 의도 보다는 세월의 흐름을 느낍니다.
식당가를 가로 질러 갑니다.
지금 시간이 다섯시 조금 넘었고
이곳 식당가도 제법 음식을 맛있게 한다고 소문이 있어 여기서 식사를 해결하려고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격표없는 메뉴판이 나를 당황하게 합니다.
다행히도 혼자 들어온 손님이라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나왔습니다.
버스정류장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 관광안내도 하단부에 소개된
직지문인송에 대해 읽고 있는데 저쪽에서 버스가 출발하려합니다.
스톱, 스톱 소리지르며 뛰어가서 버스를 탑니다.
직지사지역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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