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삼남길 전남도 구간 14코스 행복길 중 갈재에서 북일면사무소까지 2.(백양사역에서 북일면사무소)

하늘타리. 2014. 3. 19. 16:52

백양사역에서 다시모여 기행을 시작합니다.

 

 

 

이곳을 다녀가시는 모든 분에게 행복을...이라고 쓴 글을 읽고 고개를 돌리니

노란 영춘화가 눈앞으로 뛰어듭니다. 

 

개나리와 착각하시는 분이 있는데

 영춘화는 통꽃이지만 요렇게 끝이 여섯갈래로 갈라지고

개나리는 주로 네갈래로 갈라지지요.
통상 개나리보다 20일 정도 먼저 꽃을 피면서

모든 꽃으로 하여금 이제 꽃을 피워도 괜찮다고 알리는 봄의 전령사입니다.

 

영춘화의 꽃말은 사모하는 마음 또는 희망입니다.

 

Harry Belafonte의 I Do Adore Her(사모하는 마음)를 흥얼거리며 그 앞을 지나갑니다.

 

When shadows fall and stars appears
A pain I feel I cannot hear
If I could relive that faithful day
I would not turn my love away

I reveal how I do adore her
Hang my heart on my sleeve just for her
All my love thru-out life assure her
If this moment I could Amour her....


지금 세상에 헤리 베라폰테 운운하면 완전 골동품 취급 받을텐데...

 

예전 어느 한때 일대의 밥줄이었던 시설
그러나 지금은 흉물이 된 시설앞을 지나고

 

창의비각을 지납니다.

 

1985년 2월 25일에 창의비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다가

최근 창의사와 함께 재지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현 북일면 오산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국한

장성현감 이귀, 전좌랑 김경수, 기효간 등 의병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802년(순조 2) 호남의 유림들이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 건립한 석비(石碑)입니다.

 


전면 중앙에 종서 해서체로 “호남오산남문창의비”라고,

후면과 좌우측 양면의 비신 상단에 횡서 전서체로 “유명조선호남오산남문창의비”라 새겼습니다.


호남 오산 창의는 1592년(선조 25) 7월 20일에 김경수(金景壽)·기효간(奇孝諫)·윤진(尹軫) 등이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김경수를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았습니다.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니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이 모여 들어,

그해 11월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고 1,651명의 의병이 496석의 군량미를 가지고 북상하여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시켰다고 합니다.


그후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으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 선생은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 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강한 군사 40명을 선발하고 읍병(邑兵)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2차 남문창의이며,

김경수 선생의 두 아들 극후(克厚)와 극순(克純)은 의병 836명을 이끌고 동년 6월 진주성 혈전에 참전하여

진주성 함락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양사 의승 70명과 1천여명의 의병이 3차 남문창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안성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남문창의에 참여한 의병장 72위를 모현리에 있는 오산창의사에 모시고 매년 향화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비에 새겨진 77인 가운데는 승려 9명과 노복1명이 포함되어 있어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과 장성 군청 정문에도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가 모각되어 세워져 있습니다.

 

 

 

 

홍길동한우간판 앞을 지나니  

여러곳으로 가는 이정표가 방향은 하나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가다가 각각 서쪽으로 빠지게 되지요.
길따라 주욱 가면 나오는 것은 봉암서원
그래서 도로명이 봉암로입니다.

 

우리는 철로 밑 굴다리를 지납니다.

 

고속도로와 철로 그 가운데로 두길과 나란히 걷습니다.

 

  

 

국도는 동쪽 멀리로 산을 넘어 장성호를 건너갑니다.

아마도 황룡강을 건너 장성읍정도에서야 1번 국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천변 둑방길을 걷습니다.

  

 

  

개천을 건넙니다.

 

  

둑방을 걸으며 다리 밑을 지나고
다시 둑방을 걷다가 하천을 건넙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호남고속국도 백양사휴게소 

 

    

다시 둑방을 걷다가 하천을 건넙니다.

 

 

  

 

 

서능 정려비로 왔습니다.

 

이 정려비는 고려 고종때 문하시중을 지낸 서능 선생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11년(1587년)에 건립한 것입니다.

 

선생이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선생의 모친이 병이들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집에와 모친을 간호했으나

청개구리가 있어야 병이 나을 것이라는 의원의 말을 듣고 한 겨울에 구할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나타나 약탕관 안으로 뛰어들어

약과 함께 짜서 사용했더니 모친의 병이 완치 되었다고 합니다.

 

훗날 조정에서 정려비를 세우니, 비문은 사암 박순이 짓고, 옥봉 백광훈이 썼습니다.

 

중수기입니다

비각은 그후 중건한 것이지요

 

 

   

 

작동버스정류장을 지나 330년정도 세월을 보냈다는 느티나무 앞에서 쉽니다. 

 

   

박산

 

문닫은 작은 절집  

 

절집 경내에 황주변씨 효열비

 

시집오자마자 죽어버린 남편을 대신하여 평생 시부모모시고 모진고생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석불이 있다는 바위인데 이제는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

 

 

 

 

옛길은 서능 정려비와 개천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 길이 성미산에 걸쳐 있었지요.
그래서 서능정려비 입구가 지금의 도로와 반대인 개천쪽으로 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천을 보수하고 둑을 새로 쌓으면서 옛길은 없어져 버리고 새로운 지방도가 정려비 뒷쪽으로 개설되었습니다.
그래서 옛길을 찾으려면 박산리 앞산을 가로 질러 개설한 장성호 조정경기장 가는 길로 올라가야 합니다.

 

 

가다가 성미산 등산로로 접어듭니다.

 

 

 

 

 

산길을 이용 북일면 북부마을로 내려옵니다.

 

 

 

 

 

 

 

 

 

 

대나무밭이 있다는 것은 인근에 몇채의 민가가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민가의 흔적은 이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르면 그 대나무를 이용 생활용품을 만들어 쓸수 있기 때문에

산간지역에서는 집을 지으면서 대나무를 같이 심습니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없을텐데 나무밑 두덕에 백합조개껍데기를 깔았습니다.
어디서 났을까요?

 답을 얻을 방법이 없으니 패쓰!!

 

북일면 북부마을

 

 

 

 

마을길을 걸어 북일면 사무소 앞을 지나갑니다. 

 

오늘의 걷기가 끝났습니다. 

 

걷기가 끝났으니 이제 태워주겠다고 장성군 군내버스가 다가옵니다.

 

65년 되었다는 양조장으로 우리를 안내한 손대장님이 막걸리를 몇병 사와서 나눠줍니다.

 

 

 

  한잔 마셔보니 맛있어서 한잔 더 받아마시고...

 

다른 회원들 모여들어 북적한 막간을 이용
마을 서쪽 공터로 달려갑니다.

 

칙칙폭폭 기차는 떠났어도 급수탑 한기가 덩그러니 서있습니다.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처음 등장한 이래 1967년 디젤 전기기관차 출현으로 본선 운행이 중지될 때까지

60여년 동안 철로를 누빈 기차는 증기기관차입니다.
증기를 동력으로 쓰는 증기기관차이니 물 떨어지면 기차도 멈춰야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물을 공급하는 시설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기차가 갈재를 올라가기 전에 물을 넣은 곳이 이곳 신흥리역입니다.


이자리가 바로 신흥리역이 있던 장소이고

역이 있었다면 당연히 철로가 있었을텐데

지금은 덩그러니 남아있는 급수탑외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길입니다.
필요할 때는, 그리고 사람이 다닐때는 다른 그 어디보다도 북적거리지만.
끊임없는 유동속에서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어디가 길이었는가 조차를 찾지못합니다.

 

버스로 돌아와 버스를 탑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속에서 창밖으로 흘러가는 사진 몇장찍으며 길을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삼남길을 열어준 손성일대장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