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삼남길 전남도 구간 14코스 행복길 중 갈재에서 북일면사무소까지 (번외 : 백양사역 주변)

하늘타리. 2014. 3. 18. 17:51

백양사에서 오전 기행을 마치고 다수의 회원들은 식사를 위해 어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나는....
먹을 것을 준비해 왔습니다.
원래 먹을 것 가지고 다니기 싫어하는데

아도행에서 두어번 남의 것 축을 내는 불상사가 생겨서 한번 챙겨왔더니

핀트가 않맞았습니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역구내를 포함한 일대를 돌아봅니다.

 

백양사역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12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신흥리역 이라는 이름의 간이역으로 출발했다가,

1919년에 사거리역이라는 이름과 함께 보통역으로 승격하여,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67년 1월 백양사역으로 개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 역사(驛舍)까지 바꾸었습니다.

 

KTX와 새마을호는 모두 통과하지만, 무궁화호 모든 편성이 백양사역에 정차합니다.

 

사거리역에서 백양사역으로 개명된 이유는 주변에 백양사가 유명해 진 때문이지요.

 

백양사라는 절도 이름이 바뀐 절입니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여환선사가 창건한 풍치절정의 고찰로써 창건당시에는 백암산 백암사라 하였습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백암사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극락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합니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하얀양이 죽어있어, 그 후 1574년부터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역구내를 나오는 왼쪽으로 탑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역의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세워졌던 독립탑이라 이름한 기념탑을
1991년 12월에 이설하여 복원하였습니다.

 

독립탑 이설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 전상술외 다수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마을 안쪽으로 갑니다.

 


장성 사거리 버스 여객터미널

 

 

삼년전까지만 해도 서울가는 버스가 정차했습니다.

 

지금은 광주와 장성은 30분 간격으로
정읍은 한시간 간격으로 시외버스가 다닙니다.
평택, 송탄, 오산을 가는 버스가 하루 세대, 강릉, 속초 쪽으로 가는 버스가 행선지별 하루에 한대 운행이 됩니다.

백양사역 인근에 있어서 백양사역에 내린 손님들이 백양사를 가기위해 터미널로 들어섭니다
백양사까지 차비 1300원에 소요시간 십몇분뿐이 안걸리거든요.
하지만 백양사가는 버스는 한시간에 한대만 다닙니다.
그래서 마음급한 관광객들은 터미널앞에 줄지어 서있는 택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객터미널에서 나와 역이 있는 서쪽을 힐긋보고

 

1번국도를 따라 남으로 걸어내려 갑니다.

 

남성경로회관

그 옆으로 신태호 선생공덕비가 있네요.
신태호 선생이 지어준 경로회관인가 봅니다.
신태호 선생은 이지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마친 뒤 귀국해 기업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1976년 광주상공회의소 제9대 회장에 취임해 2대까지 15년간 광주상의 회장을 지내는 등 지역경제 발전에 헌신했고

육영 사업에도 정성을 쏟아 광덕중·고등학교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다운타운!!

 

교회가 식당으로 변했습니다.

 

우체국, 면사무소앞을 지나 기념관앞에서 몸을 서쪽으로 틀어 창의비로 갑니다.

 

 

 

 

 

 

1985년 2월 25일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된 창의비가 최근 창의사와 함께 재지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현 북일면 오산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국한

장성현감 이귀, 전좌랑 김경수, 기효간 등 의병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802년(순조 2) 호남의 유림들이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 건립한 석비(石碑)입니다.

 

비각(碑閣)은 정면 1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이고

맞배지붕의 대문을 두었습니다.

 

비문은 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지었고, 서자는 황승원, 전서자는 김부도입니다.
전면 중앙에 종서 해서체로 “호남오산남문창의비”,

후면과 좌우측 양면의 비신 상단에 횡서 전서체로 “유명조선호남오산남문창의비”라 새겼습니다.


호남 오산 창의는 1592년(선조 25) 7월 20일에 김경수(金景壽)·기효간(奇孝諫)·윤진(尹軫) 등이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김경수를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았습니다.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니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이 모여 들어,

그해 11월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고 1,651명의 의병이 496석의 군량미를 가지고 북상하여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시켰다고 합니다.
그후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으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 선생은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 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강한 군사 40명을 선발하고 읍병(邑兵)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2차 남문창의이며,

김경수 선생의 두 아들 극후(克厚)와 극순(克純)은 의병 836명을 이끌고

동년 6월 진주성 혈전에 참전하여 진주성 함락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양사 의승 70명과 1천여명의 의병이 3차 남문창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안성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남문창의에 참여한 의병장 72위를 모현리에 있는 오산창의사에 모시고 매년 향화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비에 새겨진 77인 가운데는 승려 9명과 노복1명이 포함되어 있어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과 장성 군청 정문에도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가 모각되어 세워져 있습니다.

다시 시가지로 돌아갑니다.

 

왼쪽에 사거리 성당이 있습니다.

 

북일면 성당이라고 하지 않고 사거리 성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사거리공소에서 부터 전통이 내려오기 때문일 겁니다.
전주 전동성당지을때에도 이곳 공소사람들이 그들을 도우러 팔걷고 간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 건물이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생긴 정감있는 성당이었는데

2010년에 재직신부가 건축공학박사라고 하여 성당을 개축하였답니다.

 

 

그리고 유럽의 성당을 본따 십자가위에 닭을 세우고 성당 내부 목재가 들어나게 하였습니다.

 

옛 성당위에 있던 예수성심상이 띄어져 땅에 내려와 있습니다.

옛 성당이 기능이나 구조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닌데

신부의 취향에 따라 성당이 다시 지어진다는 것이 조금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마리아여!!
당신은 느닷없는 잉태소식에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여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것이 이루어졌다.

지역아동쉼터입니다.

 

백양사역으로 돌아갑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모인 회원들과 단체사진을 찍고

오후 답사를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