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길 전라남도 구간을 가는 길
그 시작점이자 종착점은 갈재입니다.
갈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정읍 입암 군령마을에서 장성 덕원 목란마을 넘어가는 길을 택하겠지요.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라도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넘어 님이 왔다 하면/ 나는 아니 한 번도 쉬지 않고 넘으리라."
장성에서 전해오는 갈재를 넘으면서 불렀다는 노랫말을 속으로 흥얼거리다 보니
정읍 입암 등청의 어느 저수지옆에서 차가 섭니다.
하차.
저수지를 둘러보고
방장산, 입암산, 시루봉, 내장산
주변을 둘러보면 보이는 산인데 이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알아서 이름을 불러주세요
이화에 눈맞춤하고
군령마을 쪽으로 갑니다.
이곳 입암면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전남 해남까지 뻗은 해남로의 길목이자
전북과 전남을 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했던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주변에는 항상 새로운 길이 만들어 집니다.
아니 만들고 막고 다시 만들고 다시 막고 또 만듭니다.
옛길, 지방도, 국도, 옛 고속도로, 새 고속도로, 옛 기찻길, 새 기찻길 여기 더해서 고속철도까지...
만들수 있는 도로는 모두 만들고 있습니다.
이 거밋줄을 지나 입암산과 방장산을 연결하는 안부인 갈재를 찾아갑니다.
군령마을 초입,
수백년 묵은 당산나무가 우리를 반깁니다.
옛날 이곳에는 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정읍현의 노령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백주에도 살육과 약탈을 하여 길이 통하지 않았는데
중종 15년에 보(堡)를 설치하여 방수하다가 뒤에 폐지했다”라는 기록돼 있습니다.
군령마을로 들어가지는 않고 초입을 지나쳐 옛철도길과 연결된 방향으로 갑니다.
옛 주믹골 터를 지납니다.
농로길을 따라 올라오다 보면
왼쪽으로 목제계단이 있고 그 방향이 갈재라고 표지판이 가르키고 있습니다만 ...
우리는 오른 족 도로 밑으로 난 배수로를 통과합니다.
배수로 출구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굴러와 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사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사다리를 올라오니 도로공사 월동자재 보관창고가 있습니다.
그 뒤로 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회원들이 멈춰있습니다.
손대장님은 앞으로 갔지만 잡목과 가시덤블로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손대장님을 찾아가 봅니다.
멀리서 외치는 소리...혹시 다른 길을 알면 그길로 회원들과 올라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중 평탄한 부분을 찾아 앞장서 올라갑니다.
옛길을 만났고 다시 손대장님을 만납니다.
옛길을 보여주러 이길로 왔지만 일반회원들은 지나기 곤란할테니 편한길로 가라고 하였답니다
갈재길은 정읍 군령마을에서 장성 목란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입니다.
갈대가 많다 해서 위령(葦嶺)또는 노령(蘆嶺)이라고 쓰고 갈재라고 불러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노령(蘆嶺)이라고 지명이 확정되었지요.
그때부터 노령산맥이라고 불러졌습니다.
요새 통용하는 대간 이름으로 살펴보면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영산기맥의 줄기입니다.
갈재는 강원도에 견주면 고개라고 명함을 내밀지도 못할 만큼인 해발 276m에 불과하지만
평야에 우뚝 솟은 까닭에 감각적으로 굉장히 험하고 높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사실 갈대는 없고 전부 억새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억새와 갈대의 명칭은 혼동되어서 쓰여왔으니 그러련 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오른쪽으로 올라온 방향이 보이고
왼쪽으로 넘어갈 안부가 보입니다.
폭 2m, 길이 10여m 쯤 되는 부분을 우마차 통과를 위해 바위를 깨부수었습니다.
그 암벽에 <府使洪侯秉瑋永世不忘碑 壬申九月>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홍 부사는 1871년 5월13일에 부임하여 1872년 12월15일까지 근무한 것으로 장성면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안부의 바위를 깨어 길을 확장하는 데 많은 노고를 기울인듯 합니다.
갈재를 통과하면 여기서부터 행정구역이 전남 장성 북이면입니다.
삼남길 전남구간이 이제야 시작되는 것이지요.
터벅터벅...
입으로 짚신소리를 내며 걸어오다 보면
샘터를 만납니다.
물을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닌것 같아 표지판을 읽어 봅니다.
동이의 스토리의 발단이 바로 이곳이랍니다.
갈재를 오르고 내리는 1번국도가 발아래로 보입니다.
산아래로 내려서서 1번국도를 따라가면 백양사역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도로로 내려가기 전 숲길을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라는 듯
시한편을 감상할 기회를 줍니다.
최일환의 시 <장성갈재 넘으면>입니다.
"종착역을 아직 묻지 않아도/장성 갈재 넘으면/긴긴 여행은 끝나는 것 같다
쫓겨온 듯 지난 길을/이제 비로소 되돌아보며/죄 있어 잡혀도 안심인 듯/
행여 잘못 있더라도/너그러이 용서해 주리
뭘하고 오느냐고 묻지 않아도/장성 갈재 넘으면/지난 것은 모두 잊어 버린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껑충 뛰어/어머님 품인 듯 내리고 싶은 곳/
어딘들 사립문들이 열려 있어서/된장국 냄새 확 코를 찌른다"
포장도로에 내려서서 갈재길종합안내판을 다시 한번 봅니다.
도로공사 월동자재 보관창고에서 숲길로 접어들어 걸어오던중
입압면 사무소로 나가는 표지를 본 기억이 나세요?
그 길에서 부터 여기까지가 산남길이 갈재길과 겹치는 부분이지요.
이제부터 장성군 갈재길은 도로따라 신목란마을 앞을 지나 백양사역으로 갈 것이고
우리는 옛 고속국도위를 걸어 백양사역으로 갈 것입니다.
장성군 갈재길을 뒤돌아 보고
국도에서 내려가 장성군 갈재길과 헤어집니다.
오른쪽 길이 원덕터널을 내기전까지 차량이 쌩쌩 달리던 옛 고속국도입니다.
원덕터널을 개통한후 도로로서의 쓸모가 없어져서 포장을 벗겨내고 있는 중입니다.
아주 재래식길이 첨단도로인 고속국도가 되더니 다시 길 아닌 길로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바위 스토리는 잊어버렸고
왼쪽 신목란마을 넘어 보이는 산에...
사람의 눈썹과 콧마루처럼 선이 파인 바위가 보이시나요.
국도에서 보면 아주 선명히 보이는데 여기서는 이정도로 만족하시지요.
이 바위가 아까 갈재길 샘터에서 잠깐 언급된 갈애바위입니다.
마을사람들은 미인바위라고 합니다.
"갈재 아래 주막집에는 갈애라는 딸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뒷산 미인바위를 둘러싼 영롱한 구름 속에서 예쁜 처녀가 나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딸을 낳았다.
갈애의 빼어난 미모에 숱한 선비들이 넋을 잃었고
장성 현감까지 갈애에게 홀려 공사를 돌보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 어사를 내려보냈지만, 그 어사마저 갈애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어사와 갈애를 처벌하기 위해 또 선전관을 보냈다.
장성에 도착한 선전관은 어사의 목을 베고 갈애의 얼굴을 내리쳤다.
한쪽 눈썹위에서 부터 칼을 맞은 갈애는 그 자리에 핏자국만 남은 채 사라졌다.
한편 갈애를 짝사랑한 총각이 있었다.
갈애가 죽은 사실을 전해 들은 총각은 혼자만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산 능선 바위에 올라 갈애의 얼굴을 새긴다.
그러나 바위 절벽이 워낙 가팔라 두 눈을 완성하지 못하고
한쪽 눈만 새긴 채 벼랑에서 추락하고 만다.
이를 애틋이 여긴 마을 사람들이 총각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갈애바위 근처에 석불입상을 세워 영원히 같이 있도록 해주었다고 전한다.
그 석불이 바로 원덕리 미륵석불이다."
원덕리 미륵석불은 지금 내눈에는 그 위치가 보입니다.
걸어서 한 10여분이면 갈 것입니다만
왕복을 계산하면 혼자서 너무 멀리 빠지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지요.
갈애바위아래로 기차가 지나갑니다.
다시 내 발길앞으로 풀밭길이 열립니다.
고속국도에서 포장을 제거한 곳에서는 이렇게 땅이 새로이 숨을 쉽니다.
개천을 따라서 원덕마을로 갑니다.
지금 이 하천의 이름이 개천입니다.
옛 광산군 계촌면,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에서 영산강과 몸을 섞는 황룡강의 지류중 하나인 개천은
황룡강 지류중 가장 깁니다.
갈재고개에서 시작하여 장성공설운동장까지를 지난후 황룡강과 합칩니다.
개천을 건넙니다.
철길아래 굴다리를 지나 백양사역으로 다가갑니다.
사거리입니다.
길도 사거리이지만 이 지역의 행정구역도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입니다.
백양사역 옆 입간판에...
선비의 고장
청백리의 고장
의병의 고장
장성이라고 쓰여있군요.
선비의 고장은 대원군이 말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을 생각나게 합니다.
장성에서는 문(文)을 논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학문과 문장은 장성이 호남제일이라는 것이지요.
필암서원의 김인후와 고산서원의 기정진이 떠오르는데 특히 하서 김인후는 문장과 도학과 절의를 겸한 선비로서,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에서 호남 유일의 유학자입니다.
청백리의 고장은 박수량 백비가 상징하지요. 그리고 송흠이 있습니다.
의병의 고장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남문의병, 한말 때 기우만·기삼연이 항일의병 활동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장성을 이야기하는 오산남문창의는 오천 김경수가 맹주가 되어 전라도 여러 고을의 의사(義士)들이 참여한 것으로서
이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간 중 3차에 걸친 의병활동을 벌이었으며 창의인물은 모두 76명으로
제현위차 22명, 자제종사 12명, 동창 32명, 의승장 9명, 사노 1명으로 구분되어 기재되어 있습니다.창의비에 중과 노비의 이름까지 새긴 것은 그들의 신분이 어떠하던 그 공로를 치하하는 평등사상의 발로입니다.
2012년에 삼남길 전라남도 구간을 개통하여 전남도와 코오롱스포츠, 그리고 아도행 대표가 모여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쑥쑥자라라!
마음의 물을 주고...
삼남길 전남도구간 지도를 보고 오전 답사를 마칩니다.
'如是我見 寫而不作 > 우리강 우리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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