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 올레

제주올레 20코스 3. 행원리 마을에서 한동리 마을안 정자까지.

하늘타리. 2013. 4. 2. 15:16

연대봉을 지나 행원리마을로 들어섭니다.


마을을 지나 광해군의 제주도 기착지라고 하는 어등개로 가게 되겠지요.
문득 떠오른 생각,

잘나가던 사람이 힘을 잃으면

그 사람이 잘나갈 때 어떻게 그 언저리에서 한자리 해보려고 하던 자들이 제일 먼저 등을 돌립니다.
광해는 인조반정에 의해 “혼란무도昏亂無道”“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목으로

인목대비의 명령에 따라 폐위되었습니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로 이배되었지요.
1637년(인조 15) 6월 16일 호송 경호 책임 별장 이원로李元老등이 광해를 압송하여 어등개에 도착하여 이곳이 제주라고 알리자,

광해는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폐주를 수령하러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알고 계시지요?”하니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합니다.
나는 광해의 눈물이 너무 기가 막혀서 흘린 것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경험했었고,

강화에서 태안으로 유배될 때 호송 별장들은 자신들이 윗방에 들고 광해군은 아랫방에 머물게 하는 홀대를 이미 받았고,

그리고 아무리 둘레를 장막으로 가리었다지만

그리 긴 시간 풍랑에 시달렸을텐데 이곳이 절해고도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염장을 지른 것은

과거의 어느날 같으면 자기가 무슨 말 한마디만 붙여주면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고 좋아 날뛰던 관리가,

배운바없는 무지랭이들이야 그렇다 하겠지만 그래도 임금의 녹으로 먹고사는 관리가

얼마전 까지 주군이었던 자기앞에서 주중적국 운운하고 있으니 가히 기가 막힐것이고

그것을 풀길없으니 눈물로 터져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이 첫 유배지도 아닌 광해의 입장에서는

주중적국은 별 배운것없이 아는 척하는 벼슬아치의 말도 않되는 헛소리일뿐입니다.


舟中敵國은 사기史記 손자오기孫子吳起열전에서 나옵니다.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장군인 오기吳起는 문후가 죽자 그의 아들인 무후武侯를 계속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무후가 서하西河에 배를 타고 가다 중간쯤에 이르자 뒤를 돌아보며 오기에게 

이 산과 강의 험난한 조망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위나라의 보배로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기는 이처럼 대답하였지요. 

국가의 보배가 되는 것은 임금의 덕일뿐, 지형의 험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옛날 삼묘씨의 나라는 동정호洞庭湖의 왼쪽을 끼고 팽려호를 오른쪽으로 끼고 있었으나,

임금이 덕의를 닦지 않아기 때문에 우왕禹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임금의 덕에 있지 지형의 험난 함에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우리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의 사람들도 모두 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舟中之人盡爲敵國也)."

재위기간보다 길었던 19년의 유배생활은 비참했습니다.

특히 제주에서는 심부름하는 계집종에게도 면박을 받았고

심부름 하는 하인들로부터 “할아범”이라는 멸시와 홀대를 받으며

만 4년여를 살다 삶을 마감하게 된다.
마지막 가는 길도 쓸쓸했습니다.

당시 제주목사가 부음을 듣고 도착하자 계집종 혼자 적당히 싸매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목사 이시방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때 이나라를 다스리던 이의 몸이다라고 하며 광해의 사체를 손수 염한후 조정에 보고하고

스스로 치계馳啓 하고 대죄待罪하였습니다.
목사 이시방李時昉은 심연의 후임으로 1640년(인조 18) 9월 제주에 도임하고 1642년 8월에 떠났습니다.


서봉일기西峰日記에는 다음과 같이 광해군 사후 처리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광해군이 섬 안에 있었다.

신사(인조 19:1641) 7월 초1일, (광해군의) 상이 났는데 마침 가장 무더울 때를 당하여 시체가 점점 변해갔다.

공은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가 보려고 하니,

감옥 울타리의 내관(內官) 이하가 막아서며 모두 말하기를,

“왕부(王府)에서 봉쇄하고 있는 곳이므로 마음대로 스스로 열고 닫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공은 이것은 큰일이라고 여겼다.

염습할 때에 나인[內人]들이 하는 대로 전부 맡길 수도 없었다.

꼭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자면, 천 리를 왕복하는 사이에 이미 시일이 경과하여,

그 모습이 이미 변한 후가 되므로 다만 증거를 취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죽음을 존숭하는 예의에 근거될 수도 없었다.

결점이 없을 수는 없는 대로 고정된 쇠못을 뽑아내고 옥문을 열었다.

이어서 후에 조사받을 것을 위해 봉했던 사슬을 남겨두었다.

이어 삼읍 수령을 데리고 소복(素服)으로 들어가 조문을 하고

스스로 욕습(浴襲)을 하고 염(斂)과 관(棺)에 이르기까지 모두 친히 스스로 보고 검시를 마쳤다.

 염을 한 후 다시 옥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갖추어 치계(馳啓)를 하고 대죄(待罪)하였다.

처음에 상감께서 해외에서 상이 나서 시체를 염할 때,

혹시 부족한 점이 있을까 하여 예관(禮官)에게 즉시 명하여 가서 호상하려 했는데,

공의 장계(狀啓)를 보고서는 크게 감탄하고 칭찬을 하였으며

조정 역시 모두 공이 사변에 잘 처리했다고 함이 대다수였다.”


그럼 이시방이 광해군의 은혜를 입어 그 보은을 한것일까요?
이시방은 광해가 임금일 당시 벼슬에 있지도 않았고

인조반정때는 유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던 광해의 반대쪽 인물입니다.


나는 이길에서 광해는 떠올려지지 않습니다.

두 목사가 떠오릅니다.
광해에 의해 벼슬이 임명되어 이곳에 와 있던 자와

광해에게는 아무런 은혜를 입은바 없고 차라리 그 대척점에 있던자.
그 둘의 행태가 어른거리는 길을 걷습니다.

 

'…번복 많은 세상일 파란 같으니
시름 근심 부질없어 마음 한가해
...참으로 한바탕 꿈이니
기꺼이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라
'

 

제주에 유배된 광해의 시를 읊으며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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