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물도입니다.
글쎄요... 매물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아
형보다 나은 아우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이 소매물도도 본섬보다는 부속섬 등대도 때문에 더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배에서 내리자마자 등대섬으로 향합니다.
휴게소 아주머니 한마디에 발길을 멈춥니다.
'오늘은 오전에 물이 빠지지 않으니 서둘러 가셔도 등대섬에 못가십니다.
여기서 쉬다가 천천히 가세요.'
모두가 얼음이 되었다가
한명, 두 명 그리고 거의 전부 휴게소 안으로 들어섭니다.
커피한잔 사들고 휴게소 앞으로 나와 아직도 내리는 회원님들의 모습과
선창으로 이어진 해안절벽
그리고 콘도주변 주민들의 주거지 등을 찍어 봅니다.
이곳에서 집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느끼는 점이 있어요.
바닷가 산등성이에 집을 지으면서도 꼭 바다 쪽으로 창문을 냅니다.
서향이라 바람도 쌜 텐데...
채광 때문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바람을 막으려면 그 앞쪽으로 담을 쌓아야지요.
그런데 이곳 가옥은 창이 있는 쪽에는 돌담을 쌓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거센 바다 일엽편주위에서 힘든 바닷일을 하고 돌아오는 낭군님을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은 마음이
몰아치는 바람을 막는 것보다 더 간절하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한 20분쯤 지나니까 한 팀씩 두 팀씩 산으로 오릅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이용 등대섬방향으로 갑니다.
갯담길, 골목길, 갈담길, 학교길
갯담길은 갯가에 쌓은 담을 이르는 것일 테니 이미 지나왔을 것이고
지금은 골목길을 지나야 겠지요.
갈담, 그리고 골목길
갈담은 칡넝쿨이 덮여 단단히 묶여진 돌담을 말할 겁니다.
아닌가 보네요.
갈색 담을 말하나 봅니다.
돌담은 무너져 가고 집은 폐허가 되어 갑니다.
약간의 밭농사에 미역을 뜯어 생업을 삼고 있는 이곳 주민들에게
관광객 증가가 생활에 보탬은 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잠시 배시간 맞춰 들고 나는 사람들
그리고 숙박을 하더라도 편리를 쫒아 펜션에 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 바라보고 살기에는 막막하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을을 떠납니다.
작년도 인구가 20여 가구에 50명이 채 않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마을사람들이 몇푼 벌여보려고 길옆으로 펼친 좌판에도
그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나도 사진 한번 찍을 뿐이니 더 얄밉겠지요.
사진기를 들이대자 좌판 옆에 앉아계시던 아주머니가 자리를 뜨십니다.
휴게소 강아지가 앞장서 가는 계단길옆으로
무언가를 기르던 계단식 밭
지금은 겨울이라 비어있습니다.
손볼이 없어 버려진 밭이라는 말하지 말기...
그 언젠가 밭으로 쓰려고 돌 하나하나 신경 써 토대를 쌓은 그 마음이
너무 허망할 테니까...
학교 가는 아이들 조금이라도 편하게 다니라고 정성어려 만든 돌계단을 올라갑니다.
좌우로 칡을 비롯한 관목이자 덩굴성 식물들이 무성합니다.
누군가는 이 덩굴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는데 그럼 무엇을 심을까요?
나대지에는 사람의 간섭이 없으면 초본류가 자라지요.
섬지방에서는 털머위와 갯강아지풀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풀들 사이에서 떨기나무라고 하는 덩굴성 관목들이 자랍니다.
그 관목들 속에서 각종 작은 동물자원들이 함께 생활하다가
그들에 의해서 옮겨진 씨앗으로
그 속에서 그 지방 풍토에 적합한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곳과 같은 섬지방에서는 주로 해송 등의 침엽수와
활엽수 중에서는 동백 등 잎이 두꺼운 나무들이 자라 숲을 형성합니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덩굴성 관목류를 다 제거하면
결국 사람에 의해 선택되어진 나무만이 심어질 것이고
자연이라는 스스로 그리하는 능력에 맡기지 못하고
끊임없는 간섭을 해야 할 겁니다.
옛 분교 표시 앞 삼거리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려 초지와 숲 그리고 그 넘어 바다를 봅니다.
문이 걸어 잠겨진 분교 앞까지 다가가 봅니다.
1961.4.29. 개교하여 졸업생 131명을 배출하고 1996.3.1. 폐교되었다고 하네요.
그 131명의 아이들 중 지금 이 섬에 사시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요?
매물도 초등학교 소매물도 분교장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럼 그 당시에는 매물도 초등학교는 분교가 아닌 본교였다는 이야기...
이곳이 폐교되고 매물도 초등학교도 한산초등학교 분교가 되었다가 결국 폐교되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소매물도 안내도를 봅니다.
남북을 뒤집어 놓은 지도가 있고, 국립공원과 한려해상국립공원에 대한 설명이 있고
매물도 이름의 유래가 있습니다.
전장에서 개선하는 장군이 탄 군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마미도라 불리어진데서 그 이름이 매물도가 되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미도라...
시청 자료에는 메밀이 많이 나서 메밀도라 하다가
매물도로 이름이 바뀌었다고도 하지요.
문서로 표기된 공식이름은 조선 초기에는 매매도每每島이었다가
중기에 매미도每味島 또는 매물도每物島
후기에 每勿島라고 표기되었습니다.
안내판 우하단으로 여덟 곳의 명소를 사진과 함께 나타내었습니다.
몇 곳은 가볼 수 있겠고 몇 곳은 물이 길을 열어주지 않아 가보질 못하겠네요.
관세역사관으로 가는 표지가 있습니다.
소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망태봉 봉우리 해발 152m지점에 있던
밀수선 감시소를 리모델링해 2011년 가을 개관한 관세역사관이 있습니다.
돌아올 때 들르기로 하고 등대섬으로 갑니다.
꿈결처럼 아련히 등가도가 보입니다.
이 앞바위는 고래등바위라고도 하고 공룡바위라고도 합니다.
여기서는 고래등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고개를 뒤로 돌리니 대매물도 장군봉이 보입니다.
다시 전방을 보니 등대섬 병풍바위
다시 고래등바위와 등가도
여기서 부터는 공룡바위라 불러 주어야 겠네요.
그런데 이 공룡이 대매물도 장군봉 쪽에 관심이 많은 가 봅니다.
등대섬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산기슭을 내려가며 등대섬을 봅니다.
구릉으로 내려와 대매물도 방향을 다시 한번 보고...
왼쪽 암벽 위를 걸어 등대섬방향으로 갑니다.
바위아래로 맴맴도는 섬하나..
뒤돌아서 공룡의 등허리를 바라보다가 그 오른쪽 발톱을 보고 섬찟해 합니다.
병풍바위가 보다 잘 보이는 방향으로 접근합니다.
뻥 뚫린 글씽이굴이 보입니다.
당겨서 눈앞으로 굴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굴에게 묻습니다.
어디에 서불과차라고 쓰여져 있냐고요.
대답하는데... 그런 것 잘 모른답니다.
그냥 무슨 글이 쓰여져 있어 글쓰여져 있는 굴이라고 하던 것이
좀 더 그럴듯하게 들리라고 옛날 진시황때 서불까지 같다 붙여 서불과차라고 쓰여 있다 했는데
이게 남해 상주면 양아리 거북바위에 있었다는 것,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벽면에 있었다는 것,
거제 갈곶 우제봉에 있었다는 것에 밀리다 보니
요새는 아까 소매물도 안내도에 쓰여진 것처럼
서불이 새기긴 새겼는데 불로불사약이라고 새겼다더라고 말을 바꾸었답니다.
최근 역사적 해석에 의하면 서불 일행은 불로초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주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이주한 자들이 한반도에 건너와 일부는 일본으로,
일부는 남해안에 그대로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중 일부가 서불 일행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지는 모르지만 경남·제주 일원에는 예부터 서불과 관련된 전설이 상당히 많습니다.
서불에 관해 가장 큰소리치는 게 남해인데
그곳에는 선사시대의 각자가 남아 있고
그것을 탁본한 19세기 금석학자인 오경석이 중국 금석학의 대가인 원선하추도에게 보이고
'서불기예일출徐市起禮日出'이란 여섯 글자의 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 위창 오세창이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에 예를 올렸다는 뜻으로 '서불과차徐市過此'라고 임서하였답니다.
아래 사진이 그 암각자인데 다른 곳은 모두 이 글자의 모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곳 글씽이굴 어느 벽면에 무슨 글자가 있긴 있었나 봅니다.
서불과차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는
임진왜란 당시 잠시 정박한 왜장이 칠언율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벽이 발견되었다는 말도 있었거든요.
발아래 바위 하나
에이 시끄럽다 다른 데로 가자하며 아까부터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데 계속 그자리입니다.
다시 등대섬을 보고...
꿈결처럼 멀어져 가다
나와 눈이 맞으면
다시 꿈결처럼 다가오는 등가도....
말 그대로의 떠다니는 섬...
등대섬쪽으로 다가가면서
바위아래를 내려다 보며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에 있는 섬에게 응원을 합니다.
다시 등대섬
문을 열어주지 않는 열목
오늘은 닫힌목입니다.
서쪽으로 돌아 암벽으로 다가 갔다가
계단을 올라와 뒤를 돌아봅니다.
등대섬바닷길 설명을 여기서 봅니다.
복잡하게 쓰여 있지만 조금 간단히 이야기하면
조수간만에 차가 큰 바다 두 섬 사이에 사구가 형성되면
어느 시기까지 바다가 열리고 닫히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인데
이 해안사구에 계속 조류에 의해 옮겨진 퇴적물이 쌓이면 육계사주가 되지요.
여기서는 도계사주라 해야 되나...
군산시 고군산 군도에 가면 선유도가 있습니다.
여기가 원래 분리된 3개의 섬이었는데
현재 왼쪽 섬과 가운데 섬이 육계사주陸繫砂洲로,
가운데 섬과 오른쪽 섬이 해안사구海岸砂丘로 연결되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아, 가까이에 있는 우리가 갈 비진도도 육계사주로 연결된 섬이지요.
이곳도 어쩌면 몇 백년 뒤에는 썰물을 기다릴 필요 없이 건널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뒤돌아보고..
초지를 걸어가며 바다를 봅니다.
망태봉 중턱까지 형성된 계단밭의 모습들
자라는 풀의 모습을 보니 경작하지 않은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그냥 안쓰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 봅니다.
망태봉으로 올라갑니다.
망대가 있던 곳이라 먕대봉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 이름이 망태봉으로 바뀌었답니다.
망대까지 가보지요.
공룡바위 뒤통수
뒤통수를 한대 딱 때리면 어떤 표정으로 돌아볼까요?
지금 관광객이 다니는 길이 아닌 옛길을 이용 망태봉으로 가다
고개를 돌려 다시 등대섬을 보고...
동남쪽 단애를 보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섬 등가도를 보고
다시 등대섬을 봅니다.
아마도 이지점에서 쿠크다스광고사진을 찍었을 겁니다.
자료사진을 제시합니다.
맞다고 눈을 굼뻑이는 바위
제단 같은 것이 앞에 설치되어 있던 바위뒤로 올라가며
등대섬을 보고 또 봅니다.
이곳 소매물도 등대는 1917년 무인등대로 건립되었다가
1940년 유인등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진 높이 16m의 하얀색의 원형 등탑은
자태가 고풍스러울 뿐만 아니라
프리즘 렌즈를 사용한 대형 등명기를 이용해
약 48km거리까지 불빛을 비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전역에 설치된 등대 중 41개의 유인등대 중 하나인 이곳에 4명이 근무한다고 합니다.
관사구역이 꽤 넓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등대는 아름답게 보이기는 합니다만
등대라고 하면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과는 매치가 잘 않되지요.
이생진은 이야기합니다.
'등대는 외로운 사람의 우체통.'이라고요
또 그는 노래합니다.
"문신처럼 아픈 기억을 더듬으며
불을 켠다.
바위를 갉아먹는 의지로 불을 켠다.
선잠 깬 물새가 울었다
등대가 그만 울라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다시 가볼 수 없는 낙서를 물새가 읽어가며 울었다.
외로운 곳에 있으면 사람도 새도 한마음이다 "
바다에서 이곳 등대를 볼 때는 문득 그 시가 생각났었는데
막상 등대섬을 바라보았을때는 까먹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나네요.
아마도 등대섬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럴 것 같습니다.
너무도 노골적인 이름.
등대가 있는 섬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의 등대섬이 아니고
섬 이름 자체가 등대섬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이질감.
해금도라는 섬 자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2002년 국립지리원 고시에 의거 등대도를 공식명칭으로 했다는 것에 대한 어떤 거북함?
그러면 대한민국 모든 섬에 등대가 있으면...
최소한 유인등대가 있으면 다 등대도라고 공식명칭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글에 심통이 묻어 있습니다.
섭섭해서일 겁니다. 서운해서...
열목이 닫혀서 열목개를 걸어 등대섬을 가지 못한 아쉬움...
어느 식당.
음식을 맛깔나게 잘 하는데 멀어서 자주 찾아갈 수 없는데
어느 날 큰맘 먹고 갔더니 정기휴일이라고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 때 속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 이집은 음식은 맛있는데 불친절해...
그래, 밑반찬도 다양하지 않아...
그리고 음식점이름이 촌스럽게 복자네집이 뭐야...
에이 다른데 더 맛있는 데로 가자...
복자네집이라는 이름이 왜 생각났을까?
아 그렇구나.
이중섭의 통영 향남동시절 자주 찾았다는 선술집이름이구나...
이중섭은 6.25전쟁 때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갑니다.
부인 이남덕과 두 아이를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은 서귀포로 갔다가
그곳 생활 역시 여의치 않아 다시 부산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떠돌던 이중섭은 통영의 공예가 유강렬의 권유로 1952년 늦은 봄 통영을 찾습니다.
당시의 도립통영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 거주지를 정하고
1954년 봄에 진주로 옮길 때 까지 통영에서 지냅니다.
당시 통영은 잠시 인민군이 접수하기도 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전쟁의 피해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인사의 후원으로 이중섭은 마음 편하게 창작에 열중하여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황소', '부부' 등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거주하였던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지금도 그 골목길에 그 모습 그대로(물론 용도는 바뀌고 주인도 바뀌었지만...) 그렇게 있고
그가 작품을 발표하였다는 당시 성림다방도 지금 그 자리에 미용실이 들어서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만
해떨어진 저녁,
밀려들어오는 처절한 고뇌와 부인과 자식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달래주었던 복자네집,
갖가지 안주를 무료로 주었다는 그 정겨운 다찌집의 흔적은
지금 찾을 길이 없습니다.
바윗등을 밟아 망태봉정상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삐끗합니다.
몸은 앞으로 고개는 뒤로 가있기 때문이지요.
몸을 돌려 바위위에 앉아 등대섬을 봅니다.
다시 망태봉을 오르고
망태봉 정상
망태봉 정상에서 본 대매물도
공룡바위와 등가도
등가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섬입니다.
높이가 수면에서 불과 39m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암초 일곱 개가 옹기종기 모여 이루어진 섬이지만
바다 새들의 쉼터이고, 물고기들의 낙원입니다.
항상 꿈결처럼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매물도 관세역사관
반갑다고 손을 드는데 누군가가 삿대질을 합니다.
너는 누구냐 묻네요.
그러는 너는 누구냐?
나 밀수선 감시원이다.
그런데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니?
나 1978년도에 마산세관 매물도 감시서설치때 부터 있었다.
에이 말이 안 통하네,
그건1987년 폐쇄할 때까지 근무했던 네 선배들 이야기고 너는 언제 부터 있었니?
2011년 10월부터 있었다.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내가 2011년 4월에 왔을 때는
관세서가 이 모습이었거든...
그런데 그때 이후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너를 세웠나 보구나.
근무 열심히 하고 아무한테나 삿대질 하지마라.
그 당시 있던 매물도감시서 안내판입니다.
그 당시 내부의 모습입니다.
2011년 리모델링해서 매물도관세역사관으로 재개장한 지금의 모습입니다.
리모델링할 때 2003년 철거했다는 밀수감시단속용 레이더 송수신안테나도 1/3로 축소해서 다시 세웠습니다.
보아달라고 만들었을 테니 들어가 돌아봐주는 메너정도는 있어야 겠지요.
2층 전망대로 올라갑니다.
전망대에서 보는 대매물도
폐교로 갑니다.
후박나무 숲을 가로 질러 학교로 가다 말고
등대섬이 보이는 오른쪽 기슭으로 갑니다.
안녕, 다시 만나자.
합죽이 바위를 지나...
숲을 가로질러 학교운동장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닷고기는 많이 보지만 민물고기는 보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
연못도 만들고 붕어도 길렀었다 합니다.
그 흔적이 쓰레기장이 되어 있습니다.
2006년도 폐교가 된 그해에 이 섬이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었지요.
그래서 관광객이 많이 오면 이곳을 캠프로 사용하려 했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부푼 꿈을 안고 내부를 정리했는데...
아무도 이 시설을 이용하지 않더랍니다.
결국 다시 폐허가 되었지요.
텅 빈 운동장에서 외로운 섬을 바라다봅니다.
동백나무 터널을 지나
가익도를 한 번 더 보고
섬 둘레길로 접어듭니다.
등대와 병풍바위가 여기까지 인사왔네요.
그래, 잘있어. 또 보자.
공룡머리가 나를 쳐다보며 인상을 씁니다.
너 아까 내 뒤통수 때리려고 했지.
아니,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잘 가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숲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바다를 굽어보는 곳
그 앞에서 만나는 대매물도
이따가는 저곳에서 이곳을 보겠지요.
가까이 다가온 등가도
1997년에 유조선이 좌초한 후 그 중 평평한 바위에 등표하나를 세웠습니다.
가익도가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남매바위
그 중 오빠바위가 길을 막습니다.
안내판을 잠깐 읽어보고
오빠바위를 다시보고
누이 바위를 찾아 해안으로 내려갑니다.
다시 올라와서 오빠바위의 슬픈 눈물이 모이던 샘의 흔적을 봅니다.
백년 넘게 흘리던 눈물이 마을에 심정이 개발되면서 말라버렸습니다.
뒤돌아보고 지나가려다가
문득 애잔함에 마음이 움직여 바다로 내려갑니다.
바닷가에 굴려 내려와져 있는 누이바위를 위로 합니다.
너의 죄가 아닌 것을 왜 너만 이렇게 바닷가로 굴러 떨어져 있니?
1999년 통영시지를 기초로 전설을 옮겨봅니다.
"먼 옛날 이 섬과 이웃하고 있는 큰 매물섬에 어느 부부가 살고 있었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였지만
부부의 금슬은 비할 데 없이 좋았다.
더욱이 나이가 들도록 자식이 없다가 뒤늦게 부인에게 태기가 있자 집안은 온통 기쁨으로 넘쳤다.
그러다가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그토록 바랐던 아기가 남매쌍둥이로 태어나자 부부의 기쁨은 잠깐, 금방 근심으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남매쌍둥이는 명이 짧아 모두 일찍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즉,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어려서 죽게 되며,
먼저 죽은 아이가 살아남은 아이를 저승으로 함께 데려가기 때문에 모두 명이 짧아진다는 것이었다.
골똘히 생각한 아버지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사내아이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딸아이는 희생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차마 자식을 죽일 수는 없으니 뗏목에 태워서 먼 바다로 띄워 보내어
그 아이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이런 남편의 제의에 부인은 정히 그렇다면
차라리 저 건너편 무인도(작은 매물섬)에 며칠 전부터 낮에는 잠깐이지만 연기가 오르고
저녁에는 불이 깜박거리는 듯하다.
혹여 사람이 들어와 살는 지도 모르니 그곳에 데려다두면 그들이 거두어 기를 수도 있지 않겠냐 사정하여
남편도 부인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아버지는 뗏목에 어린 딸을 태우고 작은 섬으로 건너가
바람막이와 비 가리개를 해주고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이런 기막힌 일이 있은 후
이들 내외는 딸아이는 물론 작은 섬에 관한 말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어느덧 십 수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뒷산 먼당에 올라 나무를 하던 총각이 무심코 바다 건너 작은 섬을 바라보니
그곳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집으로 와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아마도 봄 아지랑이를 잘못 봤을 게다” 라며
아들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바다 가운데의 외딴 섬 생활에 언제나 고적했던 총각은
그 섬에 가보고 싶은 호기심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매일 산정에서 건너편 무인도를 바라보다가 어느 날 몰래 뗏목을 타고 그 섬으로 건너가고야 말았다
그 섬에서 다 쓰러져 가는 움막이 하나 발견하여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이 나더니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에 겨우 아랫도리만 가린 사람이 급히 도망쳐 숨는 것이었다.
언뜻 보아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임이 분명했다.
절해고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제껏 낯선 사람은 물론, 이성간의 만남도 처음이었다.
호기심에 총각은 자주 이곳 무인도로 몰래 건너갔으며,
점차 두 남녀는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은 처녀를 집으로 데려갈 함께 살 것을 결심하고는 그녀를 힘껏 껴안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심한 비바람과 함께 천둥번개가 내려치니 처녀 총각은 각각 하나의 큰 바위로 변해버리고
그 중 한 바위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두 남녀는 오누이인지 모르고 나눈 그 사랑의 죄값으로 이렇게 각각 바위로 변하고 말았다고 한다."
추가로 써 있는 글에
"이 남매바위는 지금도 3년마다 서로 굴러서 몰래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는가 하면,
또 두 남매가 껴안은 칠흑 같은 그 날 밤이면 언제나 거센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몹시 친다고 한다."고 합니다.
사랑의 죄값이라는 표현 많이 거슬립니다.
알지 못한 죄이지요
천벌을 받을 만큼의 죄 일수도 있으나
어느 한쪽에 더욱 가혹하게 바위로 변한 몸을 바닷가로 굴러 떨어지게 할 것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세계 각지의 도서지방에는 이러한 근친상간의 비극에 관한 설화가 꽤 많습니다.
특이한 것은 통영이 포함된 고성반도지역의 설화는 항상 미수에 그치면서도
그 응벌은 가혹하다는 거지요.
터미널 사진에서 보고 온 사량도 옥녀봉에도 아버지와 딸의 설화가 있습니다.
사량도 가마봉이 마주보이는 어느 산기슭 바닷가.
일찍이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젖먹이 어린 딸을 어렵게 키웠습니다.
모진세월을 함께 넘기며 한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 덧 딸은 가슴 봉긋한 여자로 성장해 있습니다.
이제 아비의 눈에 딸이 여인으로 보입니다.
참고 참지만 끓어오르는 욕정을 거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견뎌봅니다.
그것을 눈치 챈 딸,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단칸방에서 함께 잠을 자야하는 밤이 다가올 때마다
이 밤도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랄뿐입니다.
불쌍한 아비의 숨을 참는 거친 숨소리에 잠을 설치지요.
어느 새벽녘 아비의 거친 숨소리가 끊기더니
얼굴위로 뜨거운 숨결이 쏟아집니다.
체념한 딸이 이야기합니다.
사람으로는 이럴 수 없으니 사람이 아니어야겠지요.
소의 모습을 흉내 내어 저 산 봉우리에 올라 사람임을 포기하고 음매하고 울고 나서 내려오시면
내가 받아들이겠노라고 이야기 합니다.
올라는 가시겠지...
올라가는 길에 욕정이 사그러 질 거야...
욕정이 사그라지지 않아도 사람임을 임을 포기하고 음매하고 울지는 않을 거야...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안심하려던 차
산마루에서 음매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좌절한 딸,
다른 길로 산마루에 올라 살던 집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몸을 날립니다.
옥녀봉 밑에는 사철 붉은 이끼가 끼어있는데
주민들은 이것을 옥녀의 피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섬주민들의 결혼식 때면
옥녀봉이 보이는 곳에서는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지 않았고
신부가 결혼하여 가마를 타고 가다가도
옥녀봉 아래를 지날 때는 걸어서 갔다고 합니다.
사실 근친상간은 신화시대부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지의 신 가이아의 남편은 그 아들 우라노스이고,
최고의 여신 레아는 크로노스와의 사이에서 제우스를 낳았고
크로노스를 죽인 제우스의 부인이 됩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도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은
남동생인 쁘토레마이오스 13세이지요.
어찌 보면 신화속의 생명의 시작은 근친상간입니다.
아비도 없이 새끼가 나옵니다.
이 ‘낳는 이’를 대지모신이라 합니다.
그 후 '낳는 이"가 ‘낳은 이’인 자식과 짝을 이룹니다.
그렇게 또 다른 생명이 탄생합니다.
원초적 자연의 형태입니다.
하지만 문화가 발전하면서 근친상관의 금지가 사회를 이루는 전제조건이 되지요.
자손을 번식시키려면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야 하는데,
공동체 내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다른 공동체와의 교류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을 매개로 친족 관계가 형성되고 이것이 곧 사회구조의 기초가 됩니다.
즉 이러한 터부의 유지여부가 원초적 자연과 인간의 문화를 구별 짓는 지표가 되는데
원초적 자연환경 속에 사는 섬지방은 그 터부가 더욱 강조되어야 하므로
이러한 설화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누이바위가 굴러 내려와 있는 곳
그곳에서 오빠바위쪽을 바라보고...
바닷가 암벽을 타고 대매물도가 잘 보이는 쪽으로 이동해 봅니다.
바위틈 속에 물이 가득 하더니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포말만을 남긴 채 다 빠져나갔습니다.
대매물도를 보고
소매물도 선창 방향으로 몸을 돌립니다.
예전에 고기배를 대던 곳과 선창이 보입니다.
변기에 앉아 응가하는 아이
꽤나 힘이 드는지 주먹을 꽉 지었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등대섬휴게소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봅니다.
어느 문 윗부분의 글
"인생은 그림 같다."
미술평론가 손철주의 책이름인데 무슨 관계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들어가 물어보려는 순간 배가 들어옵니다.
소매물도를 나오며 그림속 풍경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인생이 그림 같다'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모든 삶이 그 사람한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행복해 보인다는 거죠.
그러고 보니까 모든 근경은 전쟁이고, 모든 원경은 풍경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책제목이 '인생은 그림 같다'가 아니고
'인생이 그림 같다'이네요.
들어가 무언가 물었으면 실없는 사람이 되었겠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그런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인생은 채색된 그림위에 있다."
남매바위계곡이 보입니다.
남매바위를 당겨봅니다.
그 억울함이 울음이 되어 섬 전체에 울립니다.
그래, 너희 죄가 아님을 안다.
그래도 너희를 징죄하여 이 땅의 질서를 유지한단다.
안녕! 불쌍한 남매야....
등가도를 보고...
가익도를 보고...
소매물도를 뒤돌아 보고...
우리가 곧 내릴 대매물도를 봅니다.
'如是我見 寫而不作 > 우리강 우리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앞 바다 4. 매물도 2 (0) | 2013.02.09 |
---|---|
통영 앞 바다 3. 매물도 1 (0) | 2013.02.08 |
통영 앞 바다 1. 소매물도까지의 뱃길 (0) | 2013.02.05 |
관악산 (0) | 2013.02.04 |
나바위성지 성당포구 둘레길 일부, 그리고 광주공항 (0) | 2012.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