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유산답사회 219차 정기답사
2012년 4월 8일(일)
제주 마을 집중탐구
조천리
안내자
송장환(하늘타리)
참고자료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2.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3. 고영철의 역사교실
4. 다음블로그 "하늘타리정원"
5. 기타 관련서적
조천읍 조천리
조천읍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부에 위치한 읍으로 제주시 관내 7개 읍·면 중 애월읍과 구좌읍 다음으로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인구는 애월읍 다음으로 많다.
지금의 조천읍은 고려 1300년 (충렬왕 26)에 제주목(濟州牧)을 동, 서도 (東西道)로 나누었을 때, 동도 신촌현 (新村縣)과 함덕현 (咸德縣)에 속했다. (『탐라지』제주목, 건치연혁)
제주목 동도(東道)는 동도천호소(東道千戶所)라 하고, 동도천호소는 조선 1404년 (태종4년)에 동도정해진(東道靜海鎭)으로 고쳤다. (『태종실록』4년 4월 신묘)
조선 1416년 (태종 16년)에 대촌현 (大村縣: 지금 제주시 중심부)을 본읍으로 한 제주목을 설치할 때, 동도정해진에 속했던 신촌현과 함덕현이 제주목 소속이 되었다.
이후 제주목 동면 (東面:임시적인 방위면 제도.『명종실록』7년 5월 신해)에 속했다가 17세기에 제주목을 좌면(左面), 중면(中面), 우면(右面) 등 세 면으로 나누었을 때, 제주목 좌면에 속했다. 고문서에 따라서는 좌면을 동면(東面)이라 한 경우도 있다.
조천이라는 이름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1439년(세종 21)조천관이 세워졌다는 기록에서 부터이다.
그 후 1601년 김상헌의 남사록에 피역자들이 왕왕 배를 타고 육지로 도망가기 때문에 조천관, 별도포 두 곳에서만 배가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한 뒤, 입출항자를 철저히 감찰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17세기말 편찬된 제주의 옛지도에 조천관리 표기가 보이고 1702년 탐라순력도와 1709년 탐라지도에 조천으로 표기되어 나타난다.
18세기말 제주목 좌면이 구좌면과 신좌면으로 나뉘어 조천지역은 신좌면에 속하였다.
1931년 신좌면이 조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85년 조천면이 조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신좌면에 속한 마을은 9개마을이었으나 1914년부터 신흥리가 추가되었으며 현재는 선흘리와 대흘리가 각각 1, 2리로 나뉘어 10개 법정리, 12개 행정리를 관할한다. (신촌리, 조천리, 신흥리, 함덕리, 북촌리, 선흘1리, 선흘2리, 와산리, 대흘1리, 대흘2리, 와흘리, 교래리)
이중 조천리 지역의 마을 형성을 거론할 때는 450년전 우도에서 건너온 임씨 할머니가 속칭 안거리에 거주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본다.
또는 중상동지역 말모왓(유구동)지역으로부터 속칭 대초낭우영과 지새왓부근 일대에서 산재하여 거주하다가 음료수와 비옥한 토지를 찾아서 해안선가까이로 내려왔다고 한다.
어떤 경로로 이 지역에 거주하였느냐는 논의와는 별도로 조천리라는 행정지명은 조천관이 들어선 다음 조천관이 있는곳이라는 의미의 조천관리에서 출발하였음에는 이론이 없다.
조천이라는 이름의 뜻과 연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중국진나라의 서불이 진시황에 명에 따라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제주를 찾아올 때 이곳에 처음 이르렀는데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포구의 큰 바위에 조천석이라고 새겨놓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는 의견이 있고 조선중기문신 곽기수가 쓴 조천진성중창기에 육지부에 출륙하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라고 쓴 것에서 유추하듯이 천기를 살핀다는 뜻으로 조천이라 하였다는 두 가지의 의견이 갑론을박중이며 혹자는 삼을나가 맞이한 세공주의 우마와 오곡이 이곳으로 들어와 조천이라 했다고 한다. (1817, 김광택)
조천은 조선시대 주요 포구로서 육지부와의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지역이다. 조선후기가 되면 그 부를 바탕으로 양반이 된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조천의 김씨 집안이다. 이들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자식들을 일본이나 서울로 유학을 보낼 수 있었다. 이때 유학 갔던 자제들에 의해 새로운 사상이나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이들 조천의 김씨 집안 중 항일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했던 김명식, 오사카의 일본사회운동현창탑에 명패가 모셔져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오사카 노동운동의 대부 김문준, 여성으로서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했던 김시숙,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나섰던 김운배, 광주항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김시성과 김시황, 공산주의 항일운동을 벌인 김시용 등이 그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조선말기 민란기에는 이들 조천의 김씨 집안이 민란을 진압하던 봉건세력으로 이름을 떨쳤다는 점이 흥미롭다. 1898년 ‘방성칠 난’ 때 진압군을 조직한 김응빈이 가장 두드러진 경우이다. 그러던 그들이 일제 지배로 기득권을 상실하게 되고 그 자녀들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공산주의 및 무정부주의 사조의 영향으로 항일세력으로 변모했다.(이영권)
조천리의 자연마을은 본동(해안마을), 신안동, 양천동, 봉소동의 4개소이나 주민들은 본동을 네 곳으로 나누어 상동, 중상동, 중동, 하동으로 구분, 도합 7개동네로 나누고 있다.
조천리의 인구규모는 2010년 12월 말일 기준으로 2043가구, 5304명에 달하며 조천읍 12개 행정리 가운데 면적으로는 9번째, 인구로서는 함덕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
I. 독립운동관련활동
1. 제주항일 기념관
(1) 항일기념관은 조천 만세동산내에 위치하고 있다.
만세동산은 조천리 동북쪽 큰길가에 있는 속칭 '미밋동산'을 가리킨다.
이곳을 만세동산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귀향한 김장환(당시 휘문고재학)을 통해 그 내막을 알게 된 김시범 등 14명이 중심이 되어 향유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 이곳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제주 항일기념관 건립은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팔각정을 지어 삼일정이라 이름 붙이고 그 옆에 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운 것에서 비롯된다. 1988년 경 조천읍의 뜻있는 이 46명에 의해 조천만세동산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옛 건축물들을 모두 헐고 새로운 3.1독립운동 기념탑을 1991년에 세운 후 1996년에 항일기념관 건립자문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업을 추진 1997년에 제주항일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그 후 기념광장, 위패봉안실, 참배단, 추모탑이 시설되었고 2011년부터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 항일기념관으로 개편,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 항일운동사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제주지역 항일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여 제주 항일운동의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제주도의 3대항일운동이라고 이야기되는 1918년 법정사 항일투쟁, 1919년 조천만세운동, 1932년 제주해녀항일투쟁 등을 비롯하여 일제에 항거했던 제주민의 역사를 충실하게 모아두었다.
항일기념관 1층 조형물은 제주도의 지형을 8각형으로 표현한 계단위에 험난하고 거세게 밀어닥치는 파도로 표현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제주인들의 항일정신을 5인의 군상으로 표현하였고 아기와 함께 정면을 응시하는 모자상은 후손들에게 영원히 계승될 자주 독립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제1전시실에는 3·1운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1876~1945년의 항일 운동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항일운동연표, 일제 침탈과 기구의 개편, 송죽매의 결의, 지식층의 성장과 민족교육, 제주도 항일운동 발생지역도, 법정사 항일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의병운동, 제주인의 항일운동 부조(浮彫), 일제의 강제 침략과 항일 운동 관련 사진 그래픽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3·1운동 전국상황도, 전국 3·1운동의 실체, 조천만세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백응선 비석, 독립희생회 군자금 모금운동, 옥중생활사, 항일학생운동, 항일청년운동, 해녀항일운동의 매직비전과 패널, 종합그래픽, 제주인의 국외 항일 운동, 항복문서 조인식 모형, 백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내부 전시실에 관련한 설명은 시설내 해설사에게 듣는 것이 도리이므로 생략함)
(2) 3·1독립운동기념탑
예전 비석과 팔각정을 허물고 1991년에 새롭게 조성한 탑이다.
곁에 있는 ‘김봉각선생 공덕비’의 주인공 김봉각이 선뜻 5억 원을 내놓으면서 이뤄진 사업이다.
김봉각은 조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항일운동을 했다. 비밀결사인 계림동지회 활동으로 2년 6개월 징역을 살았고, 해방 후에는 조국으로 돌아와 잠시 인민위원회와 민주청년동맹의 일을 하였다. 1946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조총련의 주요 간부직을 맡아 활동했고 동시에 사업가로서도 크게 성공을 했다. 1988년에는 조총련에서 탈퇴를 했다. 3·1만세운동기념탑 건립을 위해 기금을 낸 건 조총련을 탈퇴하고 2년이 지난 후 고향을 방문했던 때의 일이다.
기금을 출연하면서 자신의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하고 독립유공자로 포상해 달라고 대한민국 정부에 신청서를 냈으나 정부에 의해 거절되고 1999년 도쿄에서 생을 마쳤다.
(3) 독립유공자 비석 - 김연배, 김시성, 부생종, 김순탁, 김문준
基督敎人金年培之墓
조천읍 조천리 2381번지에서 출생하여 1923년 사망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제주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제주에 도착하여 김시범(金時範)과 협의하여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3월 17일부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때 김년배도 동지로 참여했다. 3월 23일 제3차 시위에서 백응선·이문천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고, 3월 24일 4차 시위 때도 김년배가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 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2월 12일 가출옥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23년 11월 26일 28세로 요절하였다.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그의 비석 앞면에는 「基督敎人金年培之墓」'西紀一八九六年七月十四日生 西紀一九二三年十月十八日卒' '以信終命 必得永生 只有一限 先於其母'(믿음을 가지고 생을 마쳤으니 반드시 영생을 얻으리라. 다만 한 가지 한이 있으니 어머니보다 앞서 감이라.)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조천초등학교 북쪽에 그의 생가가 보존되고 있다.
金時成
본관은 김해. 호는 석연(石淵). 아버지는 월방(月舫) 김창호(金昌鎬)이다. 태어난 지 4일 만에 아버지를 잃었고 4세 때에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선배가 부당한 이유로 퇴학당하자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고, 동맹을 주도한 대표 학생 25명과 함께 퇴학당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영어학교에 유학하고 있을 때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김시성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성진회(醒進會)에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어 광주로 체포되어 왔다.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하였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미결 기간까지 합쳐 1년 6개월 넘게 옥고를 치렀다.
서기1936년 사망했는데 비문은 竹岩 高順欽이 직접 썼다.
1993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獄死夫生鐘之墓
서기1909년 8월 25일 조천면 함덕리에서 출생하였다. 김일준과 독립혁명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서기1930년 부생종은 12월 대구고법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나왔다. 출옥 후에도 서기1933년 김일준과 함께 제주도농민회를 조직하였고, 향동회와 민풍진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서기1934년 부용준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역사를 통한 구국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창하다가 서기1936년 6월 29일 가족 상면도 금지당한 채 목포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를 분하게 여긴 동지들이 그의 무덤 앞에 ‘獄死夫生鍾之墓(옥사부생종지묘)’라는 비석을 세워 그의 영혼을 위로하려 하였으나, 이 비석의 ‘옥사’라는 글귀가 일본에 저항하는 의식을 심으려는 것이라 하여 동지들이 다시 잡혀가 옥고를 치렀고 비석은 조천주재소 창고에 압수되었다. 할 수 없이 ‘夫生鍾之墓’라고만 새긴 매우 작은 비석을 세웠다가 해방이 되자 지서 창고에서 그 비석을 찾아다 다시 세웠었는데, 서기1982년 8월 15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나서 서기1984년 북제주군수 명의로 ‘殉國烈士夫生鍾之墓’라는 커다란 비석이 다시 세워지면서 무덤 앞에 묻었다. 현비석은 추후 제작한 것이다.
묘지는 함덕 마을 서쪽 신흥리로 통하는 농로를 따라 50-60m쯤 되는 곳에 있다.
金淳鐸墓碑
1895년(고종 32) 3월 7일∼1938년 3월 12일. 호는 양천(養泉)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 출신이다.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신명사숙(神明私塾) 교사로 지냈다. 제주 조천에서 일어난 1919년 독립만세운동은 김장환(金章煥)이 처음 시작하였으며, 그도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해 4월 징역 6월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았다. 1928년 ‘제주청년동맹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29년 후반부터 노동야학을 실시하여 청소년들을 계몽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1930년 ‘신좌소비조합’ 상무이사, 동아일보 제주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930년 2월 피체되어 4월여 옥고를 치르다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가 죽자, 생전에 행한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어 안요검이 비문을 쓰고 친구들과 문하생들이 비석을 세웠다. 1997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되였다.
묘지는 조천읍 대흘리 가족묘지에 있다. 이 비석에는 源泉金淳鐸之墓라고 되어 있어 호가 위 자료와 다르다.
木牛金文準之墓
1894년(고종 31)∼1936.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목우(木牛)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제주도 조천(朝天)에서 태어났다.
1910년(융희 4) 3월 의신학교(義信學校) 보통과를 졸업하고 1912년 제주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3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농림학교(朝鮮總督府農林學校)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 입사를 하였다. 1918년 4월 제주도 정의공립보통학교(旌義公立普通學校)와 구좌중앙교(舊左中央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일본의 심한 간섭으로 1927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사카[大阪]에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30년 노동조합이 해체되자 전협(全協) 산하 일본화학노동조합 오사카지부를 조직하여 지도하다가 검거되었다. 1932년 4월 12일에 오사카 공소재판에서 징역 2년 6월이 선고되어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35년 6월에 재일(在日) 한국인들을 위해 한글신문 《민중시보(民衆時報)》를 창간하여 계몽운동을 지속하다가 1936년 5월 26일에 오사카 도근산요양원(刀根山療養院)에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일본인 좌익단체와 합동으로 치렀고, 일본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준 시신을 제주도로 운구하겠다고 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안세훈(安世勳), 김유환, 김시용 등이 당시 일본에 있던 고순흠과 연락을 취하면서 1937년 3월 25일에 조천공동묘지에 김문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보내온 비석이 조천리 구공동묘지에 있다가 2000년 8월 15일 그의 행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追敍)된후 묘지는 현충원으로 이전되었고 묘비는 항일기념관으로 이설하였다.
*참고 : 朝天邑 消費組合 事件
신좌소비조합은 1927년 김류환 등 당시 조천리 청년 20여 명에 의해 창립되었다. 목적은 실비로 물품을 판매함으로써 리민(里民)의 경제적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대 조합장 및 이사들로 김순탁(金淳鐸)·김시범·김운배(金운?培) 등이 있었고, 조천만세운동과 관련된 자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좌소비조합은 1937년부터 김시용(金時容)·김류환(金?煥)·안요검 등에 의해 사회주의운동의 외곽단체로 대중운동을 주도해나갔다. 이들은 고(故) 부생종(夫生鐘)의 비석 건립, 고 김문준(金文準)의 추도식 거행, 고 김순탁의 추도식 및 비문 건립 운동, 중일전쟁에 대한 반전투쟁, 조천공립심상학교 증축 문제를 통해 대중운동을 확산시켜나갔다.
신좌소비조합을 주도해 나가던 이들은 1942년 검거되어 다음과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김시용[당시 37세, 제재업, 조천리]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45년 7월에 병으로 보석되었으나, 같은 해 7월 23일에 사망하였다. 김류환(당시 41세, 소비조합 이사, 조천리)은 징역 3년, 안세훈(安世勳)[50세, 농업, 조천리]은 징역 2년, 현사선(玄巳善)[36세, 잡화상, 함덕리]과 김평원(金平遠)[36세, 잡화상, 조천리]은 징역 6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2. 양천상동 조천리 구공동묘지
金時淑
1880년 음력 2월 24일 신좌면 조천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며, 여성운동가이다. 두 번의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숙부 김문주를 찾아가 물으니, "책 속에 세계가 있고 글 속에 개화 문명이 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시숙은 40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매진하게 된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때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걸 보고 더욱 공부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최정숙, 강평국과 같은 신식여성들과 만나게 되고, 마침내 1925년 이들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조천리에 여성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내용을 가르쳐서 조천주재소에 검거되고 요시찰인으로 낙인이 찍힌다.
김시숙은 조천 김해김씨 자손으로 김시용, 김운배, 김문준 등 독립운동가 집안의 출신이다. 김시숙은 1927년 일본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교포 여성들이 더한 착취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김시숙은 재일여공보호회를 조직하여 이들을 보호하고, 노동소비조합의 회장이 되어 여공들의 복지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무정부주의 운동가 고순흠이 조직한 신진회에 가입하여 여성부의 책임자를 맡아 몸을 사리지 않고 활동한다.
결국 과로로 쓰러져 1933년 7월 15일 오사카의 적십자병원에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시숙의 장례식 때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각 여성 김시숙 호상부인회>를 조직하여 일본에서 고유제를 지내고, 제주로 운구하기 전에 성대한 고별식을 가졌다.
그녀의 비에는 죽암 고순흠이 직접 비문을 썼다.
"재래의 불합리한 도덕과 윤리는 특히 여자의 개성과 인권을 무시했다. 그 결과 약자는 거기에 순종하였으니 강자는 반역케 되었다. 반역자는 왈 탕녀, 순종자는 왈 烈婦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史實에서는 순정의 愛도 진정한 貞操도 발견할 수 없다. 남성이 그것이 없는 이상 여성에게만 그 존재가 설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모순된 사회에 있어 진정한 열부라면 충실한 반역자 무리일 것이며 동시에 비참한 시대적 희생 계급이다. 이 계급의 1인인 김시숙 씨는 고종 17년 경진 2월 24일 조천 閥門海 金종가 출생으로 眉長俊隆하고 大人남자와 같은 개성의 소지자이다.
어찌 夫權전제주의의 맹목적 현모양처주의에 肯從할 수 있었으리오. 결국 결혼 생활은 실패하고 40세에 궐기하여 初學을 略修한 후 부인 黎明및 幼年 교육을 개척하고 渡日하여 工女勞動消組의 창업과 守成운동에 몰두하다가 시기가 不遇인지 그 사업도 모두 소멸되고 자신도 54세 되던 癸酉7월 15일 대판 적십자병원에서 주인 없는 송장을 이루고 말았다. 그래서 기구한 처지가 같은 여성들끼리 護喪부인회를 조직하여 返柩하고 黃鷄山아래 累塚가운데 비석까지 세우게 되었다. 명왈‘철저한 시대적 희생자며 충실한 여명 운동가여! 님의 몸은 비록 구학(溝壑)의 진흙이 되었으나 님의 피와 땀은 광명의 천지에 만인의 생명으로 나타날 날이 있으리라"韓亡後 27년 병자 7월 15일 세움. 고순흠 근지 『20세기 제주인명사전』(김찬흡, 2000) (제주여성문화유적100에서 옮김)
金時成
항일기념관 독립유공자비석 참조(구비석은 항일기념관 독립유공자비석들과 함께 있고 현 비석은 이장후 개비한 것임)
金沄培
호는 해강(海岡). 가명은 김제민(金濟民)이며 호적상의 이름은 김신배(金申培)이다. 아버지는 김희수(金熙穗)이다.
일찍이 한문을 익혔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시즈오카[靜岡]에서 군밤 장수를 하면서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지 않자 귀국하여 민중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19년 3월 조천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고, 동지들이 체포되자 부산으로 탈출하여 1920년 2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박은식(朴殷植), 김창숙(金昌淑), 손영직(孫永稷)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에 대한 협조 요청 편지를 경상남도 밀양에 거주하는 손종현(孫宗鉉) 외 13명에게 전달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밀명 문서를 갖고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일본 고베[神戶]와 오사카[大阪]를 경유하여 1920년 12월 상순 부산 영도로 입국하여 문봉기(文奉祺)와 함께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1921년 8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 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보』와 『전우(戰友)』를 편집하였다. 1929년 이동삼(李東三), 김이대(金履大) 등과 함께 정의부 중앙위원으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비는 만주에서 같이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안세훈이 직접 새겼다.
金明植
호는 松山,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초대 논설위원으로 국권회복에 크게 기여한 선각자이며 제주4걸(김명식, 고순흠, 김문준, 강창보)로 꼽힐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조천 출신으로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마친 그는 유학 당시인 서기1912년 10월 해공 신익희 등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면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 논설기자로 그가 쓴 ‘대세와 개조’(1920.4.1)와 7차에 걸쳐 연재한 ‘제1차 세계대전후 세계사’(서기1941.4. 1.-10.)는 유명하다. 제주도 최초의 사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노동공제회 제2대 회장(서기1921)을 지내고 [신생활]지 필화 사건으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제주는 물론 전국의 청년들에게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서기1922년 1월 22일 매일신보 [신생활] 필화사건으로 관련자들에 대한 언도 공판이 내려질 때 김명식은 일본인 재판장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천만 우리 동포 중에서 마음 속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라는 망해도 민족의 혈맥은 절대로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혼과 정기를 살리기 위해 언론인인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서기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체포된 김명식은 독립정신의 화신인 것처럼 한치도 굴복함이 없이 옥중투쟁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참다 못한 일제 관헌은 그의 손목을 짓이기고 혀까지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글을 쓸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함흥형무소를 출감한 것은 서기1941년 가을이었다. 일단 고향에 돌아온 그는 치료를 위하여 오사카에 갔으나 그 해 10월 하순 한을 안은 채 운명하였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1982. 94쪽)
(사실에 근거한 기록) 1922년 함흥형무소에 복역 중 1923년 7월 26일에 건강상태가 악화돼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1930년에는 오사카에서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돼 일본의 오사카형무소에 재수감된 뒤 『신생활』 필화 사건의 남은 형기 동안 복역하였다. 1938년쯤에 고향에 돌아왔고 일제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리던 말년의 김명식이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창씨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氏制度 창설과 鮮滿一如」, 『삼천리』, 1940년 3월) 등의 일제의 정책을 찬성하는 글을 쓰다가 1943년에 별세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교육/학술 부문명단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묘소는 2001년에 새로 정비된 것이다.
김명식의 형 김형식과 아버지 정의현감 김민주의 묘도 인근에 있다.
3. 대흘리 지경 문중 묘지
김시범(金時範)
조천리에서 김진호의 4남으로 태어나 뒤에 김주호의 아들로 입양하였다.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중심 인물이다. 조천리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지역도 조천·함덕·신흥·신촌 등 4개 마을로 점차 확대되었다. 최초의 거사일은 김시우(金時宇)의 소기일(小忌日)인데 김시우는 당시 유학자로서 존경을 받던 분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시은(金時殷)·김시범·김장환 등과는 친족간이다.
1차 시위에서 연행된 김시범은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는데, 동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만기출옥한 후 옥고를 치렀던 동지들이 모여 순사(殉死)한 동지 백응선의 묘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이 비문을 김시범이 지었는데 일제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 연호를 썼다.
김시범은 동지 김연배와 함께 사숙(私塾)이나 야학을 통하여 후생들을 가르쳤으며 조천소비조합 운동에도 참여해 임원을 맡기도 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어 미군정 당시에는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초대 조천면장으로 재임하기도 하였다. 1945년 7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개편할 때 부의장에 추대되었다. 그 후 3·1사건으로 미군정에 검거되어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돼 벌금 3000원을 선고받는다.
1948년 11월 25일 부인 신경보(愼敬輔, 화북)씨와 함께 붙잡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조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분들이 모두 보훈청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으나 김시범과 김장환은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김시범의 묘는 마을에서 가까운 경작지 내에 산담도 없고 비석조차 없는 상태로 묘지가 유지되다가 도로개설공사로 인해 최근 만취 김시우의 묘와 함께 대흘리지경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
김시은(金時殷)
본관은 김해. 호는 농산(聾山). 아버지는 김봉호(金奉鎬)이다.
김시은은 김시범·김장환과 함께 3월 17일부터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모았다. 14인의 동지는 김시은을 비롯하여 김시범·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이었다.
거사일은 3월 21일로 결정되었고, 신촌리·함덕리 등의 인근 마을에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알려주며 모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1일 오후 3시경 김시은은 김시범·김장환·황진식 등과 함께 제주성내로 행진을 강행하여 신촌리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경찰 30여 명과 충돌하였고, 김시은 등 13명이 체포되었다. 김시은은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 4월 8일 만기 출감하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4. 금대
김명식의 형이자 일제강점기 한학자로 조천면장을 지낸 김형식(호는 혁암)이『금대명』이라는 비를 세웠다.
혁암은 『금대문』이라는 시를 지어 조천만세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김유배에게 글씨를 쓰게하고1925년초 문하생 오평원을 시켜 돌에 새기게 하여 만취의 아들 윤환(允煥)과 함께 이해 3월 21일 바로 조천만세운동 제6주년을 기념해 금동산에 명비(銘碑)를 세웠다.
비석에는 정면에 큰 글씨로 「琴臺」라고 새겨져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琴臺銘 幷序 弟瀅植撰 梨洞路左有小岡其形如琴其名琴山山下有書齋是我晩翠先生故宅也 先生每與冠者五六童子六七嘯 于此山山之一木一草無非錦囊中物先生歿後山之名幾與世人相忘及門諸生恐遺墟煙蕪與先生之子允煥謀伐石築臺名之以琴臺銘曰 先生存而山巍巍 先生逝而山寂寂 石不 而臺兀兀 仰彌高而銘歷歷〕라고 되어 있으며, 좌측면에는 〔後學金灐金濡培書 門人吳平元□〕, 우측면에는 〔孔子降生二千四百七十六年 歲在乙丑暮春者建〕, 뒷면에는 글씨가 없고, 윗면에는 첫줄에 〔1961년 5월 5일〕 둘째줄부터 두 줄로 〔 STAR JOINTING PYRAMID / IT IS THE MONUMENT OF MY MANCHY〕라고 되어 있다.
"금대명 병서(琴臺銘 幷序)
시제( 8촌 아우) 형식(瀅植) 지음
오얏나무골 길 왼쪽에 작은 동산이 있는데, 그 모양이 비파와 같아 금산(琴山)이라 한다.
동산 밑에 서재(書齋)가 만취(晩翠: 金時宇(1875-1918)의 號)선생의 옛집이다.
항상 성인 5,6명과 동자 6,7명이 이 동산에서 시를 읊었는데,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모두 금낭화처럼 아름다웠다. 선생이 돌아가신후 모든 것이 잊혀져 가고, 유허(遺墟)조차 사라져 버릴까 염려하여, 선생의 아들 윤환(允煥)과 함께 계획하여 돌로 깨어 대(臺)를 쌓아 금대(琴臺)라 이름 하였다.
명(銘)으로 이르길,
선생이 계실 때 동산은 높았으나,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동산이 적적해졌네,
돌에 새겨 대(臺)를 보존하니, 고매한 뜻 새긴 글 오래하리라.
김유배(金濡培)가 글을 쓰고, 오평원(吳平元)이 글을 새김. 공자강생2476년 乙丑 3월 세움."
공자강생 2476년 봄에 건립했으니 1925년의 일이다.
김시우선생을 따르는 분들이 유림제현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당시 유림은 반일제세력은 아니다. 일본연호를 쓰지 않으면서 건립년도를 알리기 위한 방안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5. 야학당터
조천 야학당은 1925년 6월01일 항일 운동가 김시용. 김시균 선생등에 의해 설립되어. 마을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며, 문맹을 물리치고 근대의식과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1929년 조천 야학당에서는 조천청년동맹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부녀자를 위한 야학도 실시하였으며 마을청년과 부녀자들을 상중동반(上中洞班),중동반(中洞班),하동반(下洞班), 등 3개 반으로 나누어 교육시켰다. 조천리 새마을회는 민중계몽운동과 근대민족교육의 요람인 이곳 조천 야학당을 복원함으로써 후세들에게 지역의 역사와 전통, 올바른 민족의식을 교육시키는 배움의 전당으로 삼자는 취지 아래 제주도의 지원에 힘입어, 2009년 7월 야학당 옛 자리에 2층 건물을 준공하였다.
6. 마을내 김시범 등 만세운동 독립운동가 생가
마을 골목 이곳 저곳에 김시범을 비롯하여 김시은·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의 생가터에 표식을 하였다..
II. 교육
1. 조천초등학교
(1) 학교홈페이지
-1906. 6. 의흥학교 설립(연북정)
-1909. 조천의숙설립 (이성호씨 자택)
-1914. 2. 3. 신명사숙설립 (김태호)
-1921. 6. 20. 조천공립보통학교설립인가(전남고시 53호)
-1922. 11. 1. 조천공립보통학교개교
(2) 관련 기사모음
-1924년 7월 전라남도 제주도청 발행 “미개의 보고 제주도” 41쪽은 “ 조천공보교는 신좌면 조천리에 있으며, 대정9년(1920년) 창설하여 현재 학급 수 4개 외에 부설학교 2학 급이 있다”고 기술.
-1929년 5월 1일자 동아일보는 조천공보교의 학급증설문제를 보도하면서 조천공립보통학교가 9년 전에 공립으로 인가되었다고 설명
-1921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는 “제주청년 대운동회”제하 기사에서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에서는 일반청년들의 발기로 조천공립보통학교 및 제주면 화북리와 구좌면 행원리 양리의 개량사숙을 연합하여 지난 5월31일과 6월 1일간 동리 죽헌에서 대운동회를 개최 하였는데....”라고 하고 있다.
(3) 교정비석중 일부
- 사전 김태호 주사 김사호 창교기념비
대한융희4년 (1910년) 경술에 당시 유지자대표 김태호씨등이 발기하여 신명사숙을 설치하고 기후 1920년 경신에 공립학교로 승격되어 김사호씨는 기지를 희사하고 김태호씨 유지자와 공히 자금을 구집하여 본교를 창설하시고 1928년 무진 11월에 입석기념하였더니 4.3사건시 의연기념비가 파상연멸되어 1960년 경자 기성회원 대표 한창숙씨등이 노후된 본관을 재건할때 유공자 제씨를 입석 표창함. 1960 경자 추
- 김칠순 선생 장학비
1911년 조천출생, 1927년 본교졸업, 경성숙명여고보 1931년 졸업, 1934년부터 1937년 2월까지 본교교편을 잡다 의병퇴직하면서 아동문고설치비로 일금 오백원을희사. 30세에 황천의 객이 되니 애석함을 금치못한다. 1941년 5월 1일
III. 4.3의 흔적
1. 조천지서터(현 조천지구대)
1945년 10월 국립경찰 창립과 더불어 제8관구 22구경찰서 조천지서로 발족했다. 4·3 당시 경찰 및 응원대의 활동 근거지가 됐으며 피의자에 대한 취조 및 학살이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조천지서에서는 1948년 3월 6일 김용철(조천중학원 2학년. 21세)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유로 당시 직원 5명 모두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가 지서를 습격했으나 사전 발견, 선제 사격으로 피해가 없었다. 1948년 4월 4일 무장대에게 재습격 당해서 교전 중 1명의 무장대원이 사망하고 2명의 경찰관이 부상당했다.
현재는 건물이 개축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뒤편으로 가면 당시 지서 외곽을 축성한 성담과 총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 4·3 발발 이후 다급해진 지서에서 주민들을 동원해 축성한 것이다.(제주도·제주사삼연구소, 제주4·3유적Ⅰ 340∼341쪽)
조천지서 경찰에 의해 1949년 1월 13일과 2월 1일, 조천리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중산간 및 해변 각지의 도피자가족 90여 명의 지서 앞밭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김용철 묘
조천읍 와흘리 1156번지 가족 묘지 안에 있다.1948년 3월 4일 조천지서에서 연행되어 취조를 받던 조천중학원 2학년 김용철(당시 21세)이 고문치사 당했다. 이 사건은 조천중학원 학생은 물론 주민들까지도 분노를 자아내 검시관의 부검을 통해 고문치사임이 밝혀졌다. 미군정고문관이 직접 조사에 나서기도 했으며, 당시 조천지서에서 재직했던 조한용 지서장 등 5명의 경찰관 모두에게 3-5년의 징역형이 언도되기도 했다.
4·3의 길목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젊은이들에게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 도피입산하는 계기가 되었고, 도민들로부터는 경찰에 대한 불신을 더욱 부추기는 일대 사건이 되었다.
마을 인근에 있던 묘를 1993년 4월 23일 가족공동묘지로 이장했다.
2. 조천중학원터 (현 보건소)
해방이 되면서 국민학교와 더불어 중등학교 설립 붐이 일어난다. 조천중학원은 그 시기 다른 지역의 중학원과 마찬가지로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 1946년 3월에 설립된다. 5개 학급에 1,2학년 20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당시 교사로는 현복유(학원장, 국어), 김민학(수학, 과학), 김동환(영어), 이덕구(사회, 체육), 김석환(역사), 김응환, 한평섭 등이 근무했다. 대부분 일본 등지에서 공부한 교사들은 또한 당시 친일파 척결 등을 주장하는 좌익단체에 알게 모르게 관련하고 있었다. 이후 교사들은 4·3의 와중에 대부분 희생된다. 조천중학원은 1947년 3·1절 시위 및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청의 탄압을 받아 사실상 수업이 어려웠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도 심했다. 좌파적 분위기가 압도했던 당시 분위기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민애청 등의 조직원이 되었고 이 때문에 탄압을 피해 입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 와중에 1948년 3월 6일 2학년 김용철(당시 21세)이 조천지서에 잡혀간지 이틀만에 취조 중 숨지는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5·10선거 후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대부분 피신했으며 이후 조천중학원은 폐원조치됐다.
*이덕구.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경제학과 4학년 재학중 학병으로 일본 육군에 입대, 광복당시 계급 소위로 제대. 고향인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에서 조천중학원 교사로 재직중 47년 여름 자취를 감춘 뒤 한동안 조천면 신촌리 사돈집에서 숨어 지내던 이덕구는 남로당 간부회의 도중 검거됐다 풀려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해 4.3 발발 직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된 인민유격대의 3.1지대장을 맡게 된다. 미군정 정보 보고서는 제주읍과 그 동쪽조천면.구좌면을 중심으로 활동한 3.1지대가 3개 지대 중 가장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해주대회 참가차 제주를 떠난 김달삼사령관의 후임으로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된다.
1949년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 십자형 틀에 묶인 시체로 전시됐다.
3. 학살터
위치 ; 조천읍 조천리 조천파출소 맞은 편 40m 서쪽 옛 면민관 건물일대
1948년 12월부터 무장대 협조자라는 이유로 조천면 주민들을 학살했던 장소이다. 특히 소개령에 따라 조천리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신안동·양천동·대흘리·와흘리 등 산간마을 주민을 집단수용소(조천리 2685-1번지 당시 정미소 건물 40∼50평 규모)에 수용하였다가 그 중에서 도피자 가족을 골라 집단 학살했다.
1949년 1월 13일 집단수용했던 신안동 주민 등 30여명이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1949년 2월 1일에는 집단 수용됐던 양천동·대흘리 주민 등 60여명을 조천지서 경찰이 집단 총살했다. 이 날의 학살은 조천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불러모아 총살 장면을 보게 한 공개 총살이었다고 한다.
조천지서 앞 밭에는 구면민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이 현재 가구점으로 이용되고 있고, 이 건물 동남쪽에 붙어 있는 밭에는 크고작은 무덤 두 개가 풀도 자라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무덤은 수습하지 못한 어린이 시신과 연고자가 없어 버려진 시신을 합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제주도·제주사삼연구소, 제주4·3유적Ⅰ 337∼339쪽)
4. 조천리 집단수용소 (당시 정미소)
규모는 약 40평-50평 정도인데, 당시엔 정미소로 쓰였었다. 1948년 11월 하순 이후 조천면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면서 주민들은 해변마을인 조천과 함덕으로 피난했다. 하지만 중산간 마을의 청년들은 이전 토벌대의 횡포를 겪으며 내려와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대부분이 야산의 동굴 등지에 은신한다. 그러한 은신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진 중산간 주민들이 함덕, 조천의 집단수용소에 수용된다. 조천리 집단수용소엔 조천리 지경의 중산간인 양천동, 신안동, 봉소동은 물론 대흘과 와흘 등지의 도피자 가족도 수용되었고 이웃 해변마을인 신촌, 신흥 등지의 도피자가족도 수용되었다. 도피자가족 30명이 1949년 1월 13일에, 그리고 60여명이 1949년 2월 1일에 조천지서 앞밭에서 집단총살 당했다. (제주도·제주사삼연구소, 제주4·3유적Ⅰ 339∼340쪽)
IV. 설화와 역사의 흔적
1. 엉장메
제주 사람들이 설문대 할망에게 한소리로 부탁하기를 육지를 다녀오기 위해서 바닷길을 이용할때 많은 사람들이 풍랑으로 희생되니 제주에서 육지까지 다리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때까지 제주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답없이 들어주던 설문대 할망이었지만 지난번 제주섬을 만들면서 무거운 돌과 흙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단속곳이 다 헤져 있어 창피해 나다니기 어려웠던 차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옷을 만들어주면 제주에서 육지까지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힘껏 명주를 모았으나 속곳만드는데 들어갈 명주 100동(1동은 50필)이 아깝다고 생각되어 조금씩 줄이다 보니 약속한 날 모은 명주가 99동 밖에 안 되었다. 설문대할망은 다리를 만들기위해 기초석을 놓고 주변 돌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사람들이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섭섭한 마음에 작업을 멈추고 제주도를 떠났다.
지금도 남아있는 당시의 흔적으로 다리를 놓기 위해 기초작업을 하던 곳이 관콪이고 손에 들었던 돌들을 내려놓은 곳이 엉장메라 한다.
엉장메 서쪽이 세배개이고 동쪽이 광코지이다.
2. 환해장성
배를 타고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가며 성을 쌓았는데 이를 환해장성이라 한다. 『탐라지』의 기록에 따르면 원종 11년(1270) 진도에 있던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오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김수, 고여림이 군사들과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패하였고, 이긴 삼별초는 또다시 관군을 막기 위해 계속 성을 쌓았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으로 변하여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또한 헌종 11년(1845)에는 영국의 배들이 우도 앞바다에 머물면서 흰 깃발을 세우고 한달동안 측량을 하면서 돌을 모아 방위 표시를 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제주목사였던 권직이 크게 놀라 군사를 총동원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였으며, 그 해 겨울 도민들을 모두 불러모아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성들은 이때 보수했던 성으로 추정된다.
이곳 조천의 성은 다른 곳의 장성보다 그 두께가 넓으며 장성위로 잣길이 개설되어 있고 아직도 회곽도의 형태가 남아 있으나 계속 허물어 지고 있는 실정이다.
3. 조천연대
사방을 모두 돌로 쌓아올렸고 위 가운데는 슬라브처럼 평평하게 만든데다 층계 오르는 부분 외엔 2자 정도의 벽면과 같은 돌담을 쌓아올려 바람을 막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방영총람에 의하면 조천연대는 동으로 倭浦연대(현 신흥리) 서쪽으로 禾北 별도연대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천연대에서 화북의 별도연대는 보이지 않는 위치여서 원당봉수가 중계를 해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속 煙軍은 모두 12명으로 되어 있고 매번 2명이 한 조가 되어 5일씩 근무를 했으며 조천진 소속 별장 1명이 같은 조에 편입돼 관리를 했었다. 탐라순력도에는 관곶(官串)연대라고 표기되어 있다.
4. 금당지
불로초를 구하러 나선 진시황의 사자가 도착했다는 장소. 이곳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라는 이야기에서 조천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탐라국 건국신화(고·량·부 삼성신화)에 등장하는 3공주의 도래지가 바로 이곳 금당지라는 설이다. (金塘 在朝天浦 石函浮來時 初迫之處 탐라지초본 제주목 고적)
5. 조천진성
제주도에는 섬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서 조선시대 초,중기에 설치한 9개의 진(鎭)이 있었다. 즉, 화북(禾北)·조천(朝天)·별방(別防)·수산(水山)·서귀(西歸)·모슬(摹瑟)·차귀(遮歸)·명월(明月)·애월(涯月)진이 그것이다. 이들 진성은 수산진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해안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이는 진성의 설치 목적이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 158쪽)
조천진성은 둘레가 428자, 높이가 9자였으며,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동쪽 한 곳으로만 통할 수 있다. 9개의 진성 중에서 가장 작았다. 성안에는 조천관·주방·마굿간·군기고 등이 있었고, 동성(東城) 위에는 연북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광무4년(1900) 제주에 온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에 의해 진사(鎭舍) 10칸이 폐지되었다고도 한다.
정조5년(1781)에 제주에 순무어사(巡撫御使)로 왔다가 돌아가 복명한 박천형(朴天衡)의 서계(書啓) 내용에는 '鎭 터가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 있어 배가 출항하는 데에 아주 편리하다. 그러므로 진상 물종을 실은 배는 대부분 이 진에서 출항하고 육지에서 들어오는 선박도 대부분 이곳에 도착하여 정박하므로 섬 안의 요로(要路)가 된다. 그러나 성 안에는 우물이 없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도 없어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성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朝天防護所 在濟州東三十里 鎭基斗入海中 放船最爲便捷 故凡係進上物種 裝載之船多放於此鎭 陸地入來之船亦多到泊 此亦島中之要路 而但城內無泉井無倉儲 外寇雖來有難守城是白齊)(濟州巡撫御使書啓)
6. 연북정
조선 초기 조천관으로 지어진 것이다. 조천관은 객사(客舍)로 처음에는 조천진 밖에 있었다고 하나 연대는 미상이다.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조천관은 바다 어귀에 있었는데, 육지에 나가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조천이라 이름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李沃)이 부임한 다음 해 경인(庚寅)년(선조23년, 1590)에 제공(諸公)과 협의하고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을 둔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 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농사짓는 틈틈이에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에 휘하에 명하니 전 부장(前部將) 서만일(徐萬鎰)이 그 일을 주관하고 애써서 마침내 재주 있는 역군들을 동원하여 10월에 착공하고 12월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碧)이라 하였다."라고 쓰여있다. 쌍벽(雙碧)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제주의 문화재 증보판 187쪽) 또 중창기에 의하면 성벽 위에 초루를 세워 이름을 쌍벽이라 하고 무기고·창고·당(堂)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내(鎭內)의 주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선조32년(1599)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건물을 중수하고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연북'이란 북녘에 있는 임금에게 사모하는 충정을 보낸다는 뜻이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는데 지금 건물은 1973년에 수리한 것이다. 보수 당시에 〈龍 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上樑 虎〉라는 명문이 나왔는데 가경25년은 순조20년(1820)이므로 연북정은 1820년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가 경찰관주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대에 완전히 새로 지은 것이다.
탐라순력도에는 연북정으로 오르는 계단이 북쪽 즉 진성 내부 쪽에 나 있어 지금과는 정 반대이다.
*참고 : 성윤문 목사
1599년 제주목사로 와서 제주읍성을 고쳐 쌓고, 수산진성을 본래 위치로 옮기고, 쌍벽정을 연북정으로 이름을 바꿨던 사람이다.
1591년(선조 24) 갑산부사로 부임하였고, 재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영(李瑛)[?~1593]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이 되었다. 함흥을 점령한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하여 황초령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94년(선조 27)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진주목사를 거쳐 정유재란 때는 경상도 해안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성격이 곧고 결백하였다 하나, 가는 곳마다 군민(軍民)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원한을 샀으며, 이 때문에 양사(兩司)로부터 자주 탄핵을 받았다.
1596년 진주목사로 있을 때는 선조의 명으로 의병장 김덕령을 이몽학의 난과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20여일 간 고문을 하였고, 그로 인해 김덕령은 30살의 나이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3월 이경록(李慶祿)[1533~1599]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물이 없고 지형이 돌출되어 방어하기 어려운 성산진(城山鎭)을 수산(水山)으로 옮겼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601년(선조 34) 왜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도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여 제주성을 5척이나 높였으며 격대(擊坮)와 포대 21개소를 만들었다. 도민의 원성이 컸을 뿐만 아니라 이들 공사가 겨울철에 이루어지면서 이 역사(役事)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원축성(怨築城)이라고도 일컬었다.
재임기간 중 길운절(吉雲節)과 소덕유(蘇德裕)의 난이 발생하였으며 판관 이정생과 첩을 두고 다투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04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7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통제사가 되었다가 곧 수원부사 겸 방어사로 체직(遞職)되었고, 그뒤 파직되었다.
7. 조천비석거리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31호
조선시대의 목사 등에 대한 선정비가 8기 서 있고, 70년대에 만든 電化사업기념비 같은 비석도 옛 비석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1)목사채공동건휼민선정비(牧使蔡公東健恤民善政碑)
높이 61㎝, 너비 29㎝, 두께 17㎝
비문은 전면에 〈牧使蔡公東健恤民善政碑〉라는 글씨뿐이다.
채동건 목사(겸방어사, 무신)는 철종6년(1855) 8월에 부임하고 동왕8년 6월에 충청수사로 교체되어 갔다. 그의 재임중에 연상루를 중수하였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7쪽)
조선왕조실록 철종11년2월28일기록에 "제주 암행 어사(濟州暗行御史) 심동신(沈東臣)을 소견(召見)하였으니, 목사(牧使) 정우현(鄭愚鉉), 前목사(牧使) 임백능(任百能), 前前牧使 목인배(睦仁培)·채동건(蔡東健), 前판관(判官) 구재린(具載麟), 前대정현감(大靜縣監) 김기휴(金沂休) 등을 죄주고, 판관(判官) 구원조(具源祚), 前前 대정현감(大靜縣監) 강이진(康履鎭), 정의현감(旌義縣監) 강만식(康萬埴) 등에게는 포상을 베풀고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떤 죄상으로 어떤 벌을 받았는가는 기록에 없다.
(2)사상백공희수청덕선정비(使相白公希洙淸德善政碑)
높이 76㎝, 너비 40㎝, 두께 17㎝
비문은 전면에 〈使相白公希洙淸德善政碑〉라는 글씨뿐이다.
백희수 목사(겸방어사, 무신)는 철종 2년(1851) 7월에 부임하여 동왕 4년(1853) 12월에 교체되어 갔다. 그의 업적으로는 부임하는 해 가을 흉년이 들자 별저미와 내탕전 1천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빈궁한 백성을 진휼하였고, 이 외에도 귤림당 개건과 유생 강기석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정암유허비각(金政庵遺墟碑閣)을 세운 것 등을 들 수 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8쪽) 신촌과 화북 비석거리에서도 그의 선정비를 만날 수 있다.
(3)사상정공영세불망비(使相鄭公永世不忘碑)
높이 61㎝, 너비 31㎝, 두께 14㎝
비문은 전면에 〈使相鄭公□□永世不忘碑〉, 오른쪽에 종서로 〈法立盜 歷 司牧〉, 왼쪽에는 〈 鮮見其□〉라고 되어 있다.
使相鄭公 다음은 공란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岐源〉으로 보고 있다. 정기원은 순조9년(1809) 출생하여 전라좌도水使, 충청도와 평안도의 兵使, 삼도수군統禦使를 지냈고, 제주목사(겸방어사, 무신)로 철종 14년(1863) 정월에 부임하였는데 고종 원년(1864)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중 그는 임술민란을 일으킨 주모자 姜悌儉·金興采 등을 체포 처형하고 난을 진압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평역미(平役米)를 감면하여 금전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내렸다. 행정을 폄에 있어서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위엄이 있었다. 그 후 고종8년(1871) 4월 乙未洋擾 때에는 강화도에 파견되어 鎭撫使로 활약하였으며, 후에 摠戒使·御器大將·訓練大將 등 요직을 지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8쪽, 제주의 문화재 310쪽)
조선왕조실록 철종14년(1863) 2월 29일 기사에 "제주 방어사(濟州防禦使) 정기원(鄭岐源)이 난민(亂民)의 괴수인 강제검(姜悌儉) 등을 효수(梟首)하여 대중들을 경계시켰다고 치계(馳啓)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4)목사김공수익선정비(牧使金公壽翼善政碑)
높이 75㎝, 너비 34㎝, 두께 14㎝이며 위 부분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비문은 전면에 〈牧使金公壽翼善政碑〉라고 되어 있다.
김수익 목사는 인조 27년(1649) 9월에 부임하고 효종 2년(1651) 7월에 정의현감 안집(安緝)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갔는데 백성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9쪽)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정의 현감 안집이 제주 목사 김수익을 무함하니 청주 목사(淸州牧使) 홍전을 제주 목사로 삼고, 이경억(李慶億)을 제주 안핵 어사로 삼았다."(조선왕조실록 효종2년(1651) 4월 27일)
그러나 실제로 후임 제주목사로 부임한 사람은 이원진이다. 그 후 홍전의 부임여부에 대한 기록은 없고, 5월 신임 제주목사로 정언황(丁彦璜)이 임명되었으나, 술버릇이 좋지 않다고 하여 임명된 지 1주일 만에 이원진(李元鎭)으로 교체되었다.
그당시 제주에 안핵어사로 내려온 이경억의 치계내용이다.
"이경억이 김수익·안집의 일과 제주의 폐해를 아뢰다"(조선왕조실록 효종2년(1651)10월 6일) 제주 안핵 어사 이경억(李慶億)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 목사 김수익(金壽翼)이 과연 정의 현감(旌義縣監) 안집(安緝)과 서로 잘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익이 폐첩(嬖妾) 및 데리고 간 편비의 말을 듣고서 진주(眞珠)·대모·앵무치·노실배(蘆實杯) 등의 물품을 백성들에게서 긁어 모으니, 백성들이 논밭을 팔아 그것을 사서 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안집이 망궐례(望闕禮)를 하는 날 병을 칭탁하고 참가하지 않았는데, 수익이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안집이 다 떨어진 모자에 더러운 옷을 입고 칼을 차고는 곧바로 부(府)로 들어가 뜨락 가운데 서서 수익의 삼가지 않은 죄상을 수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오자 수익이 놀라 피하였습니다. 휘하들이 그 칼을 빼앗자 안집이 이내 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초 수익의 계문 중에 ‘안집이 정의현의 곡식을 원장부에서 축냈다.’고 한 것은, 날조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하고, 이어 제주의 고질적인 폐해를 조목별로 나열해 아뢰었다.
상이 수익을 가두고 장법(贓法)으로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해를 넘기도록 국문하여 울산(蔚山)에 유배하였다. 안집 역시 옥에 내려 유배하였다.
(5)사상이공의식휼민정비(使相李公宜植恤民政碑)
높이 77㎝, 너비 37.5㎝, 두께 14㎝
비문은 전면에 〈使相李公宜植恤民政碑〉라고 되어 있다.
이의식 목사(겸방어사, 武臣)는 헌종 12년(1846) 2월에 부임하고 동왕 14년(1848)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 중 그는 三邑 원전세(元田稅)의 혁파, 南·西·右 3학당의 혁파, 별아병(別牙兵) 총수(銃手) 설치, 북수구성(北水口城) 퇴축(退築), 천일정(天一亭) 건립, 간성(間城) 확장과 중인문(重仁門)에로의 개액(改額), 원납전(願納錢)에 의한 군기 수리,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관사 중수 등 업적을 많이 남겼으나, 탐욕이 많고 포악하며 엄하고 혹독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범과 같이 미워했다고 한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9쪽)
애월진 석성 안에도 사상이공이의식거사비(使相李公宜植去思碑)가 세워졌는데, 현재 애월읍 애월리사무소에 있다. 1852년(철종 2년) 4월 이도리에 사상이공의식선정비(使相李公宜植善政碑)가 세워졌는데 이것이 삼양동 소재 제주민속박물관 경내에 있으며, 사상이공의식휼민선정비(使相李公宜植恤民善政碑)가 조천읍 조천리 비석거리에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제주시비석일람)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헌종12년11月28日 제주목에서 익사한 사람에 대해 장계를 올려 익사한 사람에게는 身布와 還布를 蕩減해 주라는 傳敎를 받아내기도 하였다는 등 상당히 선정을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북제주군비석총람에 탐욕이 많고 포악하며 엄하고 혹독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범과 같이 미워했다고 한다라고 쓴 근거가 없다.
헌종14년(1848)7월6일 경기 수군 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겸삼도통어사교동 부사(三道統禦使喬桐府使)가 되었다.(조선왕조실록)
(6)통판김공응우선정비(通判金公膺友善政碑)
건립년대 1894년, 높이 75㎝, 너비 40.5㎝, 두께 14㎝
비문은 전면 중앙에 〈通判金公膺友善政碑〉라고 되어 있고 전면 좌측에 〈甲午十一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철종 31년(1857)에 조천에서 태어난 김응우 판관은 고종 29년(1892) 9월에 부임하고 동왕 30년(1893) 11월에 교체되어 갔다. 정사가 청렴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740쪽)
(7)사상이공원달거사비(使相李公源達去思碑)
높이 73.5㎝, 너비 36.5㎝, 두께 14㎝
비문은 전면 중앙에 〈使相李公源達去思碑〉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 작은 글씨 두 줄로 〈三載爲治 一心 弊 情多通下 事無遺細〉, 왼쪽에 두 줄로 〈丁惟減一 役則除四 蹟登口碑 書以粗記〉라고 되어 있다.
이원달 목사(겸방어사, 文臣)는 헌종 3년(1837) 11월에 부임하고 동왕 5년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중 그는 편역미 4말에 4되를 감해 주었고, 경민편을 인출하여 각 동네에 나누어 주었는가 하면, 곡식이 기재된 장부를 샅샅이 조사하여 민폐를 없애는 등 정사에 밝았으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삼성혈을 파려 하다가 삼선의 會哭을 불러일으켰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740쪽)
이원달의 비는 화북에도 있다.
(8)공마감관오영구폐석(貢馬監官吳永救弊石)
1889년 건립, 높이 83㎝, 너비 31㎝, 두께 12㎝
비문은 전면 중앙에 〈貢馬監官吳永救弊石〉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 작은 글씨 한 줄로 〈都會革罷 玆庸銘勒〉, 왼쪽에 한 줄로 〈船人蒙惠 以傳千祀〉라고 되어 있다. 후면은 〈乙丑六月 日〉이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741쪽)
都會革罷 船人蒙惠 玆庸銘勒 以傳千祀는 ‘도회를 없애어 뱃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이에 돌에 글을 새겨 길고 많은 세월 전해지도록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회는 같은 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강요된 모임을 말하며 공행 즉 공무에 관계된 사람들의 숙식 및 여비의 일부를 갹출부담하였다. 이 폐해를 혁파하여 공무의 경비를 전부 관비로만 충당토록 하였다는 뜻이다.
감관은 조선시대에 각 관청과 궁방(宮房)에서 회계를 맡아보던 사람으로 정6품에 해당한다. 통상 조정을 대신하여 지방 특정업무의 진행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이때는 맡은 일에 따라 호칭도 달라, 각 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할 때 색리(色吏)와 함께 배를 타는 감관을 영선감관(領船監官), 말을 운반하는 것을 관리하던 감관을 공마감관, 곡식을 바치는 일을 관리하던 감관을 봉상감관(捧上監官)이라고 하였다. 특히 봉상감관은 사대부 가운데서 선발하였는데, 이를 기피하면 도피차역률(逃避差役律)에 따라서 처벌하였다. 맡은 일에 따라 감관료를 받기도 하였지만, 자리가 불안하였으므로 갖은 수단으로 농민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때문에 이 자리가 이권으로 매매되기도 하였다.
8. 관음사지
조천 비석거리 앞 화영 슈퍼 뒤쪽 주차장과 그 옆 경작지 일대에서 그곳에서 다량의 기와편과 도자기편이 발견되었다. 1960년대 말경에 경작지를 갈아엎은 적이 있는데 그때 주초석으로 보이는 석제 유물들이 나왔다고 전한다.
『한국의 지명총람(1964년 한글학회)』에는 조천리와 관련하여 ‘관음사터’ ‘금당못’이라고 하는 곳이 있고 ‘금당못’ 근처에 관음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8, 제주목 불우조에는 ‘재조천관포(在朝天館浦)’라 하여 관음사가 조천관 포구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서도 ‘재조천포상(在朝天浦上)’이라 하여 조천포 위에 관음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1954년 담수계(淡水契)의 『증보탐라지』에는 “조천면조천포상(朝天面朝天浦上)에 재(在)하니 금폐(今廢)”라고 하여 폐사 상태임을 기록하고 있다. 관음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기와편, 도자기편들이다. 기와편으로 ‘봉진(奉進)’이라고 명문된 것이 있다. 문양으로 인동문평와편(認冬紋平瓦片)과 복합문평와편(複合紋平瓦片)이 있는데, 이는 원당사지의 수지인동문평와편(樹枝認冬紋平瓦片) 및 복합문평와편(複合紋平瓦片)과 같은 양상을 하고 있다.
관음사지 기와편과 도자기 질그릇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중기까지의 것들로 추정된다.
9. 향사터
조천리 향사는 1845년(헌종 11년)3월에 건축하였다.
1906년부터 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36년 신축청사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일시 공민학교 교실로도 사용하다가 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1961년 재일교포 김민도의 희사금 100만원으로 대수리 후 1976년 재일교포 한문봉, 고태준, 김만택의 희사금(450만워)으로 50평 2층 청사를 신축하였다. 그후 1987년까지 이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이 사무소가 구 면사무소로 이전 후 현재는 과외학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0. 조천관 객사.
조천관은 육지를 왕래하는 명사나 귀빈들이 머무르거나, 제주산 마필 등 조공품 또는 생활필수품을 육지로 보낼 때 공무를 보던 곳이다. 제주의 세 고을에서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조천관에서 바람을 기다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에는 고려 중엽 인천관, 부산관, 조천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부의 표해록을 보면 그가 제주에 도착할 때 1488년 11월 12일 조천관으로 들어왔다.(표해록) 임제가 제주목사인 아버지를 만나러 올 때 도착한 곳이기도 하고 김상헌과 정온이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V. 유배인관련 유적
1. 봉소동 조천서원(강영묘역)
康永, 1352년(공민왕 1) ~ 1413년(태종 13)
본관 신천(信川). 판도판서(判圖判書) 윤휘(允暉)의 아들이다. 상호군(上護軍)으로 있던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1362년 홍건적에 의해 점령된 경성(京城)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 각각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 기해격주홍적이등공신(己亥擊朱紅賊二等功臣)에 녹훈되었다. 강계만호(江界萬戶)로 있던 1373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보낸 종자 10명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죄로 공민왕의 명으로 순위부(巡衛府)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376년(우왕 2)과 1377년에는 조전원수(助戰元帥)와 원수(元帥)가 되어 홍산(鴻山) ·강화도 ·영광 ·장사(長沙) ·해주 ·평주(平州)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조선 건국후 이성계의 부인 강씨(신덕왕후)의 4촌 오빠 강영은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 당시 전라감사로 있었다.
방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방번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 일은 조선 태조 7년(서기 1398)의 일이고 그 외삼촌인 강영은 4년후인 태종 2년(서기 1402) 제주도로 귀양을 오게 된다.
강영은 함덕지경에서 제주고씨를 맞아 정(禎)?복(福)?만(萬) 세 아들을 낳아 신천강씨 제주 입도조가 되는데 지금도 함덕에는 강영이 유배올 때 상륙한 곳이라 하여 강영개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의 묘는 함덕 지경에 있다고 되어 있을 뿐 수백년간 실묘(失墓) 상태로 있었으나 1950년 밭을 갈던 농부가 강영 묘에 넣었던 제주목사 기건(奇虔)이 쓴 지석을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19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강우준에 의해 1970년에 묘역이 최초보수되면서 김충현 글씨의 신도비가 세워졌고 1973년 신천강씨 제주종중에서 서원을 세울것을 발의하여 1973년 11월 도내 각계 인사 62인의 連署捺印을 받아 「조천서원 창건 통문」을 成均館 및 전국 유명 향교에 보내어 그 答通을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1982년 신천강씨 5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1983년 묘정비를 세워 낙성하였다.
강영의 묘 오른쪽 앞에는 안무사 겸 목사 기건과 김달원에 대한 송덕비가 서 있다. 김달원은 꿈 속에서 강영의 묘를 보았다고 하였다하고 기건은 지석을 써주었다.
* 참고 : 기건
기건(?∼1460)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행주, 호는 청파(靑坡), 고려 때 신돈(辛旽)의 일당인 현(顯)의 후손이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뒤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는데,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 3년 동안 한번도 먹지 않았고,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년(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이 유약함을 기화로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하였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였으며, 공론의 보장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세조가 다섯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청맹(靑盲)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기건 목사는 1443년(세종25) 9월에 발령받아 12월에 신처강(辛處康)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제주목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주민이 전복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제주의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불필요한 지방 관제를 없애고 해양 방어 체제를 개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 환자 100여 명을 수용하여 고삼원(苦蔘元)을 복용시키고 바닷물로 목욕시키자 거의 치료되었다.
1445년 12월예 첨지중추(僉知中樞)로 전출되어 떠난 세칭 명환(名宦)이라고 일컬어진 사람이다. 세종30년(1448)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역시 선정을 베풀었고, 세종31년(1449)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며,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개성부유수를 지냈고, 단종1년(1453) 대사헌이 되었으며, 인순부윤과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묘소와 신도비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있으며, 1986년 고양시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숙종23년(1697)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에 있었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
2. 이승훈적거지
이승훈은 오산학교 설립, 민립대학 설립, 물산 장려 운동, 『동아일보』 사장, 신민회 활동 등을 벌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승훈은 항일 구국 운동에 나섰다가 일제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 지역에 유배 온 이후에는 신앙 활동에 열중하면서 제주 성내 교회 안에 영흥소학교를 건립토록 하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조국 독립을 이뤄낼 것을 역설하였다.
남강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조천리 소재 유배지서 기거하면서 역시 유배중이던 박영효 등과 교류하였고 제주읍에 나가 성내교회에 출석하면서 부설 영흥(永興)학교의 교육활동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유배기간 동안 민족운동과 개화주의자의 모습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에 의해 최초로 제주에 유배된 유배인이자,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으로서 길고 긴 제주도 유배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남강 이승훈 적거주택’은 원래 강원도 평창군수 김희주의 노복이 거처하던 집인데, 이곳에서 이승훈이 유배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0년 10월 10일 남강문화재단과 제주도사연구회가 공동으로 기념비를 제작하여 이 집 벽에 부착, 이승훈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이 집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VI. 생활유적
1. 5일장터
조천오일장은 1915년 비석거리 일대에 처음 개설되어, 1923년경 분선동산일대에서 운영되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신사가 있던 자리로 이설 개장, 그후 면민관에 자리를 내주고 현재위치로 이전 개장하였으나 현재는 폐장상태이다.
2. 와가
1978년 11월 14일 제주도민속자료 제4호로 최초 지정된 와가는 총 6가옥으로, 김석윤 가옥(제주시 화북1동 1640), 김희복 가옥(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473-1), 김국배 가옥(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523), 황인관 가옥(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733), 조규창 가옥(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2462), 조규희 가옥(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2303) 등 이었으나 김희복가옥, 김국배가옥, 조규희가옥은 해제를 신청하고 개조를 하여 현재는 3가옥만이 해당된다.
제주도의 와가에 대해 조선 전기의 문신 김정(金淨)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서 “기와집은 매우 드물고 양 현(縣)의 관사도 역시 띠로 덮고 있다”라고,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헌(金尙憲)도 《남사록》에 “인가는 모두 띠로 덮고 기와집은 매우 적다”라고 기록하여 제주도에서 와가는 매우 드문 가옥 형식임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몇 채의 와가는 이 지역에 내려졌던 출륙령이 해지되고 정조 연간 이후 상업장려정책이 시행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었던 19세기 중반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와가는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기와가 특히 크며, 처마끝과 용마루 주변에 회땜질을 하여 특이한 경관을 형성한다. 지붕의 물매는 초가집처럼 뜨며 안허리를 두거나 추녀를 치켜들지 않는다. 초가집에 비교하면 지붕이 무거워 부재(部材)가 굵고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고급스럽게 치장하였지만 평면의 칸살은 별로 다르지 않다.
건물의 구성은, 일(一)자형 집은 안거리·밖거리·목거리 등 여러 채로 이루어졌으며 이문[中門]간과 먼문[大門]간을 둔 경우가 많다. 원래는 보통 짧게 만들지만 길게 하는 집도 있어 공간 짜임새에 신경을 썼으며, 정원을 배치하였다. 가끔 밖거리는 독서를 위한 글방으로 꾸며져 한쪽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
조선 후기의 민가(民家)로 안거리 4칸, 밖거리 3칸, 모커리 4칸의 기와집이다. 삼각형 대지의조천리 황씨종손가옥 중심에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안거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안거리 맞은편에는 사랑채가 있다. 마당 동쪽에는 모커리가 서향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이문간이 갖추어진 집이다.
대지는 도로보다 낮고 세 단을 내려서면 짧은 올레와 이문간을 지나 바로 마당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마당에는 집 앞을 돌아가며 사각형의 네모 공간을 이루도록 잇돌이 놓여 있다. 이문간 남쪽은 눌이 놓여 있던 자리로 정원수가 심어져 있다. 안뒤는 안거리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장독대와 정원수가 있다.
안거리는 가운데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구들과 챗방이 있으며 챗방 옆에 정지를 증축하였다. 벽은 직육면체로 잘 다듬은 현무암을 쌓고 틈을 시멘트로 보강했다. 상방 오른쪽으로 앞뒤에 마루와 구들이 있고 그 옆에 큰 구들이 위치하여 뒤쪽에 고팡을 두었다. 일반적인 제주 초가와는 다르게 굴묵을 큰 구들과 고팡 사이의 내부에 설치하였다. 지붕은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2고주 7량 집이다.
밖거리는 가운데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연속하여 구들이 있다. 상방 오른쪽으로 앞뒤에 마루방과 구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난방 공간인 굴묵은 측벽에 붙여 설치하지 않고 뒷벽에 설치하였다. 지붕은 우진각이며 2고주 7량집이다.
모커리는 왼쪽으로부터 앞뒤로 구들과 정지, 상방 그리고 헛간 순으로 배치된 4칸집이다. 상방 뒤쪽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헛간은 방으로 개조하였다. 지붕은 안거리, 밖거리와 같은 기와 지붕이다. 사람이 살고 있어서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전에는 ‘조천리 황인관 와가’또는‘강창희 가옥’으로 불렸었으나 원소유자 황인관의 직계자손의 요청에 의해 2009년 ‘조천리 황씨종손 가옥’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됐다.
(2) 조천리 김순환 소유 와가(미지정)
축조된 지 120년 정도 된 고가로 안거리 4칸 24평, 밖거리 3칸 10평이며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재목은 밤나무이고 마당이 비교적 넓은데, 잇돌을 시멘트화하여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3. 물통
(1) 수룩물
(2) 억물
(3) 제주자리물
(4) 소물
(5) 큰물
(6) 족은 돈지물
(7) 두말치물 金淑姒治水紀念碑
(8) 장수물 穿井紀念石
천정기념석이 있는 장수물은 지금은 우물은 메워져 있고 그 자리엔 나무가 심어져 있다.
井役伊始出捐竣工 飮於是汲於是 其味淸旦甘美哉 漢山不崩 此井長存 二則三氏之名 永世不滅〉'한라산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이 우물도 오래 남을 것이며, 세 분의 이름도 영원불멸이리라'라고 쓰여있다.
4. 천초작업장 불턱
조천리의 상시 해녀는 40여명으로 50대 18명, 60대 12명, 70대 10명, 80대 1명의 해녀가 작업에 임하고 있다. 농사를 겸하며 2006년도에는 전체 평균 어가 소득이 1,400만원 정도가 되었다.
이곳은 천초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2006년도에는 4억 9천어치를 수확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해녀들은 조천바다를 ‘천초공장’ 이라고 하고, 천초작업에 대해서 ‘기업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천초작업을 하는 한 달간은 공동으로 수확하고, 1개월 후에는 개인이 작업하는데 계통판매를 한다. 그런데 천초와 소라는 먹이사슬 관계에서 상극이다. 왜냐하면 작은 소라들이 천초를 먹이로 해서 천초 밭으로 올라와 천초어장을 훼손시킨다. 한때 천초어장을 보호하기 위해 크기가 작은 소라를 잡아서 판매를 했다가 지원금이 무산된 일도 있었다.
5. 우미솟개
신촌리와 경계선상에 위치한 대섬 수문 밖 바닷가.
대섬은 이제는 제주 본섬과 도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용암유출(鎔巖流出)에 의한 복잡한 해안선 구조와 특이한 지형을 지닌 독립적인 섬이다.
대섬 주변으로 넓게 해안조간대가 발달되어 있고 그 위로 해송림과 갈대림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 대섬 남동쪽의 습지 (일명 관물)는 용출수와 바닷물이 교차되는 공간으로 오리류, 백로류 드으이 물새들이 휴식처로 이용하는 곳이다.
봄과 여름에는 백로들이 집단적으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백로류는 제주도 전역의 해안조간대, 저수지, 마을 연못 등에서 흔하게 관찰되며, 조천읍에서도 대섬을 비롯하여 남생이못, 신흥리와 함덕리 해안가, 중산간 초지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백로류를 만날 수 있다.
대섬은 지질적으로 신흥리현무암으로 되어 있고 섬 주위가 암반해안중 하나인 파식대로 이루어져 있다. 섬 곳곳에서는 암석에 외력이 가해져서 금이 생기는 절리현상(節理現像)으로 틈이 생겨 바닷물이 드나들고 있다.
조천리와 신촌리 경계 지점에 대섬양식장 수문이 있고 수문 바로 북쪽으로 갯담이 설치되었다. 조천리 웃동네 소유의 ‘대섬바당’에 있는 셈이다. 갯담 안쪽을 ‘우미소’라고 하므로 ‘우미솟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미는 우뭇가사리를 말한다. 폭 3m, 높이 1m 안팎이며 지그재그로 68.2m의 돌담을 막았다.(북제주군문화유적분포지도 237쪽)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으며, 주변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면 ‘적담’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멸치, 한치, 낙지, 우럭, 벵에돔 등이 잡혔다고 한다.
VII. 종교 및 민속신앙
1 조천교회
계낭개 예배당이라고도 불리우던 교회로 2008년에 교회 설립 백주년을 맞이하였다.
조천교회의 역사는 이기풍 선교사의 행적에 따른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던 1970년 9월 대부흥운동의 진원지 평양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가 조직되고 독노회에서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에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1908년 1월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의 집례로 장대현 교회에서 이기풍 선교사 파송예배가 드려졌다.
1908년 2월 말경 제주에 도착한 이기풍은 온갖 박해를 극복하고 금성교회, 성내교회, 조천교회, 모슬포교회를 설립했다.
조천 만세운동당시 3월 23일과 24일 3, 4차 시위는 이곳 조천교회 청년 김연배에 의해 주동되었으며 특히 24일의 제4차 시위는 함덕을 비롯한 조천면 일대의 만세시위 소식이 교회조직을 통해 전파되고 제주읍내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청년들이 모여들어 1,500여명이 합세했다. 이것은 조천교회 청년 김연배가 주동하였음으로 제주 각 지역교회에서 동원이 가능했다고 한다
김연배는 24세 나이인 1919년 3월 24일 시위도중에 검거됐다.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1부에서 8개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1919년 말경에 만기 출감한 김연배는 바로 12월 2일 전창희와 더불어 조천교회에서 임정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후 교회와 야학활동에 몰두 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소천하였다.
2. 고관사
고관사(古觀寺)는 ‘옛 관음사(觀音寺)’라는 사명이 보여주듯이 고려 전기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존속하였던 옛 조천관음사(觀音寺)의 명맥을 이은 사찰로 1927년 화주 고계부와 강정완이 기와로 된 개인 주택을 매입하여 선암사 제주포교소로 창건하였다.
1930년 고자선이 전라남도 선암사에서 목조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와 봉안하면서 사찰의 기반을 다졌으며, 이후 고관사는 신도가 증가함에 따라 1938년 마을 재가자들과 함께 지장계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불교 활동을 펼쳤다.
1948년 제주 4·3으로 강제 매각되어 사찰의 기능을 상실하였다가 1968년경 고관사를 되찾았으며 1980년대 이르러 본격적으로 중창 불사를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탱화는 훼손이 심하여 소각되었으며 옛 건물도 모두 헐어 내었다. 또한 창건 당시 모셨던 아미타불 대신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중창 불사 도중 아미타불 복장에서 부처님 진신 사리와 오색 명주실, 옷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999년 옛 요사를 헐어 2층 구조의 대웅보전을 신축할 때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아미타불은 석가모니불의 우보처로 봉안하였다.
고관사에는 대웅보전과 옛 대웅전 건물이었던 지장전, 그리고 요사가 있다.
대웅보전에는 목조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앉은 높이 65.5㎝, 어깨 폭 26㎝의 기품 있고 선미(禪味) 그윽한 아름다운 조선시대 불상이다. 또한 1940년 조성된 143.7㎝×77.8㎝ 크기의 독성탱화가 현존한다. 옛 대웅전은 지장전으로 바꾸어 석조 지장보살상을 봉안해 놓고 있다.
3. 불사리탑사
고관사 주지였던 도림(道林)스님이 『법화경』의 사경(寫經) 공덕으로 조국통일과 세계평화를 발원하면서 1988년 10월 10일 기공하여 1999년 8월에 완공하였다.
남방불교형식의 불사리탑은 총 높이 33m, 3층 구조물로 조성됐다. 1층 내부계단은 3층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 마음과 통해 있다는 뜻이다.
꼭대기 황금 사리탑은 법화경의 석가탑을 의미한다. 탑 전체는 다보탑을 의미하며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불사리탑은 형상 모두가 佛·法·僧 三寶의 뜻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은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인 평화 통일을 기원하며 북쪽의 백두산 천지를 향하도록 설계해 놓았다
허응당 보우대사와 지안대사의 상과 순교비가 있다.
*참고 : 허응당 보우대사
법명은 보우(普雨)이고 법호는 나암(懶庵)이며 당호는 허응당(虛應堂)이다. 유가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 불교부흥을 위해 매진했던 보우의 삶과 행적은 승려 한 개인이 전체 유림을 대상으로 싸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 보우는 이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지만, 선교양종과 승과를 복구하고, 도승제(度僧制)를 부활하는 등의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보우는 1965년 6월 제주로 귀양을 와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연북정 근처에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유생들이 집요하게 보우를 죽이려한 이유중 하나는 보우가 봉은사주지를 하던 시절 일 때 사찰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처벌하도록 당시 섭정을 하던 문정대비에게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유생들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문정대비는 황언징을 처벌하였다.
문정대비가 섭정을 하던 시절 보우대사는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도록 하는 등 불교를 위해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당연히 유생들과는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문정대비 사후 명종에게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고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이이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고 보우는 제주에서 잔인하게 맞아죽고 말았다.
4. 양진사
1971년 해인사에서 무릎이 터지고 쓰러지면서 100만배 기도를 이뤄내신 지금의 약천사 회주 혜인스님이 70년대에 이곳 양진사 선원장으로 계시면서 제방납자들을 가르치셨고 그 선풍이 지금도 여여한 곳이다.
5. 정중당터
관음사지 인근에는 ‘정중당물’이라는 용천수가 있었으나 매립된 상태이다.
이물옆은 동부지역 당신의 대표격이었던 정중부인을 모시던 정중당이 있었던 곳이다.
동부지역의 다수 당 본풀이에 의하면 明天子의 딸三兄弟가 나서 너무 글 잘해여 역적으로 몰려 父母내가 배에 먹을 것을 실어서 귀양보내 처음 내리는 朝天에서 부터 近當하여 坐定하니 큰성님은 정중부인(鄭重夫人), 둘째 성님은 짐녕(金寧) 황세夫人. 말젯똘은 新山이 고정남밭 명오夫人으로 좌정하여 타 신들이 이 부근에는 좌정하지 못하고 인근으로 자리잡았다라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온평, 신산).
이 스토리에서의 정중부인이 좌정한 곳이었으나 새콧할망당으로 당궐이 이전하면서 폐당되었다가 만세동산 남쪽 작은 동산에 윗새당으로 재설당되었으나 신앙인들은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오직 새당할망 자손 잘 그눌러줍서라고 기원 할 뿐이다.
6. 새콧할망당
코생이모루에 있는‘고냥[穴]할망’을 모시는 당이다.
옛날 이 마을에 사는 장씨 선조가 상선에 화장(火匠)으로 일하면서 난드르(안덕면 대평리)에 들렀다가 어떤 아주머니한테서 옷감 두 필과 우황을 샀다.
장씨가 뱃일로 한양에 가서 노량진나루부근에 유숙할때 서울 관가 높은 벼슬아치의 외아들이 병이 나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별 약을 다 써도 낫지 않는데 바다 건너온 우황을 먹으면 낫는다더라는 소문을 들었다. 마침 우황을 가지고 갔던 장씨가 우황을 가지고 가 관원의 외아들에게 먹이니 이튿날에 쾌차하였다. 관원은 장씨의 배에 많은 쌀과 곡식을 실어주었다. 육지 바다를 지나 제주 바다 물마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배 밑창에 구멍이 생겨 침몰 위기에 이르고 말았다. 장동지는 어떨 바를 몰라 하다가 하늘을 향해 꿇어 앉아 손을 비비면서 축수하기 시작했다. 그때 커다란 뱀이 배 밑창에 터진 구멍으로 슬금슬금 들어와서는 맷방석 모양으로 둥그렇게 사려앉는 게 아닌가. 드디어 가라앉기 시작하던 배는 둥둥 뜨기 시작해서 무사히 조천 포구에 입항했다. 장동지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뱀에게 고했다. “우리를 위한 신(조상신)이거든, 이 발판으로 조심히 내려오십소서.” 뱀은 포구 옆 ‘코생이모루’에 있는 한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후, 이 마을 장씨 집안에서는 선조의 목숨을 구해 준 뱀을 ‘고낭[穴]할망’이라고 해서 집안을 수호해 주는 조상신으로 모시기 시작했고, 또한 조천 포구를 경유하는 모든 배의 선주들로부터 봉제받으며 조천 포구를 차지한 신이 되었다.
7. 새당 1(윗새당)
정중당(조천본향당)이 이설된 곳, 당신명 잃어버림(새당할망).
8. 새당 2(알새당)
초낭골당, 뒷당한집이 이설되어 있는 곳, 당신명 잃어버림(새당할망).
윗새당 반대쪽 기슭에 있다.
9. 새당 3.
장귀동산일뤠한집이 이설되어 있는 곳
항일 기념관 동쪽 소로변 숲속에 있음. 시멘트제장이 있으나 파손되어 있음.
당신명 잃어버림(새당할망)
.....................
별지 1. 신촌리 조규창와가
문화재 지정 사항 ; 제주도 민속자료 제4-6호(1978년 11월 14일 지정)
건립년대 ; 1822(道光2년)
안채가 3칸의 고전적 간잡이인 와가이며, 정지가 별동인 것이 주목되고 밖거리는 대문간이 포함된 5칸초가로 긴 올레를 갖춘 제주민가의 전형을 갖추고 있으며 19세기 전반기에 건축되었다. 정방형에 가까운 대지의 중심에 마당을 두고 안거리는 동향, 맞은편에 7.8m 떨어져 이문간을 겸한 밖거리가 서향하고 있다. 안거리 북쪽에는 마당 사이로 틈새를 두어 정지거리가 남향으로, 안거리 남쪽에는 헛간이 동향으로 자리잡았다. 긴 올레에는 동선을 유도하는 잇돌이 놓여 있으며 마당 남쪽에는 눌굽이 남아 있다. 밖거리 북쪽에 있던 통시는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되었다. 안거리에 정지를 두지 않고 모커리에 독립된 정지거리를 둔 관계로 장독대는 모커리 뒤쪽 여유 공간에 두었다. 서쪽 울담을 따라 대나무 숲이 있어서 서북풍을 차단할 수 있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Ⅱ 288쪽)
큰길에서 꺾인 올레는 무척 길게 휘어져 있다. 상량문(上樑文)에서 확인된 이 집의 연대는 현존하는 제주 민가 중 높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우진각지붕 와가의 안거리 칸잡이는 삼 칸을 지키고 있으며 대신 정지거리가 안거리와 출입구 방향을 맞추어서 ㅁ자로 배치되어 있다. 정지거리 역시 삼칸와가이고 정지칸 한 칸, 방과 마루가 각 한 칸이고 나머지 한 칸은 고방이다. 밖거리는 20세기 초에 새로 지은 초가 5칸집인데 정지가 없는 삼칸집의 칸잡이로 3칸을 짜고 나머지 두 칸은 한 칸은 대문간으로, 한 칸은 마굿간과 방 한 칸을 들여 머슴방으로 썼을 듯하다. 집 세 채가 ㅁ자로 둘러 배치되고 남은 트인 곳은 낟가리를 올릴 자리이므로 낟가리를 쌓고 나면 마당은 ㅁ자로 둘러싸인 장소가 되고 나머지 외부공간은 낮은 돌담으로 구분시켜 안뒤와 터밭과 장독대와 통시칸 등의 기능이 주어진다. 정지가 별동으로 독립된 제주민가의 상류가일지라도 대개는 초가이거나 규모가 작은 것이 상례인데 반해 이 집 정지거리는 3칸×2칸 와가로 격을 갖추었으며 외부공간이 정연하고 밖거리가 안거리와 맞향을 하고있는 대가족형 민가이다. 밖거리 초가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3관련)
1948년 2월의 신촌회의가 있던 곳으로 추정.
당시 무장투쟁에 대해서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내에서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히 맞섰다. 이 신촌회의에서 정세판단과 대응책에 관한 열띤 토론이 벌어 졌고 결국 명분론과 위기설을 앞세운 김달삼 등의 강경파가 조직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달삼이 스스로 군사총책을 맡겠다고 하여 사건 발발 10일전에 날짜를 결정 통보하여 4월 3일 무장봉기가 결정되었다.
이 무장봉기의 성격규명이 4.3에 대한 입장차를 대변한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정의) 에 의하면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하나 지금도 계속 폭동, 반란, 민중항쟁, 인민무장투쟁 등으로 엇갈린다.
제주도에서 1948년 2월 중순에서 3월 5일 사이에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켜 고위관리들을 암살하고, 총선거와 군정을 반대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남로당의 지령문이 최근 획득된 주한 미육군 방첩대의 정보보고서에서 확인되었다. 이 지령의 시행을 위한 폭동준비 비밀회의가 경찰에 발각(48.1.22)되어 220여명의 당원이 체포되며 계획된 폭동이 불발로 끝나자(출처 : 미24군단 G-2일일보고서(48.2.6/7)) 남로당 제주도당의 면당 책임자급 이상 간부 19명의 대책회의(신촌회의, 2월 20일경)가 열렸는데, 보름동안 대책회의를 개최하고 김달삼 주동으로 경찰에 맞서는 무장폭동을 결정" 하였다. (출처 : 제주4.3연구소, ‘이제사 말햄수다’ (제1권))
이에 따라 “(’47. 3월 중순) 남로당 중앙 및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지도원이 무장봉기 계획을 작성-조직의 수호, 5.10단선 및 단정 반대투쟁의 일환으로 무장 반격, 저항하는 장교 및 하사관은 현장 사살, 경비대 9연대를 동원, 제주경찰감찰청과 제1구경찰서를 습격, 인민유격대(400명)로 14개 지서와 경찰 및 우익인사 습격, 특무원(20명)은 제주읍에 잠입하여 연락병으로 운용 등"을 계획하였다 (9연대의 동원은 내부의 이견으로 실패했음). (출처: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
제주도 무장대가 작성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남도당 올구(조직책)를 중심으로, 조직의 수호와 방어를 위해 단선단정 반대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전 도민을 총 궐기시키는 무장반격전을 추진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유격대가 각 지서를 습격하고 경비대 9연대가 경찰의 감찰청과 제1구서를 담당하는데 9연대의 동원을 위해서는 반동으로 분류된 장교 및 하사관 18명을 숙청한 후 병력의 수송을 위한 5대의 차량지원계획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48년 4월 3일, 경비대 9연대는 동원되지 않아 경찰의 감찰청과 제1구서는 제외되고 총 24개지서 중 12개지서가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에 의해 4월 3일 새벽 2시에 습격을 당했다. 경찰력의 심각한 약화는 남로당에게 주민통제와 선거관리위원 습격을 용이하게 함으로서 3개 선거구중 2개구에서 투표율 저조로 인한 선거무효가 선언되었다. 제주도는 5.10선거에서 좌익의 선거방해가 성공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일부인사는 이상의 사안을 강조하여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사과와 보상을 할 수 있으나 무력충돌의 원인만큼은 지금의 결론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별지 2. 신흥리 조천읍 충혼묘지
제주도내 각 마을의 충혼묘지는 1953년 4월말 대정충혼묘지를 시작으로 그 다음달에 안덕면 충혼묘지, 그 뒤를 이어 54년까지 제주도내 전 읍면지역에 건립되었다.
1962년부터 충혼 또는 충혼비라고 쓴 비석을 세우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양중해선생의 진혼가가 새겨진 충혼탑을 세웠다.
각 마을 충혼묘지는 주로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병사를 모셨고 그 후 주변에 흩어져 있던 4.3당시 사망자, 특히 경찰과 민보단 인사들의 비석을 옮겨 세웠다.
이곳 조천읍 충혼묘지에는 왼쪽이 한국전쟁발발이후 사망한 군경의 묘역이고 오른쪽에는 4.3기간 중 사망한 경찰과 민보단원의 비석이 모여있다.
이곳 충혼묘지 충혼비석옆에 1949년 1월16일 무장대의 공격으로 사망한 2연대병사 23명을 추도하며 1949년 7월에 세운 비석이 옮겨져 있다.
교전지역인 북촌리 꿩동산 현지에 세워져 있다 뽑혀 방기된것을 찾아서 옮겨온 것이다.
(북촌사건에 대한 4.3연구소 기술)
1949년 1월 17일, 18일 세칭 ‘북촌사건’이 북촌리에서 발생한다. 세화에 주둔하던 제2연대의 일부 병력이 대대가 주둔하던 함덕으로 이동하던 중 무장대의 습격을 받게 된다. 이 습격으로 2명의 군인이 숨졌고, 이를 발견한 마을 원로들이 시신을 들것에 담아 함덕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하지만 흥분한 군인들은 북촌 마을을 공격하였고, 소위 ‘빨갱이 색출 작전’으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끝.
Kevin K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