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전산에서 내려와
낙안읍성옆에 있는 충민사와 낙안향교를 둘러 보았습니다.
충민사는 조선 태조 때의 무신으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우고,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낙안읍성(樂安邑城, 사적 제302호)을 축성했다고 알려진 김빈길(金贇吉)과
인조 4년 낙안군수를 지냈던 조선 중기의 명장 임경업(林慶業)을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이 곳 충민사는 1697년(숙종 23) 건립되었다 하는데
그렇다면 충주 충렬사와 같이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만 ...
여기에는 조금 오류가 있는 듯 합니다.
임경업장군은 좌의정 심기온의 모반에 연루되었다하여 1646년 장살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관직회복이 되었으나
그때까지는 아직 충민공이라는 시호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충주에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사우가 세워집니다.
숙종 32년(1706)에 나라에서 장군에게 충민(忠愍)의 시호를 내립니다만
영조 3년(1727)에 충렬사라는 창건당시이름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정조 15년(1791)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전하게 하니
충렬사 제당에 위치한 '달천충렬사비'가 그것입니다.
아마도 이곳 낙안의 충민사는
충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진후 세워진 곳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4년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낙안향교옆에 자리잡고 있는 사우(祠宇)는
정면 3칸·측면 3칸의 일자형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만
문이잠겨 있어서 경앙문이라 편액되어진 문만 바라보다가
즐비하게 늘어선 공덕을 기념하는 비석을 둘러 봅니다.
낙안향교입니다.
낙안향교는 효종 9년(1658)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동재·서재·내삼문 등이 있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명륜당이 있고,
오른쪽 내삼문 안쪽에 대성전과 동무·서무 등을 두고 있으나
문이 잠겨 있어 담넘어로 기웃거릴 뿐입니다.
다른 지역 향교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석존과 명현에 대한 제사만 지냅니다.
명륜당옆 1000년된 은행나무를 보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만덕산 백련사로 간다고 합니다.
보성강과 탐진강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강진까지의 차창밖 풍광을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