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강정동

하늘타리. 2012. 1. 10. 15:33

강정동은

아주 옛날에는

더내 또는 더냇동내라고 부르고

加內村 또는 加來村이라 하였답니다.

 

고지도와 고문서등을 살펴보면 

17세기 후반부터

강정이라는 이름이 쓰였읍니다.

큰내 江 + 물가 汀

큰내 물가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때는

넘치는 물을 이용하여 쌀을 생산하므로써

도내 다른마을에서 산출하는 작물 대비

 상당히 많은 소득을 올릴수 있었던 마을입니다.

 

도내 일강정이라고 까지 불리어 졌습니다만...

 

지금은 해군기지문제로 공동체가 파괴되어

심정적으로 한마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입니다.

함께 걸은 사람도 의견이 여러가지라

오늘은

옛 사람의 자취만을 살피겠습니다.

 

 강정초등학교내

솔대

 

원래는 이지점에서 300미터정도 바닷가쪽의 도로변에 있던 것을

1979년에 옮겼다 합니다.

 

범섬의 기운이 너무 강해 소가 자라지 못하니 솔대를 세워야 한다하여

한라산에 가서 산유자나무를 베어다

주변 50미터반경으로 삼각지점에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부러지고 또 하나는 누군가가 뽑아버려서 남은 한개를

이곳으로 옮겼다 합니다만..

 

 

 

 

가운데 비석은 서봉호소령기념비입니다.

 

1946년 학교를 설립하고 1948년 시설을 확장하려는데

4.3이 났지요

그래서 학교공사를 멈추고 있었는데

이곳에 주둔한 2연대 예하 파견대장인 서봉호당시소위가 

지역 주민들이 녹하지오름 일대에서 목재를 베어 올 수 있게

군인들을 시켜 경비하게 한 후

함께 작업을 하여 공사를 마무리지을수 있도록 하였답니다.

그 공을 상기시켜 1964년에 학구민일동의 이름으로 비석을 건립하였습니다.

비석을 세울때는 소령이었거나 한국전시 소령계급으로 사망했거나 그랬을 겁니다.

 

마희천연대 옛자리 라고 합니다만...

 

마희천연대가 여기 있었다는게 조금 애매해서요.

무슨 착오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머흐내개는 월평동과 하원동 일대 바닷가를 칭하는 건데

그 자리에 있어야지 왜 여기 있을까요?

월평동에 가보시면 연디모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마희천 연대가 있던곳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마희천 연대 옛터라고 하는 곳에서 바라본 해군기지 공사장 가림막

 

왼쪽 돗부리암코지에 이어 있는 튼돈지

(강정포구 왼쪽 방파제)

 

 

개당 들어가는 길목

 

세벨코지부근에 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세벨당으로 부르기도 합니다만

 

바다의 풍어를 빌어주는 개당임에도 불구하고

 

아래 물색을 보고 물색이 아니고 어깨끈이라 하여 이 당의 당신이 수렵신이라 하신 분이 있었는데

이 당은 서당에서 가지갈라온  당으로

개당할망을 모시는 곳입니다.

 

개당에서 나와서 보는 강정포구

 

예전에는 세벨포라고 했답니다.

삼불포라고도 했다그러지요.

그러다 보니 법화사 삼존불이 이포구를 떠나서 육지로 갔다

그래서 삼불포다라는 말도 만들어 집니다.

 

이런 저런 원에 대한 설명

 

왕부리덕에 앉아 있는 물새들

 

않보인다구요?

당겨보죠... 

 

 

단물깍

 할망물 꿩망물 등 단물이 넘치고 흘러서 이곳에서 바다로 흘러듭니다.

 

 

 

정의논깍물 

 

할망물

 

마을 전역을 통털어 물이 가장 맑고 시원하여

가정에서 정성을 드릴 일이 있을 때에는 꼭 이 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할망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꿩망앞물

 

빈녀코지 가는 길

 

 

 

빈녀코지

 코지는 물속에서도 길게 뻗어 있답니다.

그 모양이 마치 비녀를 닮았다고 하여 '빈녀코지'라고 한다고 합니다.

 

빈녀코지에서 본 수리덕

 

빈녀코지 소금밭 흔적 

 

서당입니다.

일레당으로

산육치병을 하시는  

강정본향단신 산신백관또의 부인이 좌정한 곳입니다.

 

 

 

통물 

공사중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면 큰일이 나는지

꼭 이렇게 부수고 다시 만듭니다.

 

 큰강정물

 

한때는 마을안에서 가장 용출량이 많았었다는데

 

지금은 바짝 말라 있습니다.

 

강정동 본향 산신백관당

 

서귀본향당 단신인 바람운과 지산국의 아들이 한라산에서 수렵생활하다가

이곳에 내려와 좌정했다 합니다

 

냇끼소로 갑니다. 

 

 

 

 

 

내끼소에서 올라와

냇끼 당으로 갑니다.

 

냇끼 일레당

 동이 본향당이라고도 합니다.

동이 본향당이라면 우연찮은 계기로 조상으로 모시기 시작한 신을 모신 곳입니다.

유지부 굿당에서 슬픈 연유로 죽은 신을 몸주로 받든것과 거의 비슷한 경우이지요

 

 

그 옆 냇끼 요드렛당

 

토산계 당으로 개구럼비에서 옮겨져 왔습니다.

아마도 당궐들은 대개 동쪽에서 시집온 여인들일겁니다.

 

냇끼 도수관로

 

냇끼소 제방

 

냇끼소 제방

 1890년대 송귀룡(宋貴龍)이라는 분에 의해 물을 당겨 논을 개발할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하는데

 공법이 그 때는 아닌것 같습니다.

 

 

 

 

 

 

 

 

 

 

 

 

하류로 내려가면서 뒤돌아 봅니다..

 

 

 

 

이 물을 따라 계속 흘러가면 

 

엄청 커다란 도순천 취수보가 나오지요.

바로 그곳이 옛 서귀포지역에 80%의 상수도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변수연대가 있었다고 하는 곳입니다.

 갓(아래아)물에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앞도로

버스정류장이름이 서연대앞입니다.

그러니까 연대가 있었을 때는 이곳이 법환지경이었다는 이야기일겁니다.

실제로 제주삼읍전도에 법환연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연대자리라는 곳에서 본

서건도

 

서건도를 가는 길에 속등개코지 앞에 서 있습니다.

행정구역은 이곳에서 3~400미터 더 동쪽에 있는 두머니물인근에서 강정과 법환이 갈리지만

바다구역은 이곳에서 갈립니다.

 

 

서건도

 

1700년무렵 만들어진 옛지도에는 腐島, 鋤近島라고 했습니다.

서근도는 음가자표기, 부도는 훈가자표기이겠지요...만

鋤자를 잠깐 생각해보면

호미를 뜻하기도 하고 밭을 갈다는 뜻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저 섬 흙지질이 본섬보다 밭을 일구기 더 나았을 것도 같은데...

밭을 일굴수 있는 가까운 섬?

그건 내생각이고...

 

 

 뭐가 썩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썩은 섬이랍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국립지리원지도에 犀建島라 표기되고...

지금은 공식명칭이 서건도입니다.

 

서건도를 한바퀴돌면서 오늘 답사를 마칩니다.

 

 

 

 

 

 

 

 

 

 

 

 

 

 

 

 

 

 

 

 

 

 

 

 

 

 

 

 

 

 

 

 

 

 

 

 Edvard Hagerup Grieg.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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