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오라동

하늘타리. 2012. 2. 29. 21:32

 


2012년 2월 12일(일)

답사안내를 위해 작성한 자료 

 

제주 마을 집중탐구

오라동

 

 

   

안내자

송장환

 

오라동

 

오라동(吾羅洞)은 4읍. 3면. 19동으로 이루어진 제주시의 행정구역의 하나로 3개의 법정동(오라1동, 오라2동, 오라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시의 중남부에 있으며, 한라산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한천과 흘천/흙천이 북류하여 용연 근처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남쪽에는 큰두레왓[1628m], 능화오름[1811m], 열안지오름[578m]이 있고, 북쪽에는 민오름[252m]이 솟아 있다.

현재 면적은 28.74㎢이며, 대략 2,600세대에 6,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도남동과 오등동, 서쪽은 연동, 남쪽은 한라산국립공원, 북쪽은 용담1동, 삼도1동과 각각 접하고 있다.

지금의 오라동 지역에는 17세기 지도에 俉羅好村(오라호촌)과 道內山理(도내산리), 月羅村(월라촌)이 보이며 18세기 후반에 井宲巖里, 井室岩里(정실암리)가 나타나다가 井室岩里(정실암리)를 井實洞(정실동)이라 하여 吾羅里(오라리)에 병합시켰다.

일제강점초기에는 ‘吾羅里(오라리), 井實洞(정실동), 淵味洞 (연미동), 月龜洞(월구동)’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라리라 하여 제주면(濟州面)에 편입되면서 1구(모로마을, 남쇄마을, 사평, 정실)와 2구(연미, 월구, 난다리)로 나뉘었고

1955년 8월 제주읍에서 시로 승격시 한내동카름[모롯골(모로내가름), 배머리왓/내머리왓(남쇄마을), 동산물 일대]을 오라1동,

한내서카름[사평, 연미, 정실 일대]을 오라2동,

중댕이굴/월구동(月龜洞)[도랑굴, 구아랑 일대]을 오라3동으로 구분하였다.

남쪽 ‘능화오롬’ 가까이에는 ‘능화동’ (菱花洞)이라고 하는 화전마을〔火田洞이 있었는데 1905년의 일본인 산행기에는 나오나 행정구역 통폐합 시와 1917년경의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10년경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동제(洞制)실시에 따라 연동(蓮洞)을 합하여 오라동회가 되었다가 1979년 연동이 분할, 독립하였으며 일부 구역이 연동, 용담동, 이도동, 삼도동에 분할 된 후 현재의 구역을 가지고 있다.

 

 

1. 오라1동

모로마을(냇가름) : ‘〔旨〕+내〔川:한내〕+가름〔洞〕’의 구성으로, ‘한내’가까이에 있는 등성이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종합운동장이 위치하고 있다.

내머리왓/배머리왓/남쇄마을 : 모로마을 북쪽, 내의 머리라 해서 내머리왓이라 하기도 하고 행주형세인 오라동의 배머리 부분이라 하여 배머리왓이라고도 했다. 배의 노처럼 생겼다하여 남쇄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적십자사 남쪽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용담동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시외터미널만 있다

 

(행주형 마을에는 배가 온전히 항해할 수 있도록 키, 돛대, 닻이 있어야 길했기에 이에 해당하는 조형물을 세우기도 한다.

삼면이 강이나 개천으로 둘려싸여있는 행주형 마을은 배에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하듯 마을에 우물을 파면 마을이 어려워진다는 풍수설이 있다.

그리하여 행주형 마을에는 절대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한다.

이러한 땅에 우물을 파면 주변의 강물이 지하로 유입돼 지반의 침하와 붕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동산마을 : 바다 쪽에서 보면 동산처럼 보이고 물이 오랫동안 고여서 동산물동이라고도 하였다

서문파출소 남쪽까지 이르렀으나 서광로 북쪽이 모두 용담동으로 편입되어 옛 흔적으로는 동산교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오라 1동은 현재는 종합운동장과 종합운동장에 포함되지 않은 모로마을 일부(종합운동장과 연삼로 사이), 터미널일대만 남은 남쇄마을 일부(종합운동장과 서광로 사이)를 지칭한다.

(서광로 북쪽에서 적십자회관까지 -> 용담동에 편입, 뱅뒤(한국병원 앞 일대) -> 삼도동에 편입, 불미왓(현 보건소자리) -> 도남동에 편입, 고지내마을 -> 폐촌)

마을회관 1987년 벽돌 스라브 32평

1993년 마을회관겸 경로당 50평 증개축(제주시보조 8500만, 주민부담 850만)

1998년 고허봉진씨의 처 정복순 오라1동 1003번지일대 140평 희사

제주시보조 1억9천, 주민부담 2천으로 1층 회관, 2층 새마을문고 준공

 

 

 

2. 공설마을

남쇄마을 동남쪽 지경에 1978년경부터 형성된 오라1동 지역내 자연마을.

1978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될 때 전후로 공설운동장 옆에 25세대가 입주하기 시작하여 형성된 마을 (公設 -> 共設)

1982년에 통으로 승격.

현재 370여세대 1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회관 1997년 부지매입 (시비 1억 6천),

1999년 1월 준공 (시비 1억3천),

2000년 12월 증개축(도비 5천, 시비, 7천)

 

 

* 오일장터

1982. 7 용담동에서 이설해옴

1984. 3 노형동 한라의료원옆으로 이설해감

 

 

 

3. 농은거사 기념비

1925년에 종합경기장의 예전위치인 광양벌 토지를 제공한 전영준거사 (1872-1946)를 기리기 위하여 제주 청소년일동의 이름으로 세워진 기념비와 1999년 옛비를 옮겨오면서 다시 세운 송덕비

(1955년 세운 제주도지사, 육군 제1훈련소장 명의의 제주공설운동장 창설기념비도 함께 옮겨와 있음)

 

 

* 종함운동장 연혁 및 시설

1925. 전영준거사 광양벌 2500평의 토지를 도에 희사

청소년 체육시설(축구장)용도

1952. 희사부지 분할 도청건설, 공설운동장 착공

1955. 10. 22. 제주공설운동장 개장

1967. 도로개설 등의 이유로 도청(현 시청) 앞 공설운동장 폐쇄,

오라동 현 위치에 주경기장 시설 착공

1968. 7. 30. 주경기장 시설 준공

1983. 7. 18. 종합경기장 시설공사 착공

1984. 5. 준공

 

 

ㆍ 주경기장은 천연잔디 축구경기장과 8레인 400m의 육상트랙을 가진 제1종 육상경기장으로 25,000명 수용가능하다.

(시설년도 : 최초 : 1967-1968.7.30, 증축 : 1979. 1. 30, 개보수 : 1983.7-1984.5)

ㆍ 야구장은 인조잔디구장으로 12,000명 수용가능하며, 야간 경기를 할 수 있다.

(시설년도 : 1983.7 ~ 1984. 5. 20)

ㆍ 실내수영장은 대한수영연맹 공인 제1종 수영장으로 8레인 50m로 2,000여명을 수용 할 수 있다.

(시설년도 : 1983.7~1984.5)

ㆍ 한라체육관은 배구, 배드민턴, 핸드볼, 농구와 각종행사 등 다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수용인원은 6,000명이다.

(시설년도 : 1980.1~1983.7)

ㆍ 연정정구장은 케미칼코트 8면을 갖춘 경기장으로서 3,300명 수용가능하다.

(시설년도 : 1983.7~1984.7)

ㆍ 애향운동장은 6레인 400m의 육상트랙과 인조잔디 축구경기장으로 5,000명 수용가능하고 육상경기와 축구경기가 이루어진다.

(시설년도 : 1983.7~1984.5)

ㆍ 이 외 기타 체육시설로 시민체력단련장, 시민복싱장, 씨름장, 오름마당(인공암벽) 시설과 체육공원이 있다.

 

 

 

4. 개발제한구역 해제비

*개발제한구역과 오라동

그린벨트설정은 도시의 무질서한 개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1971년 서울인근에 적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부터 조천읍일부를 포함한 제주시에서도 적용이 시작되었다.

해당지역별로 보면 일도동, 건입동, 외도동은 완전제외, 기타 동은 부분포함, 오라동, 도두동은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에 포함되었다.

사실상 개인재산권 행사를 제약하여 자식을 분가시키려 해도 방 한칸을 더 지을 수 없고 연탄창고를 지어도 불법이라고 관에서 나와 부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28년이 지난 2001년 3월에 중앙도시계회위원회에서 제주시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결정하여 2001년 7월 그린벨트가 해제되었다.

 

 

 

5. 4.3城

4.3사건은 4.3 이전과 4.3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3.1절 발포사건과 총파업을 계기로 인민위와 미군정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던 시기(1947.3.1.~1948.4.2.)를 4.3이전 시기로 보고, 4.3 이후를 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기준으로 크게 4시기 정도로 재구성해 보면...

제 1기는 무장대가 봉기한 이후 사건의 진압을 하지 못하고, 결국 제주도에서 5.10 단독 선거를 보이코트하는 사태가 벌어진 시기이다.

제 2기는 사건을 진압하려고 했던 토벌대가 점차 무력을 강화하여 무장대와 충돌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무력의 강화에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토벌대는 ‘초토화 작전’을 펼쳐 주민들이 집단적인 희생을 당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제 3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초토화 작전’ 이후를 제 4기로 볼 수 있는데 사태를 평정하고 종결한 1954년 9월 21일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렇게 약 6년에 걸쳐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제주도민은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제주인구 28만 명 중 3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이중 83%이상이 토벌대, 11% 정도가 무장대에 의한 학살 - 제주도의회 자료)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을 시작한 1948년 11월, 제주도 전 지역에 걸쳐 펼쳐있는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을 내렸다.

그 후 사람들이 밑으로 내려오자 1949년 3월 부터 “한라산으로 부터 침투하는 무장대를 막고 밑에 사는 주민의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제주도 전마을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오라동에서는 오라1동 동쪽(현 보건소동쪽) 병문천에서 시작하여 고지냇도를 넘어 흙내를 따라 옛 감귤선과장에서 연미마을회관 남쪽 200미터 지점을 지나 연동마을까지 약 2 km에 걸쳐 높이 3~4미터, 넓이는 지반 2m, 상부는 1m 가량으로 각 마을단위 남녀노소를 동원 약 4개월에 걸쳐 성을 쌓았다.

이에 추가하여 사평마을에 새로 들어선 지서주위에도 성을 쌓았고(기록은 있으나 현지확인 불가) 들렁궤 서쪽 동산 주둔소에도 가로 세로 약 200미터 높이 5~6미터의 성을 쌓았다.

성 밖으로는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를 가시로 덮어놓았으며 100미터 간격으로 노인과 15세 전후 소년 그리고 마을의 전 부녀자들을 윤번으로 하여 지키게 하였다.

성안으로는 줄로 깡통을 이어달아 잡아 당기면 소리가 나게 하여 위급시 신호로 사용하였다.

 

* 사평동에서 없어진 마을

- 선달뱅뒤 : 옛 오라선과장 동남쪽 약 300m (당시 11호)

- 옹도왓 : 오롯질 따라 남쪽 약 250m (당시 6호)

 

 

 

6. 오라초등학교

 

1946년 고영중외 10여인이 연미마을 연미마을공동창고자리에 학교부지를 마련 목조 5개 건물 건축하여 학교설립

1946년 2월 1일 오라공립국민학교 5개 학급을 인가받아 개교.

1948년 12월 학교전소(성명미상 교직원 3명 사망)로 자진 폐교

1950년 6월 13일 제주남초등학교 오라분교장으로 인가, 건물 40평 2개교실 1,2학년으로 개교

1951년 9월 14일 오라국민학교로 승격

1953년 사평마을회관이 있던 현교지로 이설

1964년 재일교포 현인봉 843평의 밭을 기증 부지확장

 

* 사평마을회관

沙坪 = 모살왓가름沙田洞 + 벵뒤왓가름坪垈洞

1940년대 오라초등학교 자리에 목조건물인 사평마을 공회당이 있었음

(오라분교에서 초등학교로 승격시 부지일체 교육청에 기증)

현 마을회관 1968년 재일교포 고제식 부지제공, 재일교포 김기택 기금제공

1968년 완공 1972, 1994, 1995 증개축

 

* 성거리왓

: 마을회관앞 3거리로 모든 가정이 우마를 기르던 60년대까지 마소를 목장에 방목하기위해 번쇠가 출발할 때 마소를 집결시켰던 장소 (정실마을을 경유 공동목장입구 까지의 오롯질을 이용 이동)

 

 

 

7. 이중발묘역

사평마을은 약 350년 전에 연미마을에 살던 가구 중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해와 설촌되었다 하며 약 300년 전에 간옹 이익의 3대손 이중발과 수원 백씨 홍남이 이곳에 정착해 마을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간옹 이익은 제주에 유배 오면서 12살 된 아들(인실)을 데리고 왔다.

그 후 김만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인실을 키우게 하면서 아들(인제)을 낳았다.

유배에서 풀리면서 아들 인실만을 데리고 육지로 간 후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제주에 남겨진 아들(인제, 당시 3세)은 고홍진과 김진용의 보호는 받았으나 평범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고 인제의 아들 윤은 어렵게 진(鎭)의 조방장에 이르렀다.

그때 숙종비 인경왕후의 조카 김진구가 제주에 유배되어 오자 김진구를 모셨고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이 제주에 유배되어 올 때 산지천변 집주인이 되었다.

이 인연으로 윤의 아들 중발은 고만첨, 오정빈과 같이 김진구에게 배울 수 있었고 당대 최고문장가의 한사람인 김춘택과 교유 할 수 있었다.

윤이 죽자 아들 중발은 아비의 무덤을 신효동 월라봉 남쪽에 마련하고 김춘택에게 아비의 묘비명을 부탁하였다.

중발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후 이곳 오라동 사평마을로 이주해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고 중발이 죽어 장사를 치른 후 중발의 묘역 옆으로 증조모 경주 김씨의 묘가 이설되었다.

 

 

 

8. 오라고인돌(오라지석묘1호)

 

제주기념물 제2-7호(지정일 1971년 08월 26일)

청동기시대 후기 또는 철기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다.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리는 바둑판식 고인돌로, 장축은 북서방향이다.

덮개돌은 길이 250cm, 폭 207cm, 두께 35~40cm로, 윗면의 굴곡이 아주 심하다.

약간 경사가 져 있는 지면 쪽에는 받침돌을 따로 세우지 않고 지면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낮은 쪽은 받침돌을 세워 덮개돌이 수평을 이루게 만들었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3개로, 동쪽 받침돌은 길이 30cm의 냇가돌, 남쪽 받침돌은 길이 25cm의 깬돌이며, 서쪽 받침돌은 잔돌을 쌓아 만들었다.

민무늬토기, 돌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오라동 지역 내 없어진 고인돌

고인돌 (2) 고지교남쪽 방게동산에 있었으나 2000년도에 없어짐.

(크기 250*207*40 방향 북서향)

고인돌 (3) 오라3동사무소 동북쪽 150미터 1975년 서광로 개설시 없어짐.

(크기 280*230*50 동남장축 상석 평면)

 

 

 

9. 내왓당(방애왓당, 남새당, 오라본향당)

오라동 본향 내왓당의 당신은 남새할망 송씨부인 일뤠중저이다.

웃당 하르방신(산신)은 한천 동쪽에 모셨고 할망신(농경신)은 이곳에 모셨으나 하르방당이 야구장건설로 파괴되자 하르방을 옮겨 함께 모신다.

일대를 속칭 ‘내머리왓’이라고 하였기에 ‘내왓당’이라고 하며, 하르방당이 본래 있던 곳을 속칭 ‘방애왓’이라고 하였기에 ‘방애왓당’이라고도 하고, 하르방당이 방애왓에 있을 때 남쇄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따로 할망당을 모셨기에 ‘남새당’이라고도 한다.

 

오라동 본향은 신목형, 천변형, 제단형의 형태를 띤다.

잡석으로 돌담을 두른 제장 안에는 신목인 팽나무가 서 있으며, 팽나무 아래 두 개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동쪽에는 너비 2m 정도, 북쪽에는 1.4m 정도의 제단이 있는데, 각각 잡석으로 50㎝ 정도 쌓아 올린 위에 네모반듯한 자연석을 놓았다.

본래 오라동 본향의 제일은 정월 13일과 7월 13일이었지만 신앙민들은 정월 마을 포제가 끝나는 날부터 신당에 다니며, 집안에 일이 생길 때 택일하여 다니기도 한다.

현재는 부부신이 함께 좌정해 있기 때문에 신당에 갈 때는 메 두 그릇을 가지고 간다.

 

 

 

10. 동성마을

1979년 제주공항 3차 확장공사로 구사수동(몰래물마을) 철거결정.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몰래물주민 16가구가 이주해옴.

(마을이름을 몰래물주민들이 이주 설촌한 신성마을, 제성마을에 이어 동성마을로 결정)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공설운동장 체육시설 확장으로 남쇄마을 주민일부가 이주해오고 그 후 다끄네마을 주민 이주로 마을이 형성됨.

1994년 마을 경로잔치를 영주전기공사야적장 천막 속에서 실시, 당시 참석한 제주시장이 마을회관 신축을 약속하여 당시 제주시 분뇨처리장이었던 곳에 1995년 8월 24일에 회관을 준공하였다.

 

 

 

11. 연미마을

해방 무렵에는 구릉 9, 못 7 총 16개소의 물통과 가래 11개소가 있던 200호 가량의 큰 마을이었다.

1949년 1월 2일 소개되어 마을이 전소되었다가 1960년대 동구릉일대에 재건하였으나 1973년 오라동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되어(1999년 해제) 인근 다른 지역에 비해 발전이 지체되어 70년대 초부터 채소류를 생산하여 오일시장, 동문시장, 서부시장에서 판매하여 생활을 이어 나갔었다.

원 이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제비의 보금자리처럼 지세가 형성되었다 하여 燕尾라고 하였다가 후에 구릉과 못을 많이 파고 그 물맛이 좋다하여 淵味라고 바뀌었다고도 하고(도교육청 학교현황 연미학교)

옛 이름 ‘세미’가 淵味라는 한자 표기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오창명)

곧 淵은 ‘못, 샘’의 훈가자 표기, 味는‘미’의 음가자 표기로 ‘세미’〔泉〕를 淵味로 표기한 것이다.

1955년에 오라2동에 속하였다.

 

* 연미마을회관 1994년 신축 (도지원 7천만원, 마을기금 천만원)

1996년 증축 (2층)

 

 

 

* 오라리 방화사건의 현장

오라리는 광복이 되자 일제치하에서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을 벌였던 고사규․ 박기만․ 오팽윤․ 송삼백․ 이순정 등이 건준운동 등을 통해 마을을 주도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510 선거 때는 2,000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선거를 거부하여, “열안지오름”, “당뼝디”, “흑담밭” 등으로 대이동을 하게 된다.

1947년 31사건 때, 발포사건의 희생자 6명 중 2명이 이 마을 출신이었다.

한 사람은 국민학교 5학년 어린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40대의 교사였다.

시위 군중도 아닌 이들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지자 마을 주민들은 격분하였다.

이에 항의하던 허두문(許斗文) 등 마을 지식층 청년들이 경찰의 검거선풍에 휘말려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43 발발 직후 오라마을에서 첫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1948년 4월 11일의 일이었다.

당시 오라1구였던 정실마을에서 경찰관 부친인 송인규(당시 58세)가 ‘산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죽창 등으로 무장한 ‘산사람’ 들은 새벽녘에 잠긴 문고리를 부수고 침입, 경찰관의 아버지를 죽창으로 찌르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이때 방화로 바깥채와 외양간이 전부 불탔고 안채만은 이웃사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전소를 면했다.

이 사건은 43 당시 경찰가족을 겨냥한 첫 테러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4월 21일에 연미마을에 살던 이순오(35)와 고태조(37)가 함께 잃어버린 말을 찾으러 이웃마을인 오등동 쪽으로 나갔다가 이순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세 번째 사건은 4월 23일에 일어났다.

김태중(金太中)이 자기 집에서 경찰에 연행된 사흘 뒤 마을 인근의 ‘동산물’ 밭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총살을 당한 것이었다.

4월 29일 네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오라리 청년들에 의해 인근의 ‘민오름’ 으로 끌려간 사람은 마을 대청단장 박두인(朴斗仁)과 부단장 고석종(高碩鍾)씨 이었다.

다섯 번째 사건은 ‘오라리 사건’ 발생 전날이기도 한 4월 30일 오전 8시께대청단원부인인강공부(당시 23세)․입갑생(23)이 마차꾼을 데리고 세간을 옮기기 위해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가 동네사람들에 의해 붙잡혀 납치된 것이었다.

그 중 임여인이 납치되어 가던 중 산에서 미끄러져 산 아래로 굴러 내려졌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임 여인은 산 밑에서 수색 나온 기동경찰대를 만났다.

오라리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마차꾼이 여인들의 납치사실을 경찰에게 알린 것이다.

경찰대는 임여인으로부터 그녀의 동서가 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 위로 접근해갔다.

경찰대와 임여인이 산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임산부였던 강여인은 소나무에 묶여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숨져 있었다.

강여인의 사체는 경찰트럭에 실려 내려왔다.

강여인의 장례식은 그 다음 날인 5월 1일에 치러졌다.

그 장례식 직후에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 이 발생하였다.

방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이날 오전 9시께 마을 근처인 ‘동산물’에서는 초라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 전날 민오름에서 살해된 대청단원 부인인 강공부 여인의 장례식이었다.

시신은 경찰트럭에 실린 채 하룻밤을 보낸 뒤 장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 경찰트럭 편으로 경비 차 나온 경찰관 3-4명 이외에도 서청․대청단원 30명가량이 함께 올라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장례 현장을 외면, 얼씬거리지 않았다.

다만 평소 고인가족과 친분이 있었던 한 집안에서 4명의 식구가 나와 매장 일을 도왔을 뿐이었다.

매장은 두 시간 여 만에 끝났다.

장례가 끝나자 트럭은 경찰관들을 태운 채 현장을 떠났고 30명가량의 서청․대청단원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마을에서 1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무장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을 추적하자 이들은 황급히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연미마을 동부락 박태형 (朴泰炯, 당시 39세, 이명 朴三鳳) 강윤희(康允凞, 당시 30세) , 박전형 (朴銓炯, 당시 28세, 이명 朴宗實) 집 등 세 집 6채의 민가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이어 서청․대청단원들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2대의 트럭을 타고 출동하여 무장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진입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무장대와 경찰에 의해 경찰관가족 1명과 마을주민 1명이 각각 희생되었다.

이 때 일어난 방화사건을 경찰은 하산 귀순한 자를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폭도들의 보복행위라 했고, 무장대들은 경찰이 서청을 시켜서 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 후 1948년 11월 미군정에 의해 제주도 전역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면서 오라리도 초토화되기 시작하였다.

연미마을, 정실마을, 고지래마을, 선달벙듸 등 거주 주민들은 해안지대의 마을이나 제주읍내, 오라1동(동부락), 사평마을, 월구마을 등으로 흩어져 비참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들 마을들에 있는 초가집들은 전부 불에 타버렸고, 주민들 중 학식 있고, 유능한 인재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4․3사건으로 없어진 오라리 마을로는 연미마을(150호), 정실마을 (70호), 어은동마을(19호), 고지내마을 (약 11호), 해산이마을 (약10호), 선달벵듸마을(7호), 옹도왓마을(약5호), 등의 약 300호의 마을이며, 어은동마을, 고지내마을, 해산이마을, 선달벵듸마을, 옹도왓마을은 복구되지 않았다.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 및 희생자는 제주도 전체 27,719명이며, 오라리에서도 238명 정도로 잠정 집계하고 있다(마을지)

 

* 참고 1 : 오라리 방화사건은 당시 미군정에서 촬영한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제목의 영상 일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 참고 2 : 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해 일부인사는 4.28평화회담을 무효로 만든 것이라 하는데 4.28회담의 실체가 확실치 않다.

 

4.28회담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공식문서에는 없으며 장창국의 육사졸업생이라는 회고록에서만 전해 들은 이야기로 언급되고 있고 김익열은 회담을 한 날자가 4.30일이라고 1948년 8월 6일 서울에서 발행한 국제신문에서 밝힌바 있다./한겨레 20081112.

무장 유격대 상황일지와 인민유격대 보고일지에도 4.28에 관한 사항은 없다.

 

12. 사신서당비

연미마을 고영중씨가 연미마을 동구릉 옆에 개량서당인 사신서당을 세워 광복 후 오라초등학교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6년 고영중외 10여명이 연미마을 현 마을회관옆 공동창고자리에 학교부지를 마련 목조 5개건물 건축하여 학교설립 1946년 2월 1일 오라공립초등학교 5개 학급을 인가받아 개교.

1948년 12월 학교전소(성명미상 교직원 3명 사망) 폐교.

그 후 사평마을로 이전 제주남국민학교오라분교장으로 인가, 오라초등학교로 승격,

동구릉옆 사신서당옛터에 있던 사신서당비가 도로확장 및 일대 개발등의 이유로 마을회관 경내로 이전되어 세워져 있다.

 

 

 

13. 조설대

빌레(돌버덩)통의 땅이기 때문에 콥이설체라고 불리우는 곳에 큰 바위가 누워 있고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광무 9년 (1905)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이응호 등 열 두 사람이 집의계를 모아 의병을 일으키어 치욕을 씻고 나라를 광복하자 선언하고 그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바위에 조설대라 새기었다고 한다.

집의계는 이응호를 중심으로 각 지역 유림의 대표 12인이 모여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결사 항쟁을 맹약한 비밀결사체 이었다.

이 ‘집의계’의 12지사는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이다.

이들은 1905년 10월 7일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연미마을’ 바위산에 모여 ‘조정의 치욕을 설원한다.’ 는 뜻에서 바위에‘朝雪臺’라 새겼다.

이들은 한일합방이라는 국치의 날에 ‘조설대’ 에 다시 모여 ‘왜적에 항거하기를 천지와 더불어 하고 종묘사직에 맹세하여 의병으로 투쟁하자.’ 고 거듭 다짐하였다...고 한다 (향토지)

'朝雪臺'라는 글씨는 현무암 자연석에 가늘게 새겨져 있으며, 동산위에 '大韓光復義士' '朝雪臺'라는 비석을 세워 놓았고 입구에는 '集義契光復義士敬慕碑'를 세워 놓았다.

또 이곳에는 신제주가 건설되며 도로가 확장되자 옛 군청앞 도로가 문연사터에 있었다는 귤암이선생비(橘巖李先生碑), 귤암(橘巖), 애교대(愛敎臺), 양부정(養魚+付臺), 우백헌(友柏軒), 종서포(種筮圃) 등의 마애를 옮겨다 놓았다.

문연사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참판의 유적과 귤암(橘巖) 이기온(李基瑥)선생의 유덕을 추모한 제단으로 본래 제주시 오라동 2951번지 속칭 판관밧이라 하는 곳에 있었는데 신제주도시계획에 저촉되어 1977년 5월 후손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 집의계 12지사의 일원이라 하는 이응호와 김석익의 많은 저술중 어디에도 집의계와 조설대에 대해 쓰여진 것이 없으며, 조설대에 대하여 처음 알린 것은 1982년 8월 제주시에서 펴낸 "전통문화의 뿌리"라는 글에 집의계선서의 원문과 번역문이 '조설대와 문연사'라는 항목 속에 소개되었다.

그 후 이것을 비중있게 소개한 글이 1987년 판 김봉옥의 "제주통사"이지만 2000년 12월에 발간된 그 책의 증보판에는 집의계 내용이 실려 있지 않다.

2000년 8월 3일에는 제주시가 조설대를 제주도지정기념물로 신청하였으나 고증 작업의 미비를 이유로 거부되었다.

시간이 가능하다면.. 제민일보 2000년 3월 8일자 독자 투고, 김형중 [역사기록은 엄격해야 한다-집의계선서를 보고]의 일독을 권한다.

 

 

 

14. 어우눌

‘어우눌’과 ‘해산이’는 오라리 연미마을에 속했던 자연마을이다.

연미마을의 남쪽지경(민오름 북쪽 일대) 서쪽에는 御恩洞/御恩屹이라고도 한 어우눌이 있었고, 동쪽에는 개가 새끼를 낳은 곳이라 하는 해산이(解産이/海山이) 마을이 있었으나 1949년 1월, 죽성에 주둔했던 제2연대 3대대에 의해 소각되었다.

옛 마을자리의 중심부를 지나 연북로가 개설되었고 주변 대부분은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집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당시 주민들이 살았던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집터와 올래, 그리고 마을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민오름 남동쪽 기슭에는 마을사람들이 사용하던 구릉이 남아있다.

어우눌에는 2001년 4월에 “잃어버린 마을”표석이 세워졌다.

<표석 전문>

잃어버린 마을 -어우눌-

여기는 1948년 초겨울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제주시 오라동의 한 자연마을, 어우눌마을터이다.

약 4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어우눌은 제주시 외곽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1904년 문음서당(文陰書堂)이 개설되자 도내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향학열을 불태웠다.

마을 아랫녘에는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오라리의 이응호, 김좌겸 등 제주도 각 지역 유림 대표 12인이 모여 일제에의 결사항쟁을 맹약하며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조선의 치욕을 설원(雪怨)한다"는 의지를 바위에 새겨 넣은 조설대(朝雪臺)가 있어 마을의 기개를 지금까지도 드높여주고 있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일부 주민들은 오라리 등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눈 덮인 벌판을 헤매야했다.

이 마을에서는 당시 주민 100여 명(호수 23호) 중 약 13명이 희생되었다. 4.3을 거치면서 오라동에서 잃어버린 마을은 어우눌 이외에도 고지레(13호), 선달뱅디(6호), 해산이(15호)가 있다.

다시는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15. 새구릉

오라동에 구축하였던 28개 구릉 중 남아 있는 세 곳 중 한 곳

(오라1동 : 5개소, 사평마을 : 4개소, 연미마을 : 16개소, 오라3동 : 4개소)

마을의 공동수도가 설치되는 1965년까지 주민들은 봉천수와 하천수를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하였다.

지역별로 구릉을 파고 사람과 우마의 음용수로 이용하였는데 구릉이 가뭄 등의 이유로 바닥이 들어날 경우 하천수에 의지하였다.

특히 연미마을은 주변에 하천이 없어서 구릉을 많이 파게 된 것이다.

마을의 생명줄이었던 구릉은 공동수도가 들어오자 거의 매립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16. 연미마을 포제단

제주도에서는 당신앙과는 별도로 몇 가지의 남성 중심적인 의례를 지내는데, 포제(마을수호신을 위한 의례), 별제(역병이나 재난을 방지하는 의례), 기우제(가뭄의 해갈을 비는 의례), 해신제(어업을 관장하는 신을 위한 의례), 제석제(농업의 신을 위한 의례)로 구분된다.

그러나 현재는 포제만 남아있고 나머지 마을제는 사라진지 오래다.

최근의 포제는 마을에 따라 일 년에 한번 정월에 지내고 있지만 예전에는 통상 3월과 9월 정일에 제향하였다.

연미마을에서도 매년 정월에 里社之神을 모시는 里社祭를 지내고 있다.

제단이 있는 밭 구석 일대를 속칭 ‘엄태밧’이라 한다.

제관은 전사관, 예차, 도예차를 포함 12명으로 구성한다.

제관은 마을회관을 제청으로 삼아 3일 동안 정성하며 금년에는 2월 3일에 입제하여, 2월 5일 24시에 봉행할 예정이다.

 

연미마을 포제단의 형태는 돌담형에 속한다.

제주도 마을의 포제단은 노지형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여기서 발전하여 다른 공간과 포제단을 구분하여 경계를 지을 필요가 있을 때 이루어진 것이 돌담형인 것으로 보인다.

당우형은 후대에 오면서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차량 등으로 제청을 방문하는 사람이 늘면서 넓고 편리한 곳을 찾다가 이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의 포제단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으로는 돌담형이 기본이지만 차츰 당우형으로 변하고 있고, 노지형은 가끔 있다.

 

유교식 마을제라 하지만 석전제를 기본 틀로 하는 유교적 의례방식과 남성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남성 유지들이 제관이 돼 거행하는 유교의 형식만을 빌었을 뿐 그 근본은 토속신앙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17. 전주이씨 덕흥대원군파 입도조묘

 

덕흥대원군 : 이름 초(岹).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로, 1567년(명종 22) 6월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초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균(鈞 - 왕위에 오른 후 연(昖)으로 개명)이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그가 곧 선조이다.

1569년(선조 2) 왕의 생부로 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대원군은 왕위계승 할 적자가 없을 경우 종친중에서 왕위를 이어 받는데 이때 선왕의 생부가 받았던 호칭을 말하는 것이며,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 등이 있다.

선조 이전 성종과 선조이후 정종(후에 정조)의 아버지도 왕이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아들이 왕으로 등극하자 왕으로 추존(덕종, 장조)되었다.

선조도 즉위간에는 덕흥대원군묘소를 덕릉이라 부르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제주도 덕흥대원군파 시조묘라 비갈에 쓰여진 내용에 의하면 덕흥대원군 岹의 3세손인 진릉군 태경의 아들 挺梅(1637~1671)가 입도조라 되어 있다.

진릉군 태경은 덕흥대원군의 손자 익성군의 항령의 세 번째 아들로 1594년 태어났으며 선조의 여섯째 아들 보가 1609년 후사없이 죽자 양자로 입양되었다가 1612년(광해 4) 대북파 이이첨(李爾瞻)이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김직재 옥사(金直哉 獄事, 임자옥사, 김직재, 김백함 부자와 김직재의 사위 황보신(皇甫信) 등의 소북파가 진릉군 이태경을 왕으로 추대하려 모역을 꾸몄다는 사건)에 연루된다.

광해군은 당시 순화군의 장인인 황혁(黃赫)이 신천(新川)에 적거(謫居)하고 있었기에 진릉군이 역모에 가담된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역모죄로 다스렸다.

그리하여 진릉군은 왕족에서 파양되어 거제도에 위리안치되고, 1612년 10월 28일 향년 19세로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부모와 형제 모두 각지로 위리안치되었고 부친인 익성군 항령도 1614년 유배지 제주에서 사사되었다.

 

*성씨를 갖게 된 유래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 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씨가 없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 후에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박은봉.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조차 성이 없어서 처음에는 왕씨가 아니었다.]

그랗지만 성의 사용은 상층 계급에 국한되었으며, 귀족 계급이라도 성을 갖지 않는 인물이 많았다. 그 뒤 고려 문종 때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이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된 때를 성씨가 지배계층에 본격 보급된 시기로 본다.

 

조선 말기까지 성씨를 가지지 않은 인구가 전체 인구의 70% 정도 되었으며 조선말기 이들이 성을 취드과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전주 이씨가 많아진 이유로, 대원군이 정책적으로 전주 이씨를 발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전주 이씨를 자처하는 자는 모두 대종보에 이름을 올려주어 본적을 등재하면 이름을 올렸다고 하며 이후 조선 말엽 종친회 잔치에 참가한 자만 7만이라고 한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이성계이후 고종이전까지의 분파는 일반적으로 99파(왕은 不敢祖其祖 25大君·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의 대군과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측에서는 오늘날 전주이씨의 후예가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는 성종 임금의 아들인 계성군파(桂城君派),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그리고 중종 임금의 둘째 아들 해안대군파(海安大君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외 성종 제2 왕자 안양군파(安陽君派) 등이 살고 있다(제주도 향토문화대전).

 

 

 

18. 민오름

표고 : 251.7m, 비고 : 117m, 둘레 : 2,968m, 면적 :474.1㎡, 저경 : 996m.

화구는 정상인 서쪽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 사이에 북동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으나, 이 두 봉우리의 정상 부근에는 원형 분화구의 흔적만 남아 있다.

정상 분화구에는 1970년대까지는 항상 물이 고여 있어 한때는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예부터 민오름을 문악칠봉(文岳七峰)이라 했다.

오름의 등줄기를 두루 걸으며 살펴보면 봉우리가 7개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정상이 한일자로 보이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오름이다.

풍수지리에서 민오름은 높게 평가된다.

오름 윗부분이 평상처럼 평평한 모습을 하고 있어 오성체(五星體)중 토형(土形)으로, 목·화·금·수 네가지 성격을 모두 포용하는 성격을 갖고 있어 대체적으로 기운이 충만하고 후중하여 예로부터 왕후장상이 나오고, 오복을 겸비한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지도에는 文岳이라고 표기돼 있으며, 탁라국서(乇羅國書)에는 文山, 심제집에는 “文岳 일명 小禿岳”이라 적혀 있다.

 

민오름 일대는 일본군 제96사단 292연대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그 흔적으로 민오름 사면 곳곳에는 18곳의 갱도가 구축됐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입구가 함몰돼 진입이 가능한 갱도는 4곳 정도 된다.

진입이 가능한 갱도진지 가운데 한 곳은 길이가 1백m가 넘는 대형이다.

지역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민오름의 나머지 입구가 함몰된 갱도도 그 규모는 모슬포 일대의 갱도와 비교될 정도로 상당했다고 전한다.

동북쪽 자락으로 배수지가 있다.

제주상수도 사업은 1953년에 시작되었으나 오라동에서는 1965년도에 열안지 용천저수지가 개발되고 나서야 상수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반단위로 공동수도를 설치했다.

그 후 1973년에 용연정수장에서 오라 정수장을 거쳐 올려진 물 4000톤이 저장, 공급되는 오라배수지 준공으로 마을 각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상수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 정실마을

정실동(井實洞)의 옛 이름은 ‘도늬미마도내미마을’ 또는 ‘정실바위마을’이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道內山里(도내산리)라 하다가, 18세기 중후반에 井宲巖里(정실암리)로 바꾼 것은 제주목에 道內山里라는 마을 이름이 2개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애월읍 봉성리도 道內山里라 하였는데, 봉성리도 18세기 중후반에 於道內山里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도 정실마을을 ‘동도노미’라 하고 봉성리를 ‘서도노미’라 한다.

‘정실’이라는 이름은 마을 남쪽에 있는 ‘井室岩, 井宲岩(정실암: 정실바위)’ 이라는 지명에서 연유한다.

岩里는 井室岩里로도 표기하다가, 19세기에는 井實洞(정실동)으로 표기하고, 행정상 吾羅里(오라리)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정실암’은 민간에서 ‘정수암’이라고 부른다.

4.3후 마을 재건시 1955년 30호가 복귀하고 1959년 도시형 난민주택촌(50세대)이 건설되었고, 1962년 오등동 남쪽에 제주농업시험장이 개장된 후 일자리를 얻고 목초를 납품하여 인근 마을 낭고지(땔감나무 장사)에 비해 다소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고 1978년에는 제주시 중산간 마을로서는 처음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실시하였다.

 

 

20. 옥련천

 

정실마을회관 앞 500년 이상 된 팽나무에서 남쪽 150m 지점에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물이 있는데, 이 물을 玉蓮泉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정수암이라 했었는데, 조선 선조 20년 목사가 ‘영구춘화’를 보려고 ‘들렁궤’로 출행하다 정수암물을 보고 주변 경관이 ‘연꽃잎에 고인 구슬 같은 샘’ 이라 하여, 그 후로는 ‘옥련천’이라 했다한다. 이 물은 이전에 도노미 사람들의 식수였다.

이 물은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했음은 물론 넘쳐흐르는 물가에서 빨래와 목욕을 하기도 했다.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옥황상제가 마실 물을 길어 갔다고 하는 전설이 남아있다.

 

 

21. 도노밋당

옥련천 바로 위쪽으로 큰 팽나무가 보이고, 그 밑에는 10평 정도의 큰 동굴이 있다.

이곳이 도노밋당이다.

본향당신은 할망하르방 두 부부를 모셨는데, 할망은 ‘조숫물 삼대바지(한경면 조수리 지명) 삼신불법 할마님또(산육신)’ 이고 하르방은 ‘김씨영감 산신대왕 통정대부’이다.

사냥을 하며 떠돌아다니던 김씨 하르방이 조수에서 송씨할망을 만나 이곳 옥련천 부근 정수암 바위그늘집에 정착하여 마을을 설촌하였고, 송씨할망은 육식을 하지 않고 하르방은 육식을 좋아해서 안처와 바깥처로 구분하여 살림을 살고 있다고 한다.

 

 

 

22. 월정사(달왓절)

 

월정사(月井寺)는 제주시 오라 2동 656-2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의 말사다.

1871년 토굴로 창건 후 ,

(1) 1934년 음력 4월 8일 김석윤 스님이 제주포교소 월정암을 창건하며 오늘날 월정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제주 불교문화)

(2) 1938년 故김찬수 (오라2동 사평마을 김익중씨조부)께서 조선 불교 중앙 선리참구원에 등록하여 이때부터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양귀언, 현오, 비룡, 정명, 정진, 현도 스님들께서 주지를 역임하셨다.(오라동 향토지)

1948년 4·3 사건의 참화 속에서 월정사는 건물 일체가 전소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고.

4·3 사건이 끝난 후 인근에 7평가량의 난민 보건주택을 짓고 법당으로 사용하며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원 절집자리에는 교회가 들어섬)

월정사가 본격적으로 재건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지문 스님에 의해 교회자리를 사들여 이전시키고 대웅전과 요사가 신축되면서 부터이다.

2000년 12월에는 소조 여래좌상과 목조 보살입상이 제주도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니조여래좌상 [泥造如來坐像]

제주문화재자료 제4-1호, 크기 : 높이 59㎝, 너비 24.5㎝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높이 59㎝, 너비 24.5㎝이고 흙으로 조성되었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 높직한 육계가 있고 상호는 원만하나 경직된 모습이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이며 수인(手印)은 왼손의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걸쳐 놓았다.

또한 귀는 길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의 눈·코·입 등의 표현이 섬세하고 단정하며 안정감 있는 자세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이다.

 

 

*목조보살입상 [木造菩薩立像]

제주문화재자료 제4-2호, 크기 : 길이 78.5cm, 어깨 너비 20.5cm

이 불상은 향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78.5cm, 어깨너비 20.5cm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금속제 보관(寶冠)을 썼으며, 상호는 원만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인자하면서도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백호(白毫)와 눈·코·입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양쪽 귀는 짧게 표현되어 있다.

이마 위에서 흘러내린 검은 머리는 양쪽 귀를 감싸고 어깨 위까지 내려왔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 걸쳤고 허리 부분의 군의(裙衣) 띠에서부터 원호를 그리며 양쪽 발등까지 길게 흘러내린 유려한 옷주름이 특징적이다.

가슴과 오른팔 등에 굵은 장신구가 있고 양쪽 손목에도 염주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으며 두 손으로 연꽃줄기를 들고 있다.

화려한 보관과 유려한 의문(衣紋), 뛰어난 장신구를 비롯한 불상의 조각양식과 기법으로 보아 고려 말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23. 김석윤

1877(고종14)-1949

韓末제주의 의병참모장. 종교인. 기병(起兵) 격문 작성자.

본관은 광산(光山), 김창규(金昌圭)의 아들로 산북 이도리 138번지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산북 오라(吾羅)이다.

자는 근수(謹受), 호는 석성(石惺)이다.

자라면서 박춘경(朴春卿), 장기찬(張基璨)에게 기초 한문을 배우고 1887년 운감 김병규의 광양서재(光陽書齋)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 학문을 익혔으며 또 김설월(金雪月) 문하에서 금강반야경을 수학했다.

김석윤은 1898년 2월 대흥사에서 조운담(趙雲潭)을 스승으로 내전 초등과를 수료하고 제주 광양서재에서 한문교사로 취임하였었고, 1902년 1월 경남 통영군 용화사에서 이동운(李東雲)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고 또 한문 서재 교사로, 활동하였다

불교에 몰입하게된 연유는 스승 김병규의 교육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1908년 호남의 장성에서 거의(擧義)한 의병장 기우만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제주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민병을 모아 의병장에 고사훈(高仕訓), 이중심(李中心) 양인을 추대하고 김석윤은 의병 참모로 소임을 맡았다.

동광양 쪽에 살던 유생 고사훈(高仕訓: 39, 의병장), 이석공(李錫公: 개명 :中心), 김석윤(金錫允: 개명 錫命), 조인관(趙仁官), 노상옥(蘆尙玉) 등이 거사를 의논한 핵심 인사였다.

1909년 2월 25일 조인관의 집에서 고사훈,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김재돌(金在乭), 양남석(梁南錫), 한영근(韓永根), 김만석(金萬石) 등이 모여 기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결전(決戰) 거사일을 동년 3월 3일 주성(洲城)을 점령하기로 정하여 격문과 통고문을 2월 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으로 돌려, 병력 동원차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당일 영락(永樂)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 ․안성 ․광평 등지에서 장정 3백여 명을 가담시켰다.

이 때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가 관군과 장정을 동원하여 경찰과 공조하면서 의병활동을 차단하여 2월 28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당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지게 되었다.

동 3월 3일 고승천과 김만석은 총살되고 의병 참모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되고 이중심, 조인관, 노상옥 등은 귀덕(歸德) 포구에서 육지부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김석윤은 일경에 체포되고 1909년 4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배 10년이란 유형이 선고되지 항소(抗訴)하였다.

이에 1909년 7월 22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형이 확정될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후 불교에 더욱 정력을 쏟아 안봉려관(安蓬廬觀)이 색수곶(塞水藪)에 관음사를 창건할 때 불교를 설법하며 많은 재력을 쾌척(快擲)하였다.

이럴수록 일제로부터의 감시가 심해져 전북 정읍군으로, 또 전주의 동곡으로 옮겨 살았다.

1916년 위봉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법명을 종화(鍾華)라 하였으며 이어 부산 범어사에서 오회현 스승으로부터 대교과를 수학하였다.

1930년 2월 위봉사 말사 청련암의 감원(監院)에 취임한 바 있으며 1934년 범어사 제주포교소를 월정암 이어 위봉사 표선면 포교소를 설립, 위봉사 하례포교소 설립, 관음사 평대포교소, 관음사 소림원포교소 등의 감원을 두루 역임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어 대한불교 제주교구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상운(祥雲)이라는 법호를 받고 1946년 5월 구좌읍 김녕리의 백련사(白蓮寺)의 주지가 되었다.

김석윤의 두 아들 김인수, 김성수도 스님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탄신 1백 주년인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또한 이 해에 제주시 사라봉 남쪽 기슭에 박정희대통령의 휘호를 쓴 「의병항쟁 기념탑」이 세위지고 모충사(慕忠祠)가 건립되어 도민의 숭앙을 받고 있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찬흡편 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북제주문화원, 2005)

 

 

 

 

24. 김석윤 셋째 아들 김덕수 추모비석

김석윤 스님에게는 세 명의 출가 가족이 있었다.

그중 막내 김덕수 스님은 월정사를 지키다 1948년 12월 박석내로 끌려가 참변을 당했다.

이후 맏아들 김성수 스님마저 1949년 7월 관음사 포교당에서 운명하였다.

그 뒤를 이어 김석윤 스님도 8월 26일 입적였고 둘째 아들 김인수 스님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김석윤과 큰 아들 김성수의 무덤은 애향운동장 동쪽 병문천 서쪽 천변에 있었으나 김석윤의 묘역은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2009년 11월, 묘역번호 애지제4-162) 김성수의 무덤은 위치불상이다.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채 19살 나이로 스러져간 김덕수스님을 기리기 위해 그 육촌형제와 조카뻘의 인척이 월정사 동쪽 숲속에 추모비를 1956년에 세웠다.

 

 

 

 

25. 김석익(金錫翼) 묘

 

1885년(고종 32) ~ 1956년

일제강점기 때 제주 출신의 한학자이자 향토사학자.

본관은 광산. 자는 윤경(胤卿)·윤경(允敬)·홍점(鴻漸), 호는 심재(心齋)·일소도인(一笑道人)·해상실사(海上佚史). 초명은 김석조(金錫祚)이다.

아버지는 김창규(金昌圭)이며, 조선 말기에 의병운동을 벌였던 김석윤(金錫允)[1877~1949]의 동생이다.

여덟 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의 기초를 배웠으며, 열세 살 때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열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의였다.

16세 때인 1920년에 아석(我石) 이용호(李容鎬)에게 한문을 배웠다.

이용호는 충청북도 보은군 사람으로 교리(校理)를 지냈으나 1896년(고종 33)에 유배 7년형으로 제주도에 귀양을 왔고 1901년(고종 38) 6월에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지도로 이배되었던 한학자이다.

이후 김석익은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에 살았던 안병택(安秉宅)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안병택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출생으로, 아버지 안달삼(安達三)을 따라 일찍이 광주로 옮겨 살았다.

이 무렵 의병장이었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거주하던 한천정사로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으며,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이미 기울어지자 기우만의 구국 격문을 몰래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때부터 민족혼을 진작할 계책을 찾아 먼저 『탐라기년(耽羅紀年)』저술에 몰두하여 1915년에 완성하였다.

1916년 가을에 『탐라관풍안(耽羅觀風案)』의 오류와 빠진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할 무렵 주변에서 한문서당 개설을 권장하자 이를 실행하였다.

강창보(姜昌輔)[1902~1945], 한상호, 김택수(金澤銖), 김정순, 김정로, 고경흠(高景欽)[1910~?] 등이 김석익의 문하에 출입하며 한문을 익혀 그 영향을 입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광복 후 초대 도지사를 역임하였던 박경훈, 의학박사 홍순억 등의 명사들도 김석익의 문하생이었다.

한편 광복 직후 미군정 하의 공간도 한반도의 분단으로 혼란은 지속되었다.

1948년 초 민주독립당은 제주도 지구당을 창당하기 위해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김석익이 내빈 자격으로 참석하였으며, 만장일치로 도당(道黨)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김석익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의병활동에 나서거나 또는 독립단체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글로써 민족혼과 후진을 일깨워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저술에 938년(태조 21)부터 1906년(고종 43)까지의 탐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탐라기년』, 1906년(광무 10)부터 1955년까지의 제주의 현대사를 재정리한『탐라기년속편』이 있다.

또한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 『파한록(破閑錄)』, 『유리만필(儒理漫筆)』 등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오사카를 비롯해 한양, 청진, 정읍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식견을 넓혀 『북행록(北行錄)』, 『근역시화(槿域詩話)』, 『천주교란기』, 『양경천전(梁擎天傳)』 등을 비롯해 많은 글을 썼다.

서예도 당대 최고봉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해서(楷書)로 쓴 「황고부근행장(皇考府君行狀)」과 행서로 쓴 「퇴계선생복축사(退溪先生卜築詞)」는 매우 유명하다.

(제주 향토문화대전)

선생의 해방이후에 대한 시국관을 『심재집』 여러 곳에서 뽑아 살펴보면,

“조선이 비록 일본에 빼앗겼다고 하나 다시 미국과 소련의 통치에 들어갔다.

38선 이북은 소련이 주장하고 38선 이남은 미국이 홀로 담당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안재홍, 이승만의 무리들이 서로 이어서 정권을 잡고 남조선 사람들을 뽑아 썼으나 오직 그들이 좋아하는 이들만 골라 썼다.

이때에 간록 (干祿)에 급급한 무리들이 관을 털고 일어나 큰 벼슬을 맡는 것을 풀잎을 줍듯 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염치는 쓸어버린 듯 하니 대잔의 끝에 이르렀다.

우리 제주도의 소요(4․3사건)의 발판은 3․1 절 기념식 날 경찰들의 발포에서 시작되어 고문하고 잡아가둠이 점점 많아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실제로 조병옥이 조장한 것이다.

또, 경찰들이 총포를 자행하고 권위를 너무 써서 산군 (山軍)의 소동을 양성시켰다.

실제로 조병옥이 계도한 것이다.

‘아!, 한 발의 방자한 발포가 그 동기는 심히 미미하지만 그에 관계된 일(4․3사건)은 아주 크다.

애석하게도 조병옥이 경찰들을 징계하여 민심을 편안케 위무하지 못하고 반대로 경찰권을 조장하여 민중들을 탄압하는 것을 보안의 좋은 방책으로 삼았으니 착오라고 말할 수 있다.

4․3사건의 실상을 살펴보면 무한한 참극이 실제로는 조병옥의 일장박론(一場駁論)에서 시작되었다.

경전에 말한 ‘한 사람이 일을 그르친다.’ 라 한 것은 조병옥을 두고 한 말인가?

지난해 3월 1일 이후부터 경관의 무리들이 방자하게 권한을 자행하여 조금이라도 관련된 혐의가 있으면 일망타진하여 지지고 볶아 끝내는 중도에서 목숨을 잃게 하였다.

잡아둔 몇 사람을 내세워 목숨을 잃은 사람 모두를 모두 병으로 죽었다고 꾸민 까닭으로 사람들은 아침저녁을 보전하기 어렵겠다고 의심을 품었다.

이때에 한 무리들의 피의자가 무리를 모아 산으로 피하여 들어가 공작을 잠행하였다.

마침 국회의원 선거를 기회로 삼아 선거사무소를 습격하고 사람을 죽이니 이것이 이른바 4․3사건이다.

이때부터 경찰지서, 면사무소, 민간인의 마을을 습격하여 끊이는 날이 없었다.

정부에서 파견한 군인 중에도 또한 산군에 호응하여 산간으로 투입하는 자가 있었다.

송요찬, 함병선의 전후 소탕은 참혹하였다.

그러한 때를 당하여 그 사이에 사는 양민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였을까?

이미 산군의 공갈을 받았고 또 군인과 경찰의 위협에 겁먹었다.

또 서북청년이 발호하여 생살여탈의 권한을 쥐었으니 이들이 누구의 조종에 의하여 행동했는가?

사람 죽이기를 삼 베듯하여 동색피가 길을 덮었다.

아! 산중의 포로가 되지 아니하면 군인 경찰의 칼날에 엉켜 죽었을 것이다.

이때에 사람들은 발을 무거이 가져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여 죽음이 오히려 나은 것인지 살아 있는 것이 죽어 있는 것보다 나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이리 같이 어깨를 움츠려 아침에 저녁에 할 일을 꾀하지 못하였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실제로 이러한 때문이었다.

유사이래 없었던 참화이다.

기축년(1949)에 이르러 내무부장관 신성모가 와서 비로소 살육하는 행정을 멈추게 하였다.

경인년(1950) 남북교전이 이어져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이는 쓸어버린 듯 없어졌으니 아! 슬픔이여”

라고 말하였다.(『心齋集』2-186쪽, 발췌 : 오문복)

1956년 정월 20일 객사동 자택(삼도리 23번지)에서 졸하니 향년 72세이셨다.

동월 25일에 유명에 따라 독지동에 장(葬)하였다가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26. 한북교

1910년대초 몰독긔내에 있는 몰독긔소(월대소)를 중심으로 지금의 농촌지도소가 있는 몰독긔뱅디와 지금의 교도소와 그 아래쪽 네거리에 있던 몰독긔마을을 한데 묶어 한북리가 형성되었으나 1962년 시험장이 생기면서 동쪽마을은 오등동으로 흡수되었고 1970년 6월 제주교도소가 25000평 부지에 들어서면서 몰독긔마을은 없어지게 되었다.

옛 흔적으로는 한북교라는 다리명칭이 남아있다.

 

 

 

27. 방선문

이곳은 영주10경의 하나인 영구춘화로 상징되는 곳이다.

매계 이한우가 읊은 바와 같이 兩岸春風挾百花 花間一徑線如斜라 하여 양쪽 언덕 봄바람에 온갖 꽃들 끼고 있고 꽃 사이로 계곡으로 내려가는 한 가닥 오솔길 있던 곳이며,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노산 이은상이 말한 천성의 홍예문인 들렁궤가 있는 곳이다.

들렁궤에서의 봄꽃 구경이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봄이면 목사나 선비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면서 방문 기념으로 새겨 놓은 마애명이 訪仙門, 登瀛邱, 喚仙臺 등의 제액을 포함 40개 가까이 된다.

통상 이곳 들렁궤가 매계 이한우에 의해 瀛邱春花라 하여 영주십경중 제3경에 선정된 것으로 알지만 제주/영주십경 또는 8경은 제주목사로 왔던 야계(冶溪) 이익태(李益泰)(1694년 도임),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702년 도임)에 의해 그 이전부터 회자되어 왔고 특히 이곳 들렁궤는 야계와 병와의 품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1800년대 초 향토문사 소림 오태직에 의하여 瀛邱晩春이라하여 영주8경중 제2경에, 헌종 때 제주목사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 의해 瀛邱賞花라 하여 영주십경중 제1경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한편 이곳은 판소리 열두마당 중 하나인 ‘배비장전’에서 배비장이 기생 애랑의 목욕하는 장면을 숲속에서 몰래 훔쳐보던 ‘한라산화유(漢拏山花遊)’의 장소인 ‘수포동 녹림간(水布洞 綠林間)’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목사일행과 꽃놀이를 나온 배비장이 기생 애랑에게 꼬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그 무대가 목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기생들을 거느리고 봄놀이를 즐겼던 방선문계곡이라 한다.

 

계곡 동남쪽 병풍바위 위에는 우선대(遇仙臺)가 있으며, 옛날 나무꾼과 선녀가 사랑을 속삭였다는 곳이기도 하다.

 

* 방선문 제영 중 일부

 

登瀛丘

石竇呀然處 돌굴 입을 크게 벌린 곳

巖花無數開 바위 틈 사이로 봄꽃 만발하였네.

花間管絃發 꽃 사이로 봄노래 피어나면

鸞鶴若飛來 상서러운 새가 아스라이 날아든다.

洪重徵 題 己未首夏

 

喚仙臺

別壑乾坤大 별천지 골짜기 하늘과 땅 넓게 트이고

石門日月閑 돌문에는 해와 달이 한가로이 쉬네.

莫云無特地 경치좋은곳 없다 말하지 마라

雲箇有神山 구름은 신선이 사는 산에 떠있네.

花老三春盡 꽃은 시들어 봄이 다 지나 갔는데

巖상太古顔 바위 구멍은 태고적 모습.

알然鳴鶴至 학 우는 소리 귀속으로 들리니

知是在仙間 여기가 신선 세계임을 알겠네.

金永綬

 

入洞山如揖 골짜기로 들어서니 산이 마주하고

瀛丘我亦仙 들렁궤에 오르니 나 역시 신선 된 듯하네.

嵌空危欲墜 무너져 내릴듯 뻥뚤린 굴은

玉斧鑿何年 옥도끼로 몇 년을 깎아 냈을까.

玉溪 逍遙生 韓昌裕

 

水從瀛(溢)海放 바다로 흐르는 물

門對漢山開 봉해진 한라산 문을 열었구나.

仙去留花石 신선은 떠나고 돌이끼만 남았지만

令人幾訪來 많은 사람이 계속 오게 하는구나.

梁應祥

 

浦口呑紅日 포구는 빨간 해를 삼키려 하고

山肩荷白雲 산은 흰구름을 어깨에 짊어졌네..

淸遊宣此夕 오늘밤이 점잖게 놀기 좋을 듯 하니

携酒且論文 술 한잔 하며 글을 논해보세.

戌子 四月初一日 判官 李義謙

 

 

線通花徑轉 꽃 사이 실낱같은 꼬불꼬불한 오솔길

斧鑿石門開 도끼로 깎아낸 듯 열려진 석문

己透參同秘 참동계 비결 이미 터득했으니

休염俗子來 속세에서 왔다고 꺼리지 마오

己巳四月吉日 牧使 趙羲純

 

次壁上韻

亂石沈雲合 널려진 바위에 구름이 깊고

幽花向日開 그윽한 꽃은 해를 향하였는데

仙人不可見 신선을 찾아도 볼 수 없으니

我輩秪空來 우리들 공연히 온 것 같으이

韓鼎運

 

(착)石非神斧 갈라진 돌은 신의 도끼질이 아니고

渾淪? 判開 혼돈 속에서 그리 열렸으니

白雲二萬歲 하얀 구름이 천만년 흘러갈 때

仙俗幾多來 신선은 속계를 몇 번이나 다녀갔는가

己酉 秋 金緻

 

 

* 마애중에 사용된 開國이라는 연호 알아보기

개국 또는 조선개국 또는 개국기원이라는 표기는 갑오경장 후 일본에 의해 신설된 군국기무처에서 채택한 연호이다.

당시까지 사대하던 청나라와의 관계를 청산하라는 일본의 압력으로 청나라 德宗의 연호인 光緖를 6월 28일 부로 폐기하고 국내외 공문서에 개국기년을 사용할 것을 의결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고 채택년도인 1894년을 503년으로 산정하였다.

다음해 1895년까지 사용하였으나 1896년 1월 양력을 채택하면서 연호도 양력을 쓴다는 의미로 建陽으로 바꾸었다.

 

 

 

28. 개삿기오름

표고 115m 비고 20m 둘레 490m 면적 17,198㎡ 저경 167m.

옛 지도나 묘비에는 가사악 (可沙岳), 가사지악((可沙只岳)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화구 없는 원추형 화산체로 남북으로 긴 등성이에 해송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오름 남쪽에 있는 민오름이 개의 형국이고, 그 밑에 있는 이 오름은 어미개에 딸린 새끼개의 형국이라는 데서 개새끼오름이라 부르고 있다. (가삿기>개삿기>개새끼)

도청이 생기면서 많은 관공서가 들어섰으며, 삽시에 큰 단지가 되었다.

전래풍수설에 의하면 “개삿기 오름 옆으로 생수가 솟고, 뜬금없이 큰 고을이 생기겠다. 그러니 ‘만석꾼 부지라...”라고 했는데, 사실 그렇게 된 셈이다.

원래 도청자리는 연동이 아니라 모두 옛 오라리에 속한다.

 

 

 

29. 월구동

도라리(月羅里: 1700년도 전라남도여지도 오라호촌 북쪽 月羅村)와 구아랑 지역.

月羅村은 ‘랑굴’일대에 형성하였던 ‘랑굴을’의 한자차용표기이다.

‘랑굴’은 ‘중댕이굴’이라고도 하는데, 일대의 동네를 오늘날 月龜洞(월구동)이라고 한다.

月龜洞(월구동)은 민간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이름으로, ‘랑굴’의 음성형을 반영한 月(월)에, ‘구아랑’의 음성형을 반영한 龜(구)를 조합한 것이다.

대추남머세(먹돌세기아래)에서 관음정사 서북쪽 그리고 개삿기오름 남서쪽 까지를 이르던 넓은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용담2동과 연동에 많은 지역을 넘겨주었다

1962년에서 1994년 까지 오라동 사무소가 위치해 있었다.

 

* 참고 : 오라동 주민센터

1962년 1월 행정구역개편 (제주시 행정동을 14개로 정리)시 오라동(연동포함) 사무소 오라2동 사평마을 개인주택(양후춘씨 부친 댁)

1962년 12월 ~ 1994. 12. 18 현 오라3동 노인회관에 위치

1994. 12. 19 사평마을 김묘생여사가 제공한 오라2동 1194번지 352평 현부지에 동사무소 신축후 이설

 

 

30. 진주 강씨 입도조묘

 

제주도에 입도한 진주 강씨는 각각 1418년 태종 18년 강윤희(姜允熙)공이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왔으며,

1436년 세종 18년에는 은둔생활을 위해 강인덕(姜仁德)공이 입도를 하였고,

1506년 연산군 12년에는 갑자사화를 피해 강철(姜哲)공이 입도하였다.

강철(姜哲)은 중시조 박사공 강계용(姜啓庸)의 11세손으로, 성종 중엽 한양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진용교위(進勇校尉)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 12년에 갑자사화로 재종형 대사간 강형이 화를 입자, 전라도 완산으로 피신했다가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 제주로 입도하였다.

입도후 제주목 오라리에 정착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다.

강철의 장손인 강우회가 애월 수산봉자락 으로 이주하여 그의 후손들을 수산파라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수산저수지옆 곰솔나무는 장손 강우희가 이주시 심은 것이라 한다.

끝.

 

 

*참고서적

제주시/제주문화원 : 제주시 옛 지명

오라동 향토지

디지털 제주 문화대전

그 외 다수의 책자 및 디지털 자료 (기재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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