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유산답사회 정기답사.
오늘은 고영철선생님 안내로 제주 서부의 방어유적을 둘러 보았습니다.
나는 오후늦게에야 참석할 수 있어서 같이 둘러본 곳이 몇군데 않됩니다.
그날 찍은 사진에 디지털 제주 문화대전에 나온 설명을 붙입니다.
명월진성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
[개설]명월진성은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여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은 조선 시대 성곽이다.
명월진성이 있는 명월포는 고려 후기인 1374년(공민왕 23)
제주에 살던 목호(牧胡: 원나라가 운영하던 국영 목장 관리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상륙하여 난을 진압하고 돌아간 곳이다.
조선 시대 명월진에는
만호 1명, 치총 4명, 수솔군 82명, 성정군 330명, 유직군 99명, 진리 22명, 서기 30명 등 총 568명이 있었으며,
2봉수(도내봉수, 만조봉수)와
7연대(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를 관할하였다.
[건립경위]명월진성은 조선 중기인 1510년(중종 5) 제주목사 장림이
비양도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목성(木城)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제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이 돌로 바꿔 쌓았는데,
제주목의 서북쪽을 방어하는 진지였기 때문에
1764년(영조 40)에 조방장을 승격하여 만호를 두고, 제주 출신을 임명토록 하였다.
[위치]명월진성은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월림리가 있고,
서쪽은 금릉리, 북쪽은 한림리가 있다.
[형태]명월진성의 원래 둘레는 3,020척이고 높이가 8척으로
성 안에는 풍부한 양의 감천(甘泉)이 있었다.
동문과 서문·남문 위에는 1칸씩의 초루를 두었다.
성벽은 북서와 남동 방향으로 장축인 타원형으로,
성벽의 요소에 치성을 두어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사령방(使令房: 2칸), 공소(供所: 2칸), 공수(公需: 2칸),
무기고(武器庫: 4칸), 도청(都廳: 4칸), 진고(賑庫: 4칸), 창대청(倉大廳: 3칸),
중화청(仲和廳: 2칸), 진졸청(鎭卒廳: 3칸)과 창고 4동(각각 2칸)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황]현재 보존되고 있는 성벽은 동문과 남문 사이 120m의 외벽 성석(城石)이며,
각 문에 있었던 옹성(甕城)은 동문 쪽에 외벽만이 남아 있다.
배령연대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에 있는 조선 시대 명월진 소속의 연대.
[개설]배령연대는 동쪽으로 마두연대,
서쪽으로 대포연대(직선 거리 4.1㎞)와 교신했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을 배치하였다.
[위치]배령연대는 옹포리에서 협재리까지 해안선이 일직선으로 오다가
금릉리에서 밖으로 돌출되는 곳에 위치했다.
[형태]배령연대의 평면은 일반적인 방형(方形)의 평면을 한 연대들과는 다르게 원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처음 보면 방형의 연대가 허물어진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방형으로 배치된 지대석(地臺石)이 보이지 않고,
연대를 축조한 돌이 크기가 대체로 작은 것으로 보아 평면이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축조 방법은 잡석 쌓기이며,
그 크기는 하부 직경 4.9m, 상부 직경 1.6m, 높이 1.9m로 연대의 높이가 낮다.
연대 위는 불을 피웠던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된 화덕자리가 있으며 그 둘레는 5m 정도 된다.
연대위에서 본 주변 풍광
[현황]배령연대 동쪽으로는 협재리와 멀리 수원리,
북동쪽으로는 비양도, 그리고 서쪽으로는 두모리가 있다. 제주도 기념물 제23-19호로 지정되었다.
능향원 옆으로 이어진 4.3성벽
[참고] 복원전 배령연대
상부도 많이 무너져 산봉우리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마을 주민 고용반씨(1926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하단과 상단의 직경 차이가 별로 없는 원기둥에 가까운 원뿔대 모양이었다고 하며,
맨 위에는 70cm 정도 높이의 방호벽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방호벽은 밭담처럼 외담이었지만 비바람이 치면 쪼그려앉아 비를 다소 피할 수 있는 높이였다고 한다.
계단으로는 연대 남쪽으로 벽에 붙여 20~30cm 정도 되는 돌덩이 세 개가 겹쳐놓여 있었다고 한다.
(2008년 7월 24일 고영철)
두모연대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두모리에 있는 조선 시대 명월진 소속의 연대.
[개설]두모연대는 동쪽으로는 대포연대(직선 거리 1.2㎞),
서쪽으로는 우두연대(직선 거리 3.7㎞)와 교신했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위치]두모리 일주 도로에서 북서쪽으로 500m를 가면
주위 해안보다 돌출된 지역 포구와 인접한 곳에 있다.
[형태]두모연대는 대지가 경사져 있어서 높이 1.2m의 석축을 쌓았으며,
연대를 이루는 돌의 크기는 폭 40㎝, 높이 58㎝ 정도의 막돌을 이용하여 허튼층 쌓기로 구축하였다.
직경은 상부 6.5x4.7m, 하부 6.7x4.7m 정도이다.
[현황]두모연대의 높이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등대 시설로 사용되면서 상부가 허물어져,
지금은 1.8m 정도만 남아 있다. 제주도 기념물 제23-20호로 지정되었다.
[참고] 등대시설로 사용시 연대모습
연대앞에서 본 신창리해안 풍력발전기
두모리 도대불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두모리에 있는 도대불.
[개설]두모리연대는 조선 세종 때 축조되었으며, 납작한 상자 형태를 하고 있었다.
두모리 도대불은 이 연대 위에 1920~193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대불의 등화 담당자는 어부들 중에 한 사람이 맡았고, 다른 어부들은 석유값을 대주었다.
등화는 조업을 나가는 날에만 어두워지면 켜고,
선박들이 모두 입항하면 어부들이 소등했다.
기단부인 연대에는 받침석이 있고 연대 위에서부터 도대불 중간까지는 계단이 있었다.
[형태]두모리 도대불은 납작한 상자 형태의 도대불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연대의 가운데 부분에 하단 143m, 상단 108m, 높이 234m의 사다리꼴 형태의 도대불이 축조되어 있었고,
이 도대불의 윗부분에는 점등 도구를 보호하기 위한 조그만 집이 있었다.
두모리 도대불은 현무암을 사용하여 다듬은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현황]1973년 마을에 전기가 가설되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 두모리 도대불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옛 연대가 허물어지자 완전히 해체하여 연대를 다시 만들어놓았고,
도대불은 분리하여 이곳에서 100여m 떨어진 포구 쪽에 복원하여 놓았다.
[의의와 평가]두모리 도대불은 연대와 도대불이 만난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을마다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 도대불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는 귀중한 신호 유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았다.
문화재의 복원도 중요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도대불 앞에서...
수산봉수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제주성(濟州城) 소속의 봉수.
[개설]수산봉수는 북동쪽의 도원봉수(직선 거리 8.7㎞)와 남서쪽의 고내봉수(직선 거리 4.5㎞)와 교신을 하였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24명을 배치하였다.
[위치]수산봉수는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해안가에서 남동쪽으로 약 1.2㎞ 떨어진 해발 121m의 수산봉 정상에 있다.
지리적 위치는 동경 126° 23′, 북경 33° 28′에 해당된다.
[현황]현재 봉수대가 있었던 수산봉 정상에는 전투 경찰 경비소가 있고,
그 옆에 안테나가 세워진 자리에는 반경 10.5m, 높이 1.5m의 원형으로 된 토단(土壇)이 있을 뿐
봉수대의 흔적은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다.
저녁먹으러 모인 곳에서 본 바다...
Bonus] 디지털 제주 문화대전에 나온 방어유적에 대한 개설.
[정의]조선시대 외부의 침략에 대비해 제주 지역에 축조한 유적.
[개설]제주 해안 방어의 중요한 목적은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막는 데 있었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왜구들이 땔감과 물·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왜구는 고려 말부터 제주에 자주 침입하여 방화·약탈 및 인명 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공물 운반선을 약탈하는 등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수없이 침입하여 횡포를 부렸다.
이런 까닭에 제주 방어에 대한 새로운 방안이 모색될 수밖에 없었다.
왜구들의 제주 침범 기록을 통계로 보면,
1316년(충숙왕 3)에서 1556년(명종 11)에 이르는 240년 동안에 30차례가 훨씬 넘는다.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본격적인 제주 방어시설은 이미 고려 말부터 논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1302년(충렬왕 28)에 봉수가 이미 설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정비는 조선시대인 1439년(세종 21) 한승순(韓承舜) 목사 때부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후 중종과 명종 때의 대대적인 왜구 침략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으며,
19세기 이양선이 출몰하던 때까지 계속 정비되어 왔다.
[3성]3성(城)은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과 군사 목적을 동시에 갖춘 읍치의 성이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제주읍성·정의현성·대정현성으로 3분되어 있었으며,
읍성은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에 축조되는 까닭에 평지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에는 보편적으로 옹성(甕城)·해자(垓字)·치성(雉城)·여장(女墻) 등의 부대시설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앞을 다시 두른 성이다.
해자는 성벽 밖을 두른 인공 연못으로 성벽 앞에 설치된 또 하나의 장애물인 셈이다.
그런데 제주 토양은 특성상 물이 잘 빠지기 때문에 물 대신 가시덤불을 채워 넣기도 했다.
치성은 성벽에 달라붙는 적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끔 성벽 일부 구간을 앞으로 돌출시킨 구조물이다.
여장은 적의 화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위에 낮게 세운 담을 말하는데,
복원된 제주의 성벽에는 이것이 하나도 없다.
[9진]9진(鎭)은 제주의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을 말한다.
본래 진은 변방의 방어를 위하여 북쪽 변방과 남부 해안지대에 구축한 군사 행정구역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특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주로 남부 해안지대에 많이 설치하였다. 진은 방호소라고도 불린다.
1764년(영조 40)에 그 책임자가 ‘만호(萬戶)’로 승격되었던 ‘명월진’만이 ‘진’이고,
나머지 여덟 곳은 방호소라 불러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9진의 설치는 이미 태종 때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곳에 성이 축조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맨 먼저 축조된 진성은 1439년(세종 21) 한승순 목사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졌던 차귀진성과 수산진성이다.
이들 두 진 앞에는 차귀도와 우도가 있는데,
이들 모두 왜구의 거점으로 활용될 우려가 큰 섬들이어서 서둘러 진을 설치했던 것 같다.
1. 화북진성(禾北鎭城)
화북진성은 조선시대 육지와의 관문의 하나인 화북 포구에 있다.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주의 9개 진성 중에 가장 늦은 1687년(숙종 4)에야 만들어 졌다.
1699년(숙종 25)에 남지훈(南至薰) 목사는 환풍정(喚風亭 : 3칸의 객사)을 건립하였고,
북성 위에는 망양정을 두었다.
화북포가 얕고 비좁아 배 출입이 불편했기 때문에 1734년(영조 11) 김정 목사는 직접 부역을 독려해
길이 약 63m, 폭 6m, 높이 약 4m의 방죽을 쌓기도 했다.
그 위에 영송정을 지어 공사 선박의 출입 검문소로 삼았다.
그러나 김정 목사는 같은 해 9월 객사에서 사망하였다.
방파제 인접한 곳에 관민이 애도의 뜻을 담은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화북진은 동서로 120m, 남북으로 75m 크기이고,
성체는 대략 절반 정도만 남아 있으며, 성문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성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북측 성벽을 바다에 붙여 쌓았다는 특징과
서측 성벽이 잘 남아 있어서 성의 축성 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2. 조천진성(朝天鎭城)
본래 진성의 축성 연대는 미상이나,
1590년(선조 23) 이옥(李沃) 목사는 출륙하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으로서,
적 침입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포구임을 관민에게 호소하여 농한기를 이용해 성을 축조하게 했다.
2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둘레 약 130m, 높이 약 3m의 작지만 짜임새 있는 성을 축조했다.
특히 성을 동북쪽으로 물러 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워 객사로 삼고 ‘쌍벽(雙璧)’이라 했다.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는 쌍벽정을 중수하여,
북녘에 계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뜻을 담아 ‘연북정(戀北亭)’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연북정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원형(原型)에 가까운 조천진의 성체와 함께 보존되고 있다.
조천진성은 다른 진성에 비하여 성문이 하나밖에 없고 규모가 작지만
성 주위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독특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3. 별방진성(別防鎭城)
장림(張琳) 목사는 우도가 왜구 침입에 용이하므로
이를 대비하기 위해 1510년(중종 5)에 김녕 방호소를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로 옮겨 별방진을 설치하고,
둘레 약 724m, 높이 약 2m의 성을 쌓았다.
동·서·남문에 각각 1칸짜리 초루가 있었다.
별방진은 제주목 동쪽 끝에 위치한 진성으로서,
특별 방어가 필요했기에 이름도 ‘별방’이라고 지어졌다.
9개 진성 중 명월진성 다음으로 크며, 북동쪽 성벽은 성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게 축조되었다.
도내 9진 가운데 비교적 성곽이 많이 남아 있어, 제주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1996년에 남쪽 성곽 일부를 보수하였다.
4. 수산진성(水山鎭城)
수산진성은 도 안무사 한승순의 건의에 의해
1439년(세종 21)에 둘레 약 350m, 높이 약 5m 규모로 9개 진성 중 가장 먼저 축성됐다.
이경록(李慶祿) 목사가 임진왜란 때 성산 일출봉을 천혜의 요새라 판단하고
진성을 성산일출봉 인근으로 옮기면서 폐성됐다가(1597년)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수산진성은 동서 134m, 남북 138m가 넘는다.
수산진성은 성체 대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성담은 현재 수산초등학교 교사(校舍)와 운동장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성(東城) 한 부분에는 ‘진안할망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성을 축조할 때 돌담이 자주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죽고 다치자,
13세 어린 소녀를 재물로 바쳐 성담과 함께 묻자 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소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설치한 당(堂)이 바로 ‘진안할망당’이다.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섬 주위에 돌성을 쌓아야 했던 도민의 어려움과 고통을 환기시켜준다.
성 구조와 관련해서는 북쪽 성벽 전 구간에 남은 높이 45㎝의 여장과 남쪽 성벽 앞의 자연 해자, 그리고 치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5. 애월진성(涯月鎭城)
애월진성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들어와서 관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목성(木城)을 방어시설로 사용하다가,
1581년(선조 14) 김태정 목사가 애월 포구 가까이에 돌로 성을 쌓아 진을 옮겼다.
석성(石城)은 둘레 약 166m, 높이 약 2m이며 남·서 두문에는 문루를 두었고,
객사와 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재 바다와 접한 북측 성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미석(楣石)·총안(銃眼)·회곽도(廻廓道)·여장(女墻) 등이 남아 있어 당대 해안성의 방어 성격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남측 성벽은 복원하였으나,
당대의 성벽인 북측 성벽과는 축조 방법의 차이를 보인다.
6. 명월진성(明月鎭城)
명월진성은 조선 1510년(중종 5)에 장림 목사가 비양도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목성(木城)으로 축조했다.
급박했던 정세 때문에 나무로 서둘러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통나무를 엮어 세운 담장, 즉 목책(木柵)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1592년(선조 25)에 이경록 목사에 의해 돌로 바꾸어 쌓았으며, 둘레가 약 915m, 높이가 약 2m이다.
성 안에는 풍부한 양의 감천(甘泉)이 있었고,
동·서·남문 위에는 1칸씩의 초루를 두었다.
제주목 서부의 중요 진지였기 때문에 1764년(영조 40)에는 조방장을 승격하여 만호를 두고,
제주 출신을 임명하도록 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성벽은 동문과 남문 사이 120m의 외벽 성석(城石)이며,
각 문에 있었던 옹성(甕城)은 동문 쪽에 외벽만이 남아 있다.
제주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7. 서귀진성(西歸鎭城)
서귀진성은 본래 해변가 홍로천 위에 있었는데,
1590년(선조 23) 이옥(李沃) 목사가 서귀포구 동쪽으로 옮겨왔다.
성 밑 포구는 넓고 암벽으로 자연 방풍이 되어 있어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추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진(鎭)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았으므로,
폐목장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감세 조처하여 진 주위에 살도록 했다.
또 정방폭포의 상류 물을 끌어와서 식수와 농사에 이용하게 했다.
현재 옛 서귀진 터에 민간시설이 들어서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8. 모슬진성(摹瑟鎭城)
1676년(숙종 2)에 윤창형(尹昌亨) 목사가 동해 방호소를 옮겨서 축성하였다.
3면이 바다이므로 뭍 쪽으로 성문 하나만 두었다.
따라서 성 안에는 물이 없어 성 밖에 있는 ‘신영물’을 이용하였다.
둘레는 100m,이고 높이는 약 4m였다.
모슬포항 개발로 부근이 매립돼 개인 주택이 들어서면서 진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9. 차귀진성(遮歸鎭城)
차귀진성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지
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인 목호가 말을 기르기 위해 서아막(목축관리소)을 설치했던 곳이다.
1652년(효종 3) 이원진 목사가 차귀도를 의지 삼아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성 둘레는 약 360m이고 높이는 약 3m이다.
처음엔 여수(旅帥: 약 125명의 병력)를 두었으며,
조방장을 거쳐 만호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조방장으로 환원하였다.
현재 성의 윤곽은 찾아보기 힘들다.
[봉수와 연대]제주의 봉수는 25개소, 연대는 38개소가 있었다.
봉수는 봉(烽, 횃불:밤)과 수(燧, 연기:낮)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시설이다.
군사 목적으로 봉수를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제주에서 봉수와 연대 시설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본격적인 군사적 통신 시설로 사용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은 “봉화 후망(候望)은 22개소이고,
봉군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또 1702년(숙종 28)에 부임한 이형상 목사는 『남환박물』에서
제주에 “봉수와 연대가 63곳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봉수와 연대는 1895년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위치와 숫자를 달리하면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군사적 통신수단의 구실을 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 거화거수법(擧火炬數法)은 평시에는 1개,
황당선(荒唐船)이 나타나면 2개, 지경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범하면 4개,
접전하게 되면 5개를 올리는 5거법을 채택했다.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피웠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 불이나 연기로 통신이 불가능할 때는
봉군이나 연군이 달려가서 연락을 취했다.
봉수와 연대의 주변 백보 내에는 봉화의 오인을 막기 위해
무당이나 통속적인 잡신제를 절대 금하였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보다 높은 곳에서 약 20㎞ 밖의 먼 곳을 감시하던 시설이라
해안에서 조금 산 쪽으로 들어온 오름 위에 위치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오름 정상에서 위쪽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그 위에 불을 피웠고,
밑에는 불의 번짐을 방지하기 위해 물을 채워놓을 수 있는 이중 도랑이 있는 구조였다.
반면 연대는 네모지게 돌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주로 다가오는 배가 적선인지 혹은 표류선인지를 현장에서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해안 가까운 언덕에 만들어 졌다.
이처럼 연대는 현장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봉수보다 숫자 면에서도 많을 수밖에 없다.
높이와 크기와 시설에 대한 규정이 법으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제주도 연대의 경우 규모에 있어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치는 대개 해안의 높은 지대에 방형으로 축대하였다.
각 봉수에는 6명의 별장과 12~36명의 봉군이,
연대에는 6명의 별장과 12명의 연군(혹은 직군)이 배치되었다.
별장 2명과 봉군(연군) 4명 내지 12명이 1조로 구성되어 3교대로 근무했다.
[제주성곽의 형태와 축조공법]제주성곽은 고려시대 축성된 항파두리 토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석성이다.
석성의 축조는 흙이나 목재로 축성하는 것보다는 많은 공력이 들지만,
자연적으로는 석재 확보가 쉽고, 성곽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성곽은 평지성으로 지형에 따라 세분하면 대부분은 해안에 위치한 해안성이다.
내륙성에 속하는 것으로는 정의읍성·대정현성·차귀진성·수산진성이 있고,
해안성으로는 제주읍성·화북진성·조천진성·별방진성·애월진성·명월진성·서귀진성·모슬진성이 있다.
이와 같이 해안성이 많은 것은 제주도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며,
해안성은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인 기능이 많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주도 성곽 중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은 내륙성 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반면에
조선 중기에 이르러 축조된 성곽은 해안성에 원형 혹은 타원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제주의 성곽은 제주도 현무암을 치석(治石)한 후 허튼층쌓기로 축조 하였고,
축조는 대부분 협축 공법을 사용하였다.
성곽은 외벽의 기울기에 따라 성벽의 안정성과 방어능력이 크게 달라진다.
즉, 경사비율이 적으면 성벽이 완만하여 안정성이 있으나 방어력이 감소되고,
경사율이 크면 급경사가 되어 방어력은 있으나 안정성이 부족하여 붕괴의 우려가 커진다.
제주의 성곽은 성벽의 외벽 기울기가 대부분 직선형이고,
단경사를 이루고 있다.
즉, 제주 성곽의 성벽을 일정한 경사비율에 따라 성벽 하단부터 상단까지 쌓아 올렸다.
따라서 제주의 성곽은 안정성보다는 방어능력에 중점을 두어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