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 올레

제주올레 5코스 3. 세천포구에서 고망물까지

하늘타리. 2011. 4. 18. 14:51

 세천포구입니다.


지귀도를 보고

 


저 멀리 숲섬에서 시작되어 제지기 오름, 설오름, 칡오름으로 연결되는 라인을 보고...

 

 

 옛 해녀작업장입니다.

 

 수림 안에 좌정한 돈지하르방과 돈지할망을 뵈러 갑니다.

 

이당에는 해녀와 어부들이 다닙니다,

 

제일은 1일 하고 15일이지만 요새는 통상 생기 맞는 날 다니지요.
깨끗한 지전물색과 주변 흐트러진 술병 등이 많은 당궐이 다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에서 나와 해녀작업장으로 갑니다.

 가지런히 걸려 있고 널어져 있는 테왁과 잠수복

 

 무언가 허허로움에 암반위로 내려갑니다.

숲섬을 보고 

 

 지귀도를 보고...

 

무엇이 허허롭냐고요?
그냥 해녀분들 생각하다보니 그럴까요?

 

해녀수는 4~5년전 당시 83명 이었는데 60대가 56명, 50대가 20명, 그리고 70대가 7명이었습니다.

이제는 전체  인원수는 더 줄고 나이는 더 많아 졌을 겁니다.

몇 년 전에 이곳 해녀회장분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나서입니다.
07년 당시 임의순 어촌계장은 해녀들 작업이 길면 한 10년 정도 지속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작업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일을 하려해도 힘든 것에 비하여 수입이 않되고

건강이 너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해녀들이 없으면 개인이 얼마를 지불하고 바다밭을 산후

해산물 채취하는 시기에만 한시적으로 스쿠버다이버를 쓰면 가능할 것이라 합니다.
그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서입니다.


이곳은 소라, 오분자기, 성게. 갈래곰보, 천초가 주생산물입니다.

그중 천초(우미)가 남쪽지역어장중 가장 많이 난다고 하고

갈래곰보는 전량을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하는데도

이제 물질로 가정경제를 꾸려간다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돈짓당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민가마당에 심어져 있는 병솔나무

 이름 그대로 bottle brush tree
좀 있으면 아름다운 꽃이 활짝 필겁니다.

 

개설

종종 바닷가 이름에 설 또는 썰, 쏠이 나타나는데 그 이름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는 없습니다. 

 

들어가면 뭔가 있을 듯한 출입구

 나무덩굴로 꽉 막혀 있습니다.

 

개설에서 벌러니코지까지 바닷가를 연해 갑니다.

 이곳 바당에 한때 도지원사업비와 어촌계자부담으로

전복, 오분작, 해삼 등의 종패를 뿌렸는데 기대만큼의 수확이 없었다 합니다.

 

가슴 아픈 바당입니다.  

 

 

 

 

갯메꽃이 한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금창초

 

제비꽃이 바닷물옆 바위틈새에도 자라고 있습니다.

 

 찔레넝쿨

곧 이 일대를 하얗게 덮을 겁니다.


갯완두 

 무엇을 이리도 간절히들 바라는 걸까요?

 

 나리

 조금 더 지나야 고개를 숙인 땅나리인지, 고개를 치켜든 하늘나리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조그만 바위연못

 

숲으로 이어지는 바위

 

 

멀리 지귀도 

 

벌러니코지앞 방파제

 

염주괴불주머니 

 
벌러니코지에서 본 방파제

 

 


우영은 아니고 이장해간 무덤자리

 

담을 이용해 만든 우영밧

 

콩재배지

 

위미항

왼쪽 방파제는 벌러니코지에서 부터 오른쪽 방파제는 신우지코지에서 부터 나왔습니다.

 꽤 큰 항구입니다.
현재 이곳을 동지나해 출어선 지점항으로 개발중이라 합니다.

이름을 모릅니다만

아스콘과 콘크리트를 뚫고나오는 저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조배머들코지 

 구실잣밤나무가 군락을 이룬 돌무더기 지대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무너진 머들들을 다시 세우고

해림동산이라 했는데

지금 다시 둘레를 파서 연못을 만듭니다.

 

 

 

그런데 여기 조배머들코지라는 표지석아래 비를 세우며의 내용이

아까 지나온 벌러니코지에 대한 구전 전설을 각색한 것입니다.

 이 비석이 세워진 1998년, 그 이전 발행된 마을지에 있는 벌러니코지 전설을 옮겨봅니다.
"애초에 이 곶에는 높이가 무려 70척이 넘는 석벽이 솟아 있었다.

그 지형지세가 비룡전에 용이 앉아 바닷가의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을 받아 앉아 공부하는 사람의 상과 비슷하다 하여 文筆峰形이라고도 했다.
어느 날 이 마을의 세도가 집안인 김씨, 즉 큰집에서 일본인 전문가를 초청하여 석벽을 폭파하여 부숴 버렸다.

한 지관이 큰 집터와 선묘 터를 보고 논산(論山)해 본 바,

바로 그 석벽으로 인해 자손이 단명하고 재산이 흩어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석벽은 굉음을 발하며 폭파되었고 뒤를 이어 검은 구름이 부서진 석벽그루터기에는

 어마어마한 이무기가 거의 용의 형태를 갖춘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1,000년을 그 석벽 밑에 살면서 용이 되어 승천하기를 기다리다가 그만 뜻을 이루기 직전에 죽고 말았으니,

그 한이 오죽하겠는가.

그 후로는 위미리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고 출중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하면 단명해 버리기 일쑤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직 후손이 번창하기를 원하여 자연을 거스르는 짓조차 마다하지 않았으니

큰집은 손이 끊겼다고 한다.

이 후 사람들은 석벽이 부서져 버린 이곳을 일컬어 '벌러진코지'라고 하였는데

변형되어 '벌러니코지'라고 불린다 한다."
똑같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조배머들코지를 복원한다 하면서 그 전설을 차용해 써놓았습니다.

 이게 다 서운함의 표시입니다.
이곳 위미리는 설촌이 남원리보다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山南유일의 최대의 天然浦口인 동앞개를 가지고 있어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제주-오사카를 운항하는 정기여객선의 기항이기도 했습니다,

1000t 급의 기미가요마루와 800t급의 게이조우마루, 한일합작선인 함경환, 1,200t급의 보목환 등 네 척이 드나들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당연히 이 마을이 산남의 으뜸이 되어야 하는데

늦게 설촌된 마을이 南元이라는 이름을 가져가고

또 면치소까지 의귀에서 그리로 옮겨가고나니 마을 유지들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게 다 인물이 없음에서 그리되었다하여 그 아쉬움에 표시를 이렇게 절절히 글로 남긴 겁니다.

 

위미리는 설촌 전설이 참 많은 동네입니다.
그중 돌아가신 후 성기가 잘린 고좌수의 전설이 재미있습니다만

그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그 말을 한다고 할까봐 생략하고

속담이야기 하나 해볼까요.
장밭장에 뙤미가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 없이 엉뚱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말하는 거라는데...
해석하면 태흥리 장에 간다는 사람이 엉뚱하게 위미에 간다라는 말이랍니다.
태흥리의 옛 이름이 장밭이고 위미의 옛 이름이 뙤미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겠지요.
1915년까지는 우미라 쓰고 뙤미라 불렀습니다.
마을문장이라는 분들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지명이다.

이는 마을 북쪽에 큰 동산, 족은동산, 쇠동산이 있고 쇠동산의 지형지세가 마치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 했고,

족은 동산은 소의 꼬리와 닮았다하여 우미라 했다"는데 공식이름이 서중면 又美리 인 것을 보면 그 건 아닌 것 같고요....
1915년에 우미리에서 위미리로 개칭되었습니다만

아직도 한라산쪽 동네에서는 웃뙤미라 부릅니다.
 

 

조배머들코지북쪽 동산을 오릅니다.

 백량금길을 따라 가서

 포구를 보고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동산 기슭 당을 찾았습니다. 

 

 

 

산기슭 오붓한 곳에 있었는데...

주변을 다 깎아내어 공원을 만들고 있으니 주변에서 훤히 보입니다.

아마도 이당은 그리 오래 존속되지 않을 듯 합니다.
그 이유는 아실 거고...

폐당되지 않고 이전된다면

아마도 이곳쯤 아닐까 싶은 곳을 둘러봅니다.

 

 
동앞개입니다.
위미2리 앞개라고도 하지요

 

지금이야 배 다닐 일 없으니 그냥 형태만 유지하며

옛날의 영화를 곱씹고 있을 뿐입니다. 

 

 

 

 

동앞개옆 수림속 위미2리 동카름 돈지선왕당입니다.
위미2리 어부, 해녀들이 생기 맞는 날을 택하여 돈지할망을 뵈러 갑니다.
제단도 울타리도 없는 정말 소박한 당입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쫒기듯 동앞개를 떠납니다.

 그래도 아쉬워 다시 한번 꾹

 

동앞개옆 예전 가공시설, 

 빗방울을 피하러 뛰어갔다가 귀신나올듯하여 그냥 나옵니다.


빗속에 쭈그리고 앉아 보는 광대수염 

 어른들은 꽃수염풀이라고 불러왔는데

젊은 학자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외국광대 삐에로를 연상해서 광대수염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이름은 어떻든  꽃은 혈의 운행을 활발히 해 여성의 월경을 순조롭게 한다하고

뿌리는 소변을 잘 보게 한다고 합니다.

 

 이 부근에 앙강물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아닌가?

 이 샘은 밀물 때는 바닷물에 잠겼다가 썰물 때는 드러나는데

여기가 위미1라ㅣ와 2리를 경계 짓는 물이라는 의미의 앞곰물이 변형된 이름이라고 하던데

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왔나?

패쑤

 

고망물

 바위틈 구멍에서 물이 솟아오른다고 고망물로 불리고 있는데

이름과는 달리 예로부터 수량이 풍부한데다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질 않았다 합니다.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쓰고도 남아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이 샘을 이용하여 소주를 제조하는 황하소주공장이 북쪽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돈을 버신 분이 제주의 대표사학 오현교를 만드셨지요.
하지만 지금은 말라있습니다.

 

 

 

엄청 내리는 비를 피해서 주민복지센터 건물 1층 한구석 화장실문앞으로 피합니다.
벽에 걸려 있는 항공사진을 보며 동네에 떠도는 여담하나를 생각합니다.

이 동네에 "넙빌레 물도 고망물이라고 하면 고망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을지의 내용을 옮기면

" 일제강점기 시절에 황순하(黃舜河)는 고망물 위에 소주제조공장을 세워 순도 35도가 넘는 술을 걸러내니

제주섬에서는 물론 부산과 목포 등지에까지 인기가 대단했다.

당국에서는 정기적으로 소주를 빚는 수질검사를 왔는데, 그 때가 되면 넙빌레물을 길어다가 고망물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고망물 수질이 넙빌레물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주공장에서 소주를 빚는 동안 단 한 번도 수질검사에 걸린 적이 없이 무조건 통과되어 고망물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내막을 아는 위미리 사람들은 빙긋이 웃었다.

결국 황순하는 큰 돈을 벌어 나중에 오현학원을 세워 후학하는데 요긴하게 썼다 한다.

이제도 위미리에서는 바꿔치기하는 걸 빗대어, "넙빌레 물도 고망물이라고 하면 고망물이다"라고 한다."


이동네 사람들 말이 아니고 넙빌레마을사람들 말 같네요.
제가 읽기에는 넓빌레물이 더 좋다라는 뜻으로 들리는 데요?

 

지금은 아니겠지만 위미해녀분들하고 신례리 넓빌레마을 해녀분들은 사이가 않좋았습니다.
지귀도 때문이지요.
지귀도는 위미리와 신례리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어장구역을 두고 다툼이 있어서

위미에서 공천포로 시집간 오누이가 바다밭을 다투어 싸우기까지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위미리 해녀회장 고덕수가 일본군 시체를 발견합니다.
마을이장에게 부탁해 넷빌레소롱코지에다 묻어줍니다.
어장소유권을 결정하는 가장 큰 관습은 시체처리가 우선입니다.

그래서 지귀도 어장은 위미리 해녀들의 바다밭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지금은 그리 많은 해산물이 잡히는 것도 아니고
해녀수 총 합쳐야 오십몇명이고 70대이상이 10명이 넘습니다.
그러다 보니 깊은 물질은 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관리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데 이용료 1인당 6000원정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답니다.


예전에는 지금쯤이면 지귀도로 들어가서 보름간 살면서 톳작업을 했답니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당으로 치면 감귤밭작업보다 못하다고 하여 지금은 호응이 적답니다.

지금의 지귀도는 섬 자체는 통일교 재산입니다만 어떤 시설을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가파도와 비슷하게 생겼고
최고 15미터정도 높이의 섬이 동서남북 360*270미터의 크기랍니다.
가파도는 높이가 17~18미터일겁니다.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서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렌즈가 잘 닦였나 점검도 할 겸 안내도를 한번 찍고

 

건너편 고망물도 찍고..

 서앞개도 찍고...

 

 

빗속을 씩씩하게 가다보니 길옆 다박낭모실 돈지할망당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애기씨선왕을 뵈러 돌아섭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지나쳤습니다.

옆에 개복숭아나무가 보입니다.
몇장찍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


극기훈련도 아니고..

 쏟아지는 비로 이것저것 자꾸 놓치며 갈 바에는 차라리 돌아가자....


큰길로 나와서 비에 젖은 생쥐한마리, 버스를 기다립니다.
기사한테 욕이나 않먹으면 다행일겁니다.

 

또 다른 올레길에서 뵙겠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