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효동 조방장동산으로 갑니다.
제주도에는 조방장에 대한 설화가 꽤 많지요.
친근하기도 하고 만만하기도 해서 그런가 본데...사실...
조선조에 조방장이란 직책은 그리 낮은 직책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말이 옆으로 갔습니다.
읍후 송구동 선정비를 보러 왔습니다.
읍후라는 관직에 대해서 알아 볼까요.
우리나라 기록에는 없고요...
고구려가 위의 속국인데 정시연간(애제가 다스리던 240년에서 249년사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관구검을 보내 환도산에 올라 고구려의 수도를 파괴했는데.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삼은 자가 수천명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이지요.
고구려를 공격한 내용을 보려는 것이 아니고
고구려를 공격한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공격하기전에 요동을 평정하였고
그 공로로 안읍후에 봉해 졌는데 식읍이 삼천구백호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定遼東。儉以功進封安邑侯,食邑三千九百戶。
이렇듯 읍후라는 것은 중국에서 공이 있는 이들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봉하는 직책이라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관직인데 보다 더 그럴듯하게 하려 했는지
육지부에서도 통상 현감을 읍후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는 앞면에 邑侯宋公斗玉善政碑라 음각되어 있으며,
그 우측으로는 捐出家財 防給民弊(가산을 출연하여 민폐를 막았다),
그 좌측으로는 如斯施惠 未有前世(이와 같은 시혜는 예전에 없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비석의 좌측면에 光緖十七年八月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고종 28년(1891) 8월에 세워졌다는 이야기지요.
송두옥이라는 분에 대해 조금 알아보면
김윤식은 『속음청사』에서 송대정(宋大靜)은 제주읍 사람으로 나이는 40여세,
너그럽고 후하여 민심을 얻고 있다.
제주 대정 정의 3읍 관(官)을 두루 역임했고 집안이 부유하나 남의 원망을 사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에서 알아봅니다.
"1850년(철종 1)∼1922년. 조선 말기 무신. 호는 귤헌(橘軒)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당시 제주목(濟州牧) 성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송신(宋藎)이고, 형은 위죽당(爲竹堂) 송지옥(宋之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구한말 18 척의 대선단(大船團)으로 교역을 한 당대의 부호이다.
1890년(고종 27) 3월 제주도 명월만호(明月萬戶)에 제수(除授)되었고,
12월에는 대정현감(大靜縣監)이 되었다.
1892년(고종 29) 7월 안승관(安承觀)의 후임으로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했다가
같은 해 9월에 그만두었다.
짧은 기간 재임하면서, 자신이 받은 급료를 내어놓고 낡은 폐단을 개혁하여, 주민들이 그의 송덕비를 세웠다.
1893년(고종 30) 5월부터 1894년 2월까지
하흥도(河興道)의 후임으로 대정군수(大靜郡守)로 재임하였다.
재임 중인 1893년 가을 기근이 심해 주민들이 기아 상태에 빠지자,
1894년(고종 31) 봄에 쌀 100 석을 내놓아 굶주린 주민들을 진휼(軫恤)하였고,
또한 대정향교를 보수하였다.
그 뒤 마종문(馬鐘文)의 후임으로 정의군수(旌義郡守)로 부임하였다.
1898년(광무 2) 1월 방성칠(房星七)과 강벽곡(姜?穀)이 민란을 일으키자,
전 현감(前縣監) 홍재진(洪在晉)·아들 송석진(宋錫珍)과 함께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아 민란을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홍재진(洪在晋)·김남윤(金南胤) 두 명과 함께 가자(加資)되어 품계가 올랐고
제주목사(濟州牧使) 이병휘(李秉輝)는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1901년(광무 5) 다시 신축민란(辛丑民亂)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 제주성이 함락되자 홍재진과 함께 목포로 피난하였다.
남의 원망을 사지 않는다라는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나 봅니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자 목포로 피난하였다라는 기록을 보면
방성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기 고향이기도 한 대정사람들과 어떤 척을 진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김윤식도 이 때 함께 피난을 갔습니다.
그리고 1890년 12월 부터 1892년 7월까지 대정현감으로, 1893년 5월부터 1894년 2월까지는 대정군수로 대정의 수령을 두번 지냈는데
그가 그렇게 자기급료를 내놓아 주민을 구휼하고 낡은 폐단을 개혁했다는 지역에는 송덕비가 없고
1894년 이후 그가 잠깐 군수를 지냈다는 정의현지역에 1981년 세워진 송덕비가 두기가 있습니다.
정의현 지역에는 이곳 말고도 또 한곳에 송덕비가 있습니다.
지금의 토평마을묘지안 잡목이 우거진 곳에 또 하나 있는데
같은 해 같은 달 만들어진 비석이 이곳에서 직선거리 1Km도 않되는 곳에 있습니다.
미스테리...
토평마을묘지 잡목숲 안입니다.
목사 윤구동 선정비와 군경 순직비와 같이 아주 큰 키를 뽐내며
읍후 송두옥 선정비가 있습니다.
조방장동산의 선정비와 같은(비슷한?)글씨로 邑侯宋公斗玉善政碑라 새겨져 있고
좌우에 많은 돈을 스스로 부담했다 그래서 우러른다 그래서 백성들이 안연하여 그를 우러른다는 뜻으로
千金自當 公何未慕 百堵晏然 民且願羨라고 쓰여 있으며
비석의 옆부분에 光緖十七年八月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서귀포시지에 各里籍費錢 捐廩殖利 甲午春 以小米一百石賑民 鄕將吏歲饌 存本殖利 聖殿修補改瓦라고 쓰여 있는데
이게 1890년 12월 부터 1892년 7월까지, 그리고 1893년 5월부터 1894년 2월까지 대정지역에서의 일이라면
그가 살지도 않았고 1894년에야 정의군수로 와서 짧게 그 직을 마쳤는데
1891년에 미리 선정비를 만들어 놓는다?
다시 한번 미스테리....
그리고 어쩌다 이 잡목숲속에 와 있는지도 궁금하고...
윤구동 선정비에 대해 블로깅하면서 알아볼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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