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 기념비입니다.
1943년부터 3년여 그가 근무했던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현 제주대 부속 아열대연구소)한 귀퉁이,
구 제주대농과대학 관사가 있던 곳 부근에 2003년에 세워졌습니다.
기념비는 브론즈로 조각된 석 선생의 흉상과 호랑나비가
서로 다른 화강암 받침대에 각각 올려진 모습으로 세워졌으며
화강암 전면에는 그의 연구업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굴뚝처럼 까맣다. 굴뚝나비.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 봄처녀나비.
그리고 수풀알락팔랑나비, 청띠신선나비, 모시나비, 풀흰나비, 어리표범나비
이렇듯 우리말의 정감을 한껏 살린 고운 이름들
이 이름들은 모두 석주명에 의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석주명은
1931년부터 1942년까지 11년간 송도고보교사로 재직하시면서
나비의 '변이 범위(variation sphere)'를 규명한 '변이 곡선' 이론을 이용 유연관계를 밝히고
계통을 세우기 위한 분포 지도를 완성하였습니다.
1942년 경성제대로 자리를 옮긴 석주명은
1943년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 파견을 자원했습니다.
그때까지 제주도는 채집여행이 쉽지 않아 그의 연구에서 취약지구였기 때문에
제주도 지역의 나비연구를 완성하기로 하고 모두가 꺼리는 벽지 근무를 자원했던 것이랍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28편의 논문을 쓰셨으며
그가 정리한 한국산 나비에 관한 총목록 A Synoni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접류 총목록)는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으며 영국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석주명은 제주도에 머무는 3년여 동안
나비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연구에 힘을 쏟았습니다.
제주 방언이 다른 지역 방언과 어떤 친연관계를 보이는가 하는 연구는
나비의 지역적 분포와 친연관계를 밝히는 것과 방법론상으로 똑 같았고
나비의 분포는 방언의 분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것 같습니다.
석주명의 제주도 방언에 대한 연구는 제주도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어,
1945∼1949년에 제주도 관련 논문 10 편을 발표했고,
1949년부터 ‘제주도 총서’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방언집』(1947년) 『제주도의 생명 조사서-제주도 인구론』(1949년)
『제주도 문헌집』(1949년) 『제주도 수필-제주도의 자연과 인문』(유고·1968년) 『제주도 곤충상』(유고·1970년)
『제주도 자료집』 (유고·1971년)을 출판했습니다.
1950년 전쟁의 총성이 서울을 휘몰아 칠 때도 석주명은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전쟁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말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과학박물관이 전소되고
그의 분신이었던 나비표본과 원고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지요.
10월 6일 폐허가 돼버린 과학박물관을 다시 세우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석주명은
시내에서 인민군으로 몰려 불의의 총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80을 목표로 학문에만 정진했던 그의 생애가 겨우 마흔 둘에 접히고 만 것입니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죽음의 총성과 함께 남긴 최후의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석주명이 죽은 후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일본인 학자 시로즈(白水隆)는
그를 기려 흑백알락나비 아종의 학명을 Hestina japonica seoki로 지었고,
시바타니(柴谷篤弘)는 네발나비과에 Seokia라는 새로운 속(屬)을 설정해
홍줄나비의 학명을 Seokia pratti로 명명해 주었습니다.
석주명이 죽어서도 '석'(seoki, seokia)자가 붙은 나비와 함께 날아다닐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여기 제주에서는 제주에 무한애정과 제주학 연구의 기틀을 다졌던
석주명 선생기념사업을 한다고 30년째 말만 오고갑니다.
작년이 그의 타계 60주년이었는데
그때도 말만 조금 나오다 지금은 쑥 들어간 실정입니다.
올레길이 이 옆으로 개설되었다면
이중섭이 십여개월 거처한 곳이나 김영갑갤러리처럼 조명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조차 허락되지를 않았습니다.
여기서 정반대방향인 애월읍 소길리에 생긴 프시케월드에는 석주명의 방이 복원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프시케월드 관장님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들을 모아
영업하는 곳 내부에 복원된 방이니 그 성격이 조금 다르지요.
참고로 이분의 동생 석주선도
한국복식사의 기틀을 세운 복식연구가로 전통의상 수집 및 연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동생 석주선은 1940년 일본 도쿄고등양재학원을 졸업했으며
8·15광복 때까지 이 학교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귀국 후 1945~1950년 국립과학박물관 공예연구실장을 맡으면서 전통복식사 연구에 열정을 쏟았지요.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단국대학교 대학원 교수로 재직했으며
그가 평생 모은 복식관련 자료는 8천여 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1981년 단국대학교에 개인소장품과 도서를 기증했고
단국대학교부속 민속박물관이 설립되어 관장을 맡아 일하다 1996년에 돌아 가셨습니다.
지금도 이분에 대한 연구발표는 계속되고 있으며
2009년에는 지하1층. 지상2층에 연면적 4천844㎡ 규모로 3개 수장고에 유물 4만1천550점을 보관하고 있는
석주선 기념박물관이 신축 개관하였습니다.
석주선 기념비 대각선 건너편에 높이 솟아 있는
어느 산악인의 이름을 딴 소공원과
그 중심부에 높이 솟아 있는 그의 기념탑을 보며 쓸쓸히 자리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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