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杜門洞)을 아세요?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과 만수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고려의 신하로 남기를 맹세한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합니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박침, 신규, 조의생등 고려의 충신 72명이 조선의 임금 모시기를 거부하고
개성의 북쪽 고개 마루에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걸어놓고, 광덕산과 만수산기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후에 그들이 넘은 고개를 부조현(不朝峴), 조의관(朝衣冠)을 걸어 둔 곳을 괘관현(掛冠峴)이라 하고,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여
그들이 살았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
두문(杜門)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는 의미이지요.
여기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사실 몇명이 몇년을 살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두문동 72현이 누구누구냐를 찾고 또 누구누구다하는 것도 기록마다 틀리는데
사실 72명이 넘을 수도 않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72현이라고 한 이유는 사기 공자세가에서 딴 숫자입니다.
사기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례(六藝)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에 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말하기보다는
다수의 현인(賢人)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였다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였던 분들이 몇년을 함께 살았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야사에 이성계가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고 하여 그게 정설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다시 이씨 조선에 출사를 한 황희, 안성, 조견, 하자종, 이행, 김자수같은 이들이나
다시 뿔뿔히 낙향 은둔한 길재와 이양소, 원천석, 서견, 배상지, 민유, 김선치, 맹희도, 문익점 등은 부활한 걸까요?
그렇지 않고 어느 일정시기 동안 두문동에 있다가 일부는 다시 조선조정에 출사를 했고
일부는 계속 두문동에서
또 일부는 자기 고향이나 벽촌으로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합니다.
이들 두문동 72현에 대해서는
두문동으로 들어갔다라는 기록 이후에는
몇몇 개별 인물의 행적만이 전할 뿐 그 어느 기록에도 언급이 되지 않다가
영조때에야 공식적인 실록에 등장합니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가 즉위 16년(1740.경신년)째 되는 해에 송도에 있는 재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참배하러 갈 때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답니다.
이에 신하들이“부조현은 개성의 대족(大族)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쓰여 있네요.
여기에서 不朝峴과 杜門洞이란 말이 공식문서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50여가문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72명이 아니란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영조는 부조현 앞에서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한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후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는 것과 같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합니다.
승국충신면계세(勝國忠臣勉繼世)라고요...
그리고 不朝峴세 글자를 써서 그 遺墟地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후 영조 27년(1751,신미년)에는 두문동 제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합니다.
또 御筆로 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라는 14자를 써서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합니다.
祭文의 일부를 옮깁니다.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曺)와 임(林)과 맹성(孟姓) 세 사람만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유지(遺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
사적이 점점 오래되고 문헌이 없어져 후세에 권장을 하려해도 표석이 없으므로
특별히 큰 글자 14자를 비석에 새겨 나의 뜻을 나타내었노라.
남긴 충렬을 생각하여 후손을 찾아내려 하며,
방위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깨끗하게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드리노라.’
그 뒤 정조는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이들을 배향(配享)하였습니다.
영조때 모든 정보를 다 얻을 수 있는 임금도 두문동 제현의 읾과 후손을 모르는데
지금 나름 뼈대 있다는 가문에서는 저마다 자기 조상의 이름을 끼어넣으려 합니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도 두문동이 있습니다.
태백에서 고한으로 넘어가려면 제법긴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그 터널을 지나면 두문동이라는 표석이 있습니다.
표석의 뒷면을 한번 보시지요.
윗부분에
"조선태조때 개성 만수산 두문동의 72명중 불에 타죽고 살아남은 일곱충신이
이곳 고한땅에 흘러들어와 변함없이 두문불출하며 살았다고 해서 두문동이라고 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두문불출이라는 단어를 탄생케 했던 최초의 두문동 외에도,
최후를 장식했던 두문동이 강원도 정성군 고한읍에 또 하나 있었던 셈이죠.
고한이 탄광촌으로 개발되면서 이곳 두문동까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계곡 가운데 지점. 누가 언제 묻혀는지도 모르는 공동묘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하고
마침내 공동묘지를 깍아내고 그 자리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대성국민학교로 이름지어 졌고
해발 970지점에 위치해 가장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학교로 기록이 되었답니다.
표지석 안내문 아래쪽을 옮기면 그래도 20년전까지는 800명이 넘게 살았고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운영되었던 대성국민학교 졸업생이 1655명이랍니다.
탄광촌이 점차 쇠락해지자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과 대성국민학교 졸업생들은 또 다시 전국으로 흩어져 갔으며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은 카지노로 인한 주민 소득증대라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산나물 채취로 겨우 생활하고 있을 따름 이라고 합니다
마을 위로 백두대간 금대봉코스의 필수 경유지점인 두문동재가 있습니다
태백시 삼수동에서 정선군 고한리로 넘어가는 고개입니다.
이 고개는 해발1,282m의 높이에 백두대간 두문동재 정선군 고한읍이라는 표지석이 크게 버티고 있는 고개로
포장국도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고개입니다만....
태백에서 두문동재로 연결되는 도로가 38번국도 두문동재 터널과 연결되면서
내가 서있는 이지점으로 길이 뚫려서
도로가 이상하게 일방통행도로처럼 되어 버려 가볼수가 없는게 아쉽습니다.
비석옆으로 마을 아랫쪽을 한번 더 내려다 보고 지금의 높이 1000미터 지점에서 내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