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괴산 - 화양동 계곡 (화양구곡)

하늘타리. 2010. 6. 17. 04:00

화양동계곡입니다.

화양구곡으로 가기전에 화양천을 건넙니다. 

 이 화양천은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에서 발원하여 화양구곡을 지나 청천면 화양리 달천 상류에 합류한답니다.
화양구곡은 이중 4Km의 화양천 주변 계곡을 말한다고 쓰여 있네요.

 양제1교라 이름지어진 다리를 건너서

그 자체로도 운치있는 계곡을 보며 걷다보니

 

 


속리산국립공원구역임을 알리는 표시가 있습니다.

 

1975년에 선유구곡과 함께 속리산국립공원구역에 포함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가로수길을 걷다가


자칫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표지판을 봅니다.

 

경천벽입니다.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바치듯 하고 있어 擎天壁이라 한답니다.

 

 

 

 

 

 

경천벽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푸른 산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여름철이면 차를 댈곳이 없을 정도라하는데 오늘은 텅 비어 있습니다.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 폼으로 주변을 둘러봅니다. 

 

 

 


 
성황당과 소나무가 있습니다.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네요.

화양동 정비사업을 하면서 여기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내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성황당이라...

 껍데기만 남은 거지요.

그 껍데기 조차도 관리가 제대로 않되는 군요. 소나무가 죽어 있습니다.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 안내

왜 화양동이라 불리울까요? 

그림을 보면서 송시열을 생각합니다.

 

시조한수.....

 

님이 혀오시매 나난 전혀 밋덧더니
날 사랑하든 情을 뉘손대 옴기신고
처음에 뮈시든 거시면 이대도록 셜울가...

 

해석이 필요하겠네요.
님이 나를 끌어당기시기에 나는 정말 믿었는데 나에 대한 사랑을 다른사람에게 옮기었네.

처음부터 나를 멀리 하였으면 이처럼 서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람둥이 애인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시조입니다.

 

그것도 임금에 대한 원망이지요.


그 당시 시조를 보면 임금을 임이라 표현하고 아무리 서럽고 원망스럽다하더라도
님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시조와 같은 표현은 참 보기드문 표현이지요.

 

어찌보면 임금을 같잖게 보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는 송시열이 지은 것으로 아마 1660년 현종1년에 우찬성으로 재직중 남인의 탄핵으로 낙향했을때나

1674년 가제,청풍등지에서 유배생활 할 때 지은시라고 추정합니다만 ...

송시열은 이미 1657년에  효종이 세자시강원찬선을 제수하여 곁에 끌어오려고 했으나 이에 불복하고

그대신 정유봉사라는 그야말로 왕을 주자보다 격하하는 오만불손한 시무책을 상소한 적이 있지요.

 

그럼에도 송시열일파의 서인 세력에 밀린 효종은 오히려 송시열에게 벼슬을 내립니다. 

7월에 찬선을 내리고 9월에 이조판서를 내렸습니다.


그러다 1659년 5월 효종이 의문사합니다. 

 

효종의 사인을 놓고 새임금 현종이 주치의 이기선을 문초하자 의관이란 작자 하는 말이

 자신은 맥을 집을줄 모르는 의관이라고 발을 빼자 현종이 이를 처형하려 했습니다.

이 의관을 주치의로 추천한 송시열은 이기선은 잘못이 없다고 두둔하여 구명합니다.

 

그후 효종의 장례절차를 놓고 예송논쟁중 효종을 적통이 아닌 서자취급해버립니다.

이 때 윤선도가 한 말이 있습니다 .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않고 신하(송시열)에게 있습니다"라고요.
여기서 판정승한 송시열은 몇년후 인선왕후장례때도 임금에게 맞섭니다.


이번엔 임금이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그 뜻을 관철하자 서인세력을 규합 임금에게 집단으로 맞섭니다.
불안을 느껴 남인을 영의정으로 제수한 현종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새 영의정 도착 바로 다음날 숨을 거둡니다.

승승장구하던 송시열은 그후 잠시 귀양가 있었으나 다시 1680년 경신환국으로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그러다가 서인 내부에서 노론 소론의 내분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화양동에 들어갑니다.


그제서야 조정이 조용해 졌는데
1689년 왕자 균의 세자책봉때 송시열이 이를 맹렬하게 반대하는 소를 올립니다.
왕가 내정에 일일히 간여하려는 송시열의 오만함에 숙종은 분노합니다.

사실 송시열은 소현세자의 의문사이래 선대왕들의 의문사 현장에서 있던 사람중 한사람이며

모든 분쟁을 일으키는 서인의 영수입니다.


1689년2월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귀양보냈습니다 .
100일 후  송시열은 다시 국문을 받기위하여 송환되던중 정읍에서 사사되였습니다.


송시열에 대해서는 글을 쓰는게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가까이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최고의 성현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자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인물입니다.
송시열을 높여 부를 때 孔子,朱子와 함께 宋子라 합니다.

子字가 붙으면 극존칭이 되지요.

송시열은 문묘에 배향됐습니다. 문묘 배향은 학자로서의 최대의 영예입니다.

정조때에는 그의 문집 송자대전이 국비로 간행되기에 이릅니다.
정조가 편찬한 양현전심록에는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주자를 비난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한쪽에선 그를 '宋者'라 부릅니다.

'송가놈'이란 뜻이지요.

한국의 유학자 중에서 송시열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를 추앙하는 쪽은 ‘斯文의 宗師’, ‘我東의 朱子’, ‘泰山喬嶽’이라 하고,

반대쪽은 ‘당쟁의 화신’, ‘권력욕의 화신’, ‘골수 사대주의자’ 등이라 비난합니다.


오죽하면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 칭하기도 했겠습니까?


송시열 개인은 치열하게 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뭣 때문에 그는 싸웠을까?
국민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으며 나라에는 무슨 이익이 돌아갔는가? 
무엇으로 국리민복을 위하였는가?
결국 그는 자기당파의 입장대변에 충실했던 것이며
이상하게 반대하던 임금들이 의문의 죽음을 계속 당하여 세가 커지고 그 세력이 강고해짐에 힘입어 더욱 오만방자한....
자기만이 최고이고 최선인 그런 인물일 뿐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송시열에 대해서는 글을 쓰기가 싫은데 화양구곡을 블로깅하려니 송시열을 안쓸수가 없군요.


그래서...그래서...6월 1일경 다녀온 곳을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
사진 버리기는 아까워 블로깅합니다.


비전문가의 여행소감이니 학문적 깊이는 없습니다.
그러니 송자를 추종하시는 분들은 패스하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시 또 다른 화양구곡 안내판입니다.

 

華陽洞은 송시열이 中華의 華자와 一陽來福의 陽자를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陽자를 따온 一陽來福이란 易學에서 동짓달을 의미하는데, 陰이 극치에 달하여 다시 陽이 태동하는 冬至를 일컫습니다.

즉 중화가 밤이 지나면 낮이 다시 오듯이 되살아 날 것이라는 뜻으로,

오랑케인 만주족 淸나라가 멸망한 후 중화인 明나라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慕華思想을 담은 표현이지요.
그리고 송시열은 화양동의 뛰어난 경치 중에서 아홉곳을 골라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했는데,

이 역시 성리학을 완성한 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받은 것입니다.

 

화양구곡에는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이라는 이름을 붙여 있습니다.

 
고민합니다.
어디로 갈까?
첨성대에서 도명산을 오른후 낙영산으로 해서 공림사로 빠질까?
첨성대에서 도명산을 오른 후 학소대로 내려온 후 파천을 갔다가 화양천을 따라 내려올까?
아니면 화양구곡을 쭉 따라간후 선유동구곡까지 계속?
화양구곡과 선유구곡은 몇번 와 봤지만 도명산은 안올라 가봤는데...
일단 가보자. 혼자 걷는길 아무런들 어떠랴... 

 

커다란 바위위에 새한마리가 저놈은 이 좋은 날 혼자서 어딜가나 하면서 쳐다봅니다. 


꽤 큰새인데 엄청 큰 바위위에 있으니 곤충같네요.
그래요. 이세상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아닌 주변의 모습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지요. 

 

주변의 모습을 둘레 둘레 살피며 운영담으로 갑니다. 

 

 

 

화양2교를 건너면서 이 수중보가 언제 만들어 졌을까 하는 짤막한 호기심을 갖지만 누군가 대답해 줄 이 없을게고

 

 

계속 길따라 오르니 운영담이 보입니다.


맑은 물이 모여 沼를 이루고 있고,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이라 이름했다 합니다.
길옆에 노는 다람쥐와 인사하고  운영담으로 보다 가까이 다가갑니다. 

 

 

 

 

 

 

 

 넘어온 다리쪽으로 바라보며 수량을 가늠해 봅니다

 

또 올라가야지요.

 

 

 

 


제주의 정낭석같은 것이 길옆 좌우에 있습니다.


구멍이 두개인 것이 제주의 것과는 다르지만 하여간 횡목을 찔러넣어 출입을 통제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능입니다.

 

건방진 하마비가 있던데
무시해 버리고


우암 송시열유적. 사적 제 417호입니다.

 

 안내문을 한번 옮겨적어 볼게요.

"이 유적은 조선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의 애국사상과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는 민족자존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은거했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조선시대 학자들의 모임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의 위폐를 모신 사당으로 옛터가 잘 남아있다.

또한 주변에는 송시열의 묘소와 신도비, 암서재, 용궁암외에

암서재 주변의 암벽에 충효절의, 비레부동 등이 새겨져 있어 반청애국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건립이후 조선조 말까지 조선 성리학의 중심이었던 이 유적은 경술국치후 일제에 의하여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당하는 수난을 겪은 곳이다."

이 안내문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나만 말하지요.
반청은 맞을지 모르지만 이곳에 민족자존은 없습니다. 오로지 숭명일 뿐이지요.

 

풍천재 

 

 

 증반청

 화양서원

 

 

 화양서원에서 본 만동묘 가는 계단

 외삼문인 양추문.

 

 양추문 앞 계단. 모든 계단이 사람이 모로 걸어가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내삼문인 성공문

 

 비각입니다.
만동묘정비가 있는 곳이지요.

 

 안내문을 보시지요.

 만동묘정비

 글자는 누군가가 고의로 정으로 쪼아 훼손되어 판독이 어렵습니다.

 

만동묘입니다. 전경을 잡느라 어안렌즈식으로 찍었습니다.

 

 

송시열이 국문을 받기위해 귀양지 제주에서 올라오는 길에 권상하에게 남긴 영결편지로 지어진 곳입니다.
편지 안에 들어있는 '화양동에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제사 공간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워라'는 글에 따라

숙종 29년(1703) 이곳에 만동묘라는 큰 사당을 건립하게 됩니다.

 

철저히 사대적 표현인 萬東을 쓰지요.

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이름으로,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만동묘를 지을때 우여곡절이 참 많았답니다.
정치판의 실세인 노론측에서는 어떤 논리를 갖다대던 지으려 했고 노론의 반대파였던 남인, 소론등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남인들은 "예에서 말하는 제사는 그 나라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모두 亡人이 살았던 땅에서 제사한 것으로, 정신과 혼백이 그곳에 있음에 기인한 것이다".

"화양동은 명나라 천자에 있어 어떠한 관계도 없는 곳이며 천자의 사당이라면 천자의 예악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며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만부는 "명분을 훔치고 널리 私黨을 심었으며 조정을 기롱하고 국맥을 손상시켰다"라고

송시열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만 실세를 이길수 있나요.

송시열이 죽은지 14년 만에 완공됩니다.
 
곡절 끝에 세원진 만동묘는 대단한위세를 펼치지요.
오죽하면 만동묘지기는 삼정승위에 있다라는 승경가도 있고

이 만동묘앞에서는 양반들도 두 손을 앞에 모으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걸어야 했다해서

'누가 떼어 갈까봐 물건잡고 화양동길 지난다'는 말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여러가지 폐단으로  철거됩니다.

이후  다시 복원돼 일제강점기까지 제사를 지냈으나,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복원되었습니다.

 

위패

 


머나먼 타국땅 물색없이 계시는 두분은 무슨생각을 하실까요?
고마워하실까요?
아니면 내나라는 망치고 남의 나라에 와서 팔자에 없는 제사밥 얻어 먹는다고 무안해 하실까요?

내삼문을 통해 보이는 건너편 산에 계시는 산신은 또 무슨 생각하실까요?

헛기침하듯  주변을 둘러보고


되집어 내려옵니다.

 

 

 

송자사상선양사업회에서 만들어 세운 화양동사적비

 


단기4326년이라고 건립일을 적었는데 송시열에게 단군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차라리 주자탄생후 몇년 아니면 숭정후 몇년이라고 적었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읍궁암 안내판입니다. 


효종이 돌아가시자 매일 새벽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던 바위라 읍궁암이라 한답니다.

효종이 죽었을때 그는 도성에 있엇지요.

그리고 효종이 의문사하여 그 의관을 문초할때 그 의관이 이조판서인 자기부하라고 두둔하여 구명하고

예송논쟁중 죽은 효종을 적통이 아닌 서자취급해버린 송시열이 언제, 왜 여기와서 앞드려 울었을까요.
그렇다니까 그런가 하시고

주변에 와서 글한수남긴 사람들의 시비도 보시고(해독은 잘 않될겁니다마는..)

 

 

 

그 주변 풍광과 그 자체가 사람이 엎드린 것 처럼 보이는 읍궁암을 둘러보세요.

 

 

 

 

 

 

 

 


사람들이 않믿으니 구구절절한 설명문을 세워 놨습니다. 

 효종과 북벌을 상의했다 등등..
효종은 그와 상의 했겠지만 송시열등 서인세력은 내심 북벌을 반대했고 북벌을 할 군사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이었습니다.

 화양서원 묘정비

 

 금사담방향으로 올라갑니다.

 

 

 

 

 


금사담과 암서재.

안내판에 쓰인 글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보이는 계곡 속의 못이라는 의미로 금사담이라 불리며,

화양구곡(華陽九曲) 중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조선 숙종(1661~1720)때 우암 송시열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이곳 반석 위에 집을 지어 이름을 암서재라 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하였다.
이 건물은 그간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쳤고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중수되었다.
 
암서재를 오가게 하던 냇가의 시설물이 없어 졌습니다.

일부러 못가게 치운 것 같은데 뜀돌을 이용 건너갑니다.

 

 

 

 

 

 

 

 

 

 

 

 

               溪邊石崖闢   시냇가 바위 벼랑 펼쳐진 곳 
             作室於其間   그 사이에 집을 지었노라.
                      靜坐尋經訓   조용히 앉아 경전의 가르침 찾아
                              分寸欲躋攀   시간을 아껴 높은 곳에도 오르리라.

 

송시열이 정사를 건립한 직후인 1669년 12월경 지었다는 화양동암상정사음(華陽洞巖上精舍吟)’이란 제목의 한시입니다.
이 시는 암서재에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현판 글씨는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건너와서 식당을 잠시들르고


말 그대로 점을 찍고 나오면서 본 식당옆 바위 밑면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가 마애되어 있습니다.


혹시 고려 충렬왕때 창건한 수도암 옛터로 올라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네요.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펄치고 암서제를 한번 더 바라보고 첨성대쪽으로 올라갑니다. 

 

 

 

 첨성대입니다.

 
큰바위가 첩첩히 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위에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부른다 합니다.

 

 

다리를 건너 첨성대밑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하천을 다시 건너와 찾아간

대명천지 숭정일월

비례부동


 

대명천지 숭정일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 황제의 것이다.

此八字陪臣宋時烈嘗書與人者也正宜於此山中謹摸以勒陪臣閔鼎重奉至與宋時烈謹拜手稽首摸勒時四十七年甲寅四月日也  
(차팔자배신송시열상서여인자야정의어차산중근모이륵배신민정중봉지여송시열근배수계수모륵시사십칠년갑인사월일야)

 

비례부동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중국을 다녀온 민정중이 사행길에 명나라 마지막 숭정황제 의종의 글을 가져와 송시열에게 주었고 그 글을 이곳에 새기여 놓았다 합니다.

 

참 대단한 송자선생입니다.

 

다시 하천을 건너고 다리를 다시 넘어와 도명산으로 올라갑니다.

 

 

 

 

도명산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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