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생이 1840년부터 9년간 귀양살이를 한 대정읍 안성리에 추사유물전시관이 재건립되었습니다.
예전 전시관이 낡았다고 철거하고 새로 지어 제주 추사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혔습니다.
추사관은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린 ‘세한도’(국보 제180호)에 나오는 건물 모습을 본떠 지었답니다.
관계자라는 사람은 “세한도를 모티브로 장식적인 요소를 버리고 기교를 절제해 추사 선생의 정신세계를 최대한 담아내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는데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저에게는 사실 좀 어색합니다..
외양이 어떠 하던 그 속에는 추사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을테니 어색한 들 어떻겠습니까만...
???
전시실에는 추사의 작품세계와 가계, 그의 선조가 남긴 작품, 제주에 유배 오기 전과 유배 시절, 유배 이후의 삶과 작품,
제자와 지인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합니다.
들어가시죠.
아참 들어가기전에 추사연표정도는 읽고 들어갈까요.
입구에서 나눠주는 리플릿 중 연표부분만 복사했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추사의 작품만을 논하기로 하지요.
들어가자 마자 우리가 아는 몇 않되는 추사작품중 대표
세한도가 보입니다.
제주도 유배시절 변함없이 책을 보내주는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담아그린
동그란 창문이 있는 길다란 집, 그리고 그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있는 그림입니다.
세한도라는 표제글도 삭막한 글씨체로 썻지요.
저는 이그림을 처음보았을때는 중국풍으로 보았습니다.
이상적이라는 역관이 제주도에 와서 살아봤을리 없고
중국은 자주 다니니까 중국 어딘가의 황량한 경치를 그리면 이상적이 내처지를 더 잘 알아보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린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요.
지금도 이그림을 황량한 제주의 바람과 풍토를 그린 그림이다라는 해설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옹방강의 소재를 방문했을때 보았던 언송도의 찬문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소동파가 혜주로 유배되었을때 어린아들이 부친을 위로하기 위해 그 멀리 찾아옵니다.
그에 감격한 소동파는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 그림을 그리고 언송도라 제한후에 아들을 칭찬하는 글을 적어 머리병풍으로 사용합니다.
그림은 없어지고 글씨만 남은 것을 옹방강이 구하여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 찬문에 대한 시를 짓습니다
古松偃蓋全攲戶
고목이 된 소나무는 비스듬히 나뭇가지 드리우고 집에 기대어 있네라는 뜻이지요.
추사는 자기가 유배되자 소식도 끊는 사람들이 많은 속에서
이전과 변하지 않고 청나라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고 청의 소식을 알려주는 이상적에게서
공자가 왜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수있다고 했는가를 깨우친겁니다.
그래서 발문을 일단 논어 자한편의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라는 구절을 정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린후 세한도라고 드라이하면서도 산뜻하게 쓰고
이어서 세로로 우선시상이라 쓰고
또 줄을 바꿔서 완당이라 쓰고 정희라고 쓰인 인장을 찍습니다.
세한도라는 글씨에서시작된 그림이
자연스러이 소나무가지끝 솔잎으로 이어집니다.
뭘 모르는 내가 보아도 기가막힌 구도입니다.
이거 작품 하나하나 감상을 이렇게 길게 쓰다간 세월을 하 잡아먹겠습니다.
넘어가지요...
보이는 순서대로 찍은 사진입니다.
春祝이라는 글이 보이네요
영조가 써서 화순옹주에게 써준 입춘첩입니다.
이 칸은 건너뛰고 우선 추사가 썻거나 추사와 관련있는 작품부터 보겠습니다.
허소치. 완당선생해천일립상
대둔사 아시지요
해남에 있는건데
요샌 대흥사라고 하네요.
추사가 제주도 대정골로 위리안치오면서 해남을 지나옵니다.
오랜 벗인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서죠.
대둔사 대웅전에 와보니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편액이 있습니다.
한껏 기교를 부린 가느다란 서체에 눈살을 찌푸리며 예서체로 두껍게 무량수전이라 쓰고
원교의 편액을 내리고 자신의 글씨를 걸라고 부탁합니다.
이후 귀양지에서 풀려나 상경하는 길, 추사는 다시 대흥사에 들릅니다.
다시 원교의 편액으로 거는 것이 좋겠네.
이 일화를 두고 “추사가 고된 귀양살이를 하며 법도를 벗어난 개성의 가치를 깨우친 것”이라 합니다.
지금 이 현판은 대둔사 대웅전앞 백운당에 걸려 있습니다.
금석종횡내여차 문학각화신능위
부산박물관에는 조금 바뀌어 있지요.
문학종횡각천성 금석각화신능위
소봉래
충남예산 오석산 바위에 새긴 글씨
천축고선생댁
예산 화암사뒤 암벽
한때 유학자들 사이에서 부처를 고선생이라 불렀으니 크게 탓할 수는 없을 듯..
세한도를 선물받은 이상적은
다음해 중국연경가는 길에 이그림을 가지고 갑니다.
당대 중국에서 날리던 장악진, 조진조 등 16명의 제와 찬을 받아 돌아옵니다.
그림 왼쪽 발문은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이유를 적은 것입니다.
끝부분..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어질었던 사람조차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이 모였다가 흩어지곤하였다.
하물며....세상인심의 박절함이 끝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추사가 쓴 왕희지의 청리내금첩을 평하는 글을 조카사위 조면호가 새긴 것.
그아래는 서한시대 거울의 명문을 추사가 옮겨적은 것의 탁본
군거효렴주박사 작리고천차생이자손
留齋
추사의 제자 남경필의 호를 예서체의 글씨로 쓰고 내용풀이를 하였습니다.
의문당
추사가 제주유배시절 대정향교에 써준 현판입니다.
향교학생들의 공부방인 동재에 걸려 있습니다.
푸른 대나무 같이 청렴하여라라고 누군가에게 하는 훈계(?)
구성미가 뛰어나고 청자의 조형미가 뛰어나답니다.
노완이라는 호를 썻네요.
무량수각
추사가 귀양살이중 예산 화안사가 중창한다는 소식을 듣고 써보낸 글씨입니다.
이 글씨는 대둔사의 무량수각글씨와 많이 비교되는데
대둔사의 글씨가 획이 기름지고 두텁고 자신감에 넘쳤다고 한다면 이 글씨는 매마르고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라 합니다.
추사의 스승인 중국 완원의 남북서파변을 정리해서 쓴 글입니다.
추사의 또다른 당호인 완당은 바로 이 완원을 존경하는 뜻에서 만든겁니다.
판전
봉은사. 부처님 말씀을 새긴 경판을 보관 하는 집.
추사 사망 사흘전 글씨입니다.
그 왼쪽 글이 마음을 적십니다. 71세의 과천노인이 아픈가운데 쓰다..
추사가 지은 백파선사 긍선의 비문
추사가 유배중인 58세때 백파망증15조라는 글을 지어 선사를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글에는 "백파뿐 아니라 산문의 절 모두 무식한 무리다. 이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링이와 떡다툼하는 것 같아 창피하다"라고 쓰여 있지요.
그러던 추사가 그의 나이 70세, 백파사후 3년에 "어찌하면 다시 스님을 일으켜 세워 마주보고크게 한번 웃을 수 있을까?"라는 비문을 짓습니다.
선운사 부도밭에 있습니다.
추사가 박정진이라는 제자에게 보내는 안부편지
간찰집에 실려 있는 편지.
추사는 살아있을때 자신의 글을 책으로 펴낸바 없습니다.
사후 10년에 제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선생의 글을 모아 간행할 때 실린 편지입니다.
풍사실
豊士는 대인을 나타내는 말로 마음이 넉넉한 선비의 방으로 해석된답니다.
예서체로 썻지만 전서가 가미되었습니다.
대단히 기교를 부리면서도 고졸한 느낌을 주는 명품이라고들 평합니다.
후대에 집자한 현판글씨,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의 두아들과 친교가 있던 추사가 그들의 부탁으로 써주었다 합니다.
추사의 행서가운데 필이 대단히 빠르면서도 굳세고 글자가 바람에 날리는 듯하여 추사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글씨로 자주 이야기 된답니다.
추사의 칠언절구
정원의 가을이끼 쓸어내지 않았는데
바람앞에 붉은 낙엽 점점 쓸려가 스러지네...
서법에 대해 추사가 쓴 글의 탁본첩.
우리나라 글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숭례문과 홍화문 편액은 좋은 글씨
한석봉과 이광사의 글씨는 나쁜 글씨
빈산에 사람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도 절로 피네.
공산무인 수류화개라는 소동파의 나한송의 글을 예서체로 썼습니다.
空자와 流자의 구성이 김정희의 진면목을 보여준답니다.
유배후 사용한 책력인데
김정희가 쓴 편지와 시 등 17점이 수록되어 있다합니다.
석년. 돌로된 해시계
예산 추사고택에 있는 돌기둥에 남아있는 추사의 서자 김상우의 글씨 탁본
정약용이 자기 친척한테 쓴 편지
정약용의 맏아들 정학연이 그 지인에게 쓴 편지
추사의 동생 김명희가 형에게 보낸 편지와 시
이하응이 대원군되기전 다산의 강진유배시절 제자에게 쓴 편지
입구쪽 전시관 첫블럭
추사의 선조와 관계있는이들의 작품을 다시 봅니다
영조의 춘축
궂이 따지면 영조가 추사의 외고조부쯤 되지요.
맞나? 친아버지 김노경, 할아버지 김이주, 증조 양 할아버지 김한신, 김한신의 부인 화순옹주, 화순옹주의 아버지 영조...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에게 휘덕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올릴 때 김한신이 쓴 시책문.
희우. 반가운비
큰 가뭄으로 산천초목이 메마르자 가뭄이 해갈되기를 바라며 기우제를 지낸 영조가
때마침 조그마한 비나마 내리자 반가워 하면서 온나라에 비가 내리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영조가 사위 김한신을 격려하며 지은 칠언절구
화순옹주를 애도함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는 13세에 동갑나이 김한신과 혼인하였고 26년간 정겹게 살아왔지만
남편 김한신이 39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열흘을 굶어 스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영조가 정성이 부족해 되돌릴수 없으나 그 정절을 아름답게 여긴다고 하였고 제문을 지었습니다.
영조는 화순옹주가 아비말을 듣지 않은 불효녀라 하여 열녀문을 하사하지 않았고
그녀의 조카 정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왕실에서 처음나온 열녀라 하여 홍문을 하사했습니다.
영조가 직접쓴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묘표입니다.
오른쪽 주상전하어필(영조)
왼쪽 왕세자저하어필(사도세자)
성균관서생들이 그들의 행동을 紛競(소란스러이 다툼)이라고 표현하자 捲堂을 한 것 같네요.
달래고 앞으로 그러지 말아라라는 뜻의 글이 쓰여 있습니다.
추사의 양아버지 김노영의 오언절구 시.
저녁구름 언덕에 걸리더니
등불 흔들리며 비는 담장을 때리네
뭇봉우리 보이지 않고
흐르는 물 불어나는 소리만 들려온다......
추사의 양아버지 김노영의 칠언절구 시
손님이 찾아와...
이제 머리와 눈이 너무 호사가 지나쳐 혹사되지 않으려면 돌아가야 겠습니다.
추사 지인들의 작품 몇점을 더 둘러보고
가면서 추사생전 마지막 글씨를 한번 더 보고
배웅해 주시는 선생님께 인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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